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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25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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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2022년 10월 25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0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페 5,21-33)
    둘이 한 몸을 이룸은 큰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3,18-21)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25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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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음
루카 13장 18-21절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연준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5일 (화)
최연준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5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이라는 공통 주제 안에서 서로 밀접한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두 비유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남자는 겨자씨를 자기 정원에 심고, 여자는 누룩을 밀가루 서 말 분량의 반죽에 집어넣습니다. 

정원에 심은 겨자씨는 어느덧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겨자 나무의 크기는 보통 1미터 내외지만, 예외적으로 2미터 이상 자라나기도 합니다.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은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쳐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밀가루 서 말은 무려 50리터가 넘는 분량인데, 이는 성인 150명이 거뜬히 먹고도 남는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 그리고 누룩과 같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아주 작은 크기 또는 적은 양 속에 숨어 있는 이들의 강력한 잠재력에서, 하느님 나라의 미약한 시작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힘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연속성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는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와 그 탄생을 목격한 가난한 목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루카 2,1-20 참조). 메시아로 기대되었던 그 아기는 커서 실망스럽게도 비참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루카 23장 참조). 

그러나 곧 반전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가 외치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퍼져 나갑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유다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그리고 세상 곳곳에 퍼져 나가는 모습과 더불어 나날이 성장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그렇게 이천 년의 세월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다다랐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며 성장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순종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부 관계를 사랑과 순종의 관계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 가운데 여자는 미사 때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것과 함께 매우 봉건주의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는 데 비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니 말입니다. 서로 순종하라고 하거나 오늘 독서의 첫 구절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 문제없을 텐데. 

사실 요즘 세상에 누가 누구에게 순종합니까? 그럼에도 저는 오늘 바오로 사도를 변호하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 관계가 많이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실은 같은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사랑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참 사랑이라면, 순종하기 마련이고, 순종이 복종이 아니라 참 순종이라면 순종은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사랑꾼들은 사랑 때문에 순종하지 억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자식이 원하는 것을 엄마가 해 주는 것은 사랑 때문이고, 연애 시절 한 여자가 원하는 것을 한 남자가 하는 것은 강요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랑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랑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의 재능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부모의 도리일까?

 

TV프로그램 ‘안녕하세요’에 딸이 하기 싫다는데 그 꿈을 강요하는 아빠가 나왔었습니다. 딸은 아빠가 무서워 연기공부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아빠는 그렇게 싫다고 말하는 딸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아빠가 딸의 재능을 발굴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빠가 연예인이 꿈이었습니다. 생각대로 잘 안되자 딸이 자기 꿈을 이뤄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부모의 도리가 과연 자녀의 재능을 찾아 성장시켜 주는 것일까요? 부모는 자녀에게 방향만 알려주면 됩니다. 그러면 자녀가 자전거를 타고 가든 오토바이나 차를 타고 가든 그것은 본인이 결정하면 됩니다. 

디팩 쵸프라가 이것을 잘했습니다. 두 아들에게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것인가만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이웃을 도와주다가 사람의 심리를 잘 알게 되어 사업가가 되었고, 동생은 공부 못 하는 아이를 가르쳐주다가 하버드 교수가 되었습니다. 방향을 아니 재능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내 안에 뿌려진 씨를 잘 키울 때만이 이뤄질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겨자씨를 잘 키우지 못하던가 누룩을 넣고 불로 잘 요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잘 키워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노력이 없으면 겨자씨는 썩어버리고 누룩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를 잘 키워가기 위해 꼭 필요한 유일한 것은 ‘좋은 뜻’입니다. 내가 썩어갈 것인가, 익어갈 것인가 중 어떤 것을 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는 되어갈 것입니다. 나에게 씨는 이미 뿌려졌습니다. 좋은 뜻만 있으면 됩니다. 내가 휴식 같은 친구가 될 것인지, 맛있는 빵이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 방향을 정해줄 수 있는 대상이 부모이고 스승입니다. 

방향을 알았으면 자기 재능은 기도로 찾아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위한, 이웃에게 먹히는 삶이 행복이라는 씨앗을 우리 마음 안에 뿌리신 분입니다. 이 씨앗을 키워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승복 씨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기계체조를 하다가 큰 부상을 당합니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한 선교사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뜻이고 분명 좋은 뜻이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승복 씨는 자기와 같은 처지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열심히 재활하고 공부하여 하버드 의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이 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먼저 모기처럼 나를 위해 살 것인지,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살 것인지가 결정이 되면 비로소 찾게 됩니다. 

일본 소프트 뱅크 손정희 씨도 죽음의 문턱에서 아프리카 한 소녀의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겠다는 좋은 뜻을 가지게 되면서 병이 낫게 됩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아주 좋은 일을 많이 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에게 먼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뿌려줍시다. 그 씨앗이란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휴식 같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고 부드러운 빵이 되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성장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양한 자기 모습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다양성도 인정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보다 보면 그의 충격적인 사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네살 짜리 아이처럼 혀를 쭉 내밀고 찍은 사진입니다.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몇몇은 사진을 조작한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점잖고 존경받는 그리고 위대한 지성을 가진 아인슈타인이 그런 자세를 취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진을 받았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기 싫다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량으로 복사해서 메모 카드까지 만들었습니다. 이 모습 역시 자기 모습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철없다고 비난했지만, 공개적인 사과와 앞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겠다는 기자회견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 역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인정하지 못하면서 남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자기 모습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다양성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성을 서로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 삶은 더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자주 말했었다고 합니다. 즉, 거대한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현재의 이스라엘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능력을 휘둘러 하느님 나라를 유다 땅에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라고 평가받고 있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도저히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로마에 반대해서 모두 들고일어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뽑은 제자 역시 마음에 들지 않지요. 하나같이 무식하고 어딘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느님 나라는 가난하고 울고 쫓기는 사람의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시작은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결말은 놀랍도록 위대하리라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가져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을 인정하면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그 다양한 활동이 겨자씨와 누룩처럼 놀랍도록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

- 엘리잘 벤 주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치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가치는 씨앗처럼 싹이 나고 자라서 함께 나누어집니다. 겨자씨 하나가 겨자 나무로 자라나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하다 여겼지만 하느님께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가슴으로 번지는 삶의 신비 믿음의 신비입니다. 하나의 씨앗이 하늘의 새들이 깃 들이는 어엿한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여정을 지나갑니다. 시련만 있고 성장이 없다면 우리의 영적여정은 생기를 잃어갈 것입니다. 성장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하늘의 새들조차 깃들일 수 없는 슬픔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겨자씨처럼 성장하는 것입니다. 자라나지 않는 사랑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사계절과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사랑을 성장시키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말구유의 아기에서 시작하신 분이 모두를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구원은 가치를 사는 삶의 참된 뒷모습입니다. 요란스럽지 않게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삶의 깊이입니다. 겨자씨와 겨자나무를 빛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사랑을 향해 힘차게 발을 다시 내딛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 안에서 자라나고 웃고 우는 생명의 모든 여정, 사랑입니다. 사랑은 건강하게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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