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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2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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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2022년 10월 28일 (금)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0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페 2,19-22)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12-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28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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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복된 사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신비를 저희에게 알려 주셨으니 거룩한 시몬과 유다의 전구를 들으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 나날이 늘어나 교회가 끊임없이 발전하게 하소서.

 

 

복음
루카 6장 12-19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희전 루케치오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8일 (금)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박희전 루케치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8일 (금)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 우리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의 축일을 지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명단에 등장하는 이름 말고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어서, 다른 사도들에 견주어 덜 알려진 것이 사실입니다. 

시몬 사도는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의 곳곳에서 늘 열혈당원으로 소개됩니다. ‘열혈당’은 당대 패권을 쥔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하려고 기원후 6년 무렵 조직된 유다 민족주의적 당파로 ‘젤롯파’라고도 불립니다. 시몬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러한 독립 운동에 가담할 만큼 열성적이었고 또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던 인물로 보입니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과 이름이 같습니다. 루카 복음의 열두 사도 명단은 유다라는 이름과 함께 그를 야고보의 아들로 소개하지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의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 대신에 ‘타대오’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타대오는 아마도 유다 사도의 그리스식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시몬과 유다 사도는 함께 선교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몬과 유다의 수난기』라는 초기 문헌에 따르면, 두 사도는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함께 여행하며 복음을 선포하였고, 선교 영역을 페르시아까지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 모두 페르시아 지역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들의 순교에 대하여 여러 전승이 있는데, 시몬 사도는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하였고, 유다 사도는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는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 작품에 두 사도가 표현될 때, 시몬 사도는 톱과 함께, 유다 사도는 창과 함께 묘사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가운데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루카 10,1 참조). 고된 선교 여정 가운데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이 되어 주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시몬과 유다 사도는 그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듣고 기쁜 소식을 함께 전하러 다닌 사도들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연 바뀜

 

시몬과 유다 사도가 같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는 설과 둘이 같이 선교를 떠나 같이 순교했다는 설에 근거합니다. 둘 다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의미가 남다를 것입니다. 혈연의 인연에 매이거나 가두지 않고, 혈연의 인연을 넘어서 주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혈연의 인연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도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을 수 없다고 하신 주님 말씀대로였을 겁니다. 

자기의 형제인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기 어려웠을 겁니다. 

시몬이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사람임을 감안 할 때 사도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독립투사 되거나 형제라는 연줄을 이용하여 예수가 왕이 된 이스라엘의 왕국의 일개 신하가 되려고 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유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시몬과 상의하고 같이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텐데 이러한 인간적인 연줄을 끊은 것은 그들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끊으신 것이고, 주님께서 그들의 바람이나 생각과 다른 길을 가심으로 끊긴 것입니다. 

두 사도뿐이 아니겠지만, 주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심으로써 닭 쫓던 개처럼 되어 버린 것이고, 이때 두 분은 생각했을 것이고, 선택해야만 했을 겁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척들에게 예수를 따랐는데 이렇게 됐다고 패잔병의 보고를 하고 고향에 눌러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제자들처럼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두 분은 다른 제자들처럼 엉거주춤 예루살렘에 남아있었고 그다음 얘기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성령을 받고 사도로 거듭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주님의 두 형제가 같이 육신의 형제에서 주님의 사도로 바뀌고, 같이 주님의 사도로 페르시아까지 선교한 것을 보며 이런 바뀜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혈연(血緣)에서 영연(靈緣)으로의 바뀜 

인연(人緣)에서 신연(神緣)으로의 바뀜 

 물론 이런 말은 없고, 제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그 뜻은 혈족적이고 인간적인 인연(因緣)이 신적이고 영적인 인연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리고 두 분을 보면서 우리 인연들이 어떻게 맺어졌건 간에 우리의 인연을 모두 이렇게 바꾸는 겁니다. 

지금까지 형제의 인연으로 살아왔다면 이제 같이 주님의 사도로 사는 것. 

지금까지 부부의 인연으로 살아왔다면 이제 같이 주님 선포자가 되는 것. 

지금까지 친구로 살아왔다면 같이 하느님께로 가는 도반이 되는 것.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가 필요한 것을 내어줄 수 있을 때까지만 유지된다.

 

영화 ‘넘버 3’(1997)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한물간 건달이었던 한석규는 위기에 처한 보스를 구한 다음 배신자를 처단하여 넘버 투로 등극합니다. 이 과정에서 행동대장인 박상면과 라이벌 구도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5년 정도가 지난 뒤 조직은 성장을 지속하고, 호텔 인수 건을 한석규가 맡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아파트 사는 검사 최민식이 자꾸 트집을 잡습니다. 점점 일이 꼬여만 가자 보스가 한석규를 대하는 것도 시들해지는 느낌입니다. 한석규는 넘버 쓰리라고 하는 놈들을 응징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스는 한석규에게 최민식 검사를 죽이면 자신의 보스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합니다. 한석규는 최민식을 인질로 잡아 산에서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한석규의 총구 앞에서 최민식이 말하는 말이 압권입니다. 

