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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24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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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라.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2022년 10월 24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0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페  4,32 / 5,1-8)
    그리스도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3,10-17)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2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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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음
루카 13장 10-17절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승언 안드레아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4일 (월)
오승언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4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자신을 얽어 매는 사슬

 

오늘 복음을 보면, ‘묶다’ 또는 ‘풀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들이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린 여인에게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손을 얹어서 그녀를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논쟁에서는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주는’ 상황과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 ‘묶여 있던’ 여인을 그 속박에서 ‘풀어 주는’ 상황을 비교하시면서 당신 행위가 정당한 것임을 입증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구원 행위는 무엇인가에 매여 있는 자를 풀어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허리가 굽은 채로 무려 열여덟 해의 세월을 보내야 하였던 여인은 사탄이 묶어 놓은 사슬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포로 신세였습니다. 

드디어 그 견고한 사슬을 풀어 줄 결정적인 분께서 눈앞에 나타나셨는데, 하필이면 때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규정은 어쩌면 사탄의 사슬이 쉽게 풀리지 않도록 이중으로 묶어 두는 또 다른 사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치유를 감행하시면서 두 사슬을 동시에 끊어 내시고 여인에게 완전한 해방을 선물하십니다.

안식일 법은 회당장을 비롯한 “위선자들”을 묶어 놓은 사슬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 규정에 속박당하는 생활을 자처하면서 스스로 자유를 포기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해방까지도 방해하고 맙니다. 율법에 대한 이들의 맹목적 태도는 안식일 단 하루 동안 겪을 짐승의 목마름은 배려하면서, 무려 열여덟 해 동안 겪은 여인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해 버리는 모순을 낳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자신을 얽어 매는 사슬이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사탄의 속박에서 이미 해방된 우리이지만, 어떤 맹목적인 신념과 규정으로 우리가 스스로 다시 속박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처럼 되는 것과 짐승처럼 되는 것 사이에서

 

”형제 여러분,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의 독서는 에페소 신자들이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권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는 실로 엄청난 권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감히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만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본래 그렇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주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잖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시고, 당신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신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신분을 격상시키는 너무나도 설레는 가르침이었지만 당시 교도권자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너무도 충격적인 가르침이었고 결국은 주님을 신성 모독죄로 죽임당하게 만든 가르침이었지요. 

그런데 사실 종교들의 가르침은 대개 이렇습니다.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부처가 되라는 뜻으로 성불하라고 하며, 도교에서는 신선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짐승이 되는 것과 하느님이 되는 것 사이의 존재이고, 위대한 종교들은 다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고 도전하는데 이런 초대와 도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면서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니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사랑 안에 사는 것이 당연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사랑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본받는 것은, 아담과 하와처럼 신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처럼 서로 자비롭게 대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선택한 사람은 이제 짐승처럼 욕망에 자신을 구겨 넣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얘기합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에서 받을 몫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느님처럼 되는 것과 짐승처럼 되는 것 사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어둠의 자식일 수는 없고,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사랑이 아닌 욕망의 노예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 덕분에 바자회가 잘 끝났습니다.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를, 여러분에게는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호박벌이 날라다니는 이유

 

‘호박벌’이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개체를 가지고 있는 벌입니다. 몸이 털로 뒤덮여서 다른 벌들보다 인상이 동글동글해서 귀엽지요. 그런데 다른 벌과 비교해서 날개가 작고 몸집이 큽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많은 학자가 의문을 가졌습니다. 호박벌의 몸은 비행에 적합한 구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호박벌이 나는 것은 물리 법칙에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물리 법칙에 어긋나고, 날고 있는 것도 비효율적이지만 그래도 호박벌은 계속해서 날아다닙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호박벌에게 누군가가 물리 법칙에 어긋나게 날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인간과 같은 생각을 한다면 호박벌은 날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간은 남의 말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으며, 그 말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순간,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무시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부정적인 말, 나의 발전을 반대하는 말들…. 모두 무시해야 할 말입니다. 
 
무시할 것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따라야 할 것은 무조건 따르는 삶. 이것이 현명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그마치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 펼 수 없었던 여자를 만나십니다. 이런 병을 현대의학 용어로는 '척추 교착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고 하지요. 이 증세는 보통 40세 이후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60대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 있어도 자비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포기상태였던 것이지요.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하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이 고쳐진다는 상징적인 표시로, 그래서 여자는 곧바로 하느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식일 법 위반이라며 회당장이 군중에게 말하지요. 
 
십계명 3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라는 계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거룩한 일입니다. 동물도 살리기 위해 안식일에는 물을 먹이는데, 하물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 왜 안식일 법 위반이 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이루어질 때마다 심한 반대가 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그 반대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죄인으로 만드는 말은 무시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또한 변화와 성장을 가로막는 말 역시 무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입니다. 그때 불가능해 보이는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

- 윌리엄 서머셋 모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시월의 아침 햇빛은 공평하게 꽃과 곡식 나무를 환하게 비춥니다. 지금 여기에 사랑의 실천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걸맞는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하지만 상대의 일에 대해서는 너무 가혹하고 냉혹하기만 합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할 대상자도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아무리 좋은 계율도 지혜와 연민,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좋은 덕목이 될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 지켜질 수 있는 계율이 되어야 합니다. 계율은 신앙인의 기초가 되는 정체성입니다. 올바른 생활의 길은 올바른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닌 실제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참된 사랑의 계명입니다. 말만 번드러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변명이 아닌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아픔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풀려나길 바라며 도와주는 삶이 중요합니다. 실천 그 한 가운데에서 맛보는 사랑의 기쁨이며 사랑의 참된 잔치입니다. 매듭을 푸는 멋진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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