“너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둬라. 깃털 하나 뽑혔다고 몸통까지 작살나는 건 아니야. 대한민국에 검사가 1,100명이야. 매년 90명씩 생겨나고 또 수사는 계속될 거고. 어차피 너희들은 작살나가 돼 있어. 너도 깃털에 불과해. 조직은 키워줄 놈한테 절대로 피를 묻히게 하지 않아. 당장 깨져도 후회는 없다. 삼류 인생이지만 열심히 살았으니까.”

“삼류?”

이때 한석규는 조직을 배신하고 최민식을 살려줍니다. 결국 최민식은 한석규의 도움으로 조직을 일망타진합니다. 

왜 한석규는 최민식의 말에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사실 한석규는 넘버 투와 넘버 쓰리 사이에서 심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넘버 투가 되라고 아우성치고 그 요구를 따라줄 능력이 없는 자신을 보며 심하게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최민식은 자신도 삼류라고 하는데 삶에 만족합니다. 그냥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서. 한석규는 최민식에게서 참 평안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길. 그것은 바로 이류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길입니다.

깡패와 검사가 맺어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깡패는 검사가 감옥만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주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무엇을 줄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을 좇는 이들은 그것을 주는 사람과 친구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더는 줄 수 없을 때면 그곳에 머물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끊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평화를 원하는 이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성령을 주려면 내게 성령을 주시는 분과 친구가 되어야만 합니다. 받아서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 어떤 친구가 생기느냐가 결정됩니다. 진리와 은총이 아니면 자칫 모기들을 내 주위로 모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사도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이런 모습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8-19)

예수님은 사도들이 이런 모습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말씀도 전하고 병도 고쳐 주는 것입니다. 말씀은 진리이고 병을 고쳐 주는 힘은 은총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내 주위에도 좋은 친구들이 모입니다. 

성인 중에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성인들이 많습니다. 성지에 가면 이런 성인들의 유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많은 사람이 모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그분들에게서 진리와 은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산 이들의 표징입니다. 이들은 보며 우리는 세상의 허무와 결국 쫓아야 할 것은 주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또 그런 유해들을 통해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편지들을 그분들 주위에 놓고 기도합니다. 그분들은 돌아가셔서도 여전히 무언가 주기에 사람을 끄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내가 무엇을 주려고 하는지 알려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군대에서 받은 러브레터를 어떻게 읽었을까요?

 

어느 형제님이 군대에 입대해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편지였습니다. 마음에 들던 여자 친구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입대했는데, 여자 친구가 편지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해서 보낸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편지를 어떻게 읽었을까요? 
 
1) 대충 읽는다. 
 
2)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는다. 
 
3) 안 읽는다. 
 
당연히 정답은 2번입니다. 단어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읽으면서 ‘이 단어는 어떤 의미로 쓴 것일까?’라는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평소에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읽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 편지이기에 그 안에 써진 단어 하나도 소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낸 ‘러브레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꼼꼼하게 성경을 읽고 있었을까요? 대충 읽거나, 전혀 읽지 않으면서도 과연 하느님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내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이는 시대의 차이, 삶의 자리에서 오는 차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내용을 현재로 이끌어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 공부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성경 읽는 자기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12사도를 뽑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산에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을 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제자들에게 사도직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2사도의 사도직 수여는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2명을 뽑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면서 앞으로의 하느님 나라를 새 이스라엘로 상징하는 숫자가 됩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해서 사도가 된 제자들은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심사숙고해서 뽑았지만, 제대로 당신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주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다처럼 배신의 아이콘이 내 안에 새겨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련이란 꼭 방해 거리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우리의 발아래 놓으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

- C.F 블렌차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어떤 선택은 밤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는 선택이 있습니다. 기도를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기도입니다. 몇천년을 기도로 버티어 내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사람을 선택하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현실의 최전방에서 열두 사도가 예수님에 의해 탄생하십니다. 

같은 것 하나없는 열두 사도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열두 사도와 함께하시며 열두 사도를 가다듬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값진 직분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사람을 통해 전달됩니다. 멈춘 적이 없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우리모두를 살리기위한 선택, 그것은 사랑의 기도입니다. 

기도로 시작되는 삶의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살아있는 삶 살아있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의 합창이 시작되었습니다. 설명할 길이 없는 기도의 맛이며 선택의 신비입니다. 

선택은 버림받음이 아닌 모두를 위한 뿌리깊은 믿음입니다. 삶의 모순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믿음 그 구원의 시작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새날 새하루입니다. 선택과 선택을 이어주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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