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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2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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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2022년 10월 23일 연중 제30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0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 2,1-5)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

  • 제2독서
    (로마 10,9-18)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 오늘 복음
    (마태 28,16-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23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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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되기를 바라시니 수확할 밭에 일꾼들을 많이 보내시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성사로 힘을 얻어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복음
마태 28장 16-20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송영호 안토니오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3일 (일)
송영호 안토니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10월 23일 (일)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사랑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나누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랑이 완성된다.

 

오늘 우리는 전교 주일을 지냅니다. 교회 본연의 사명은 무엇보다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일, 곧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복음화 사명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에서 비롯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신앙의 길로 먼저 초대된 이들은 그 신앙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은총으로 얻게 된 믿음을 모든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교회가 끊임없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그런데 선교는 매우 험난한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천 년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거부하고 조롱하며 심지어 박해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숱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가 복음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현존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복음서의 시작(1,23)과 마침(28,20)에서 장엄하게 선포되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걸어가는 선교 여정의 시작에서 마침에 이르기까지 늘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하십니다.

혹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어떤 특별한 훈련을 거친 전문가들이나 하는 것쯤으로 여기면서 그들에게 선교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복음의 기쁨」, 120항).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나누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 사랑을 전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교 주일을 맞아 과감히 그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복음화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나눔을 위해 오늘 전례를 처음서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본기도의 첫 구절이 눈에 꽂히면서 뜬금없이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본기도의 첫 구절은 이러합니다. 

“하느님,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되기를 바라시니”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는가? 이 점이 반성이 되며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던 겁니다. 

아시다시피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로 파견된 예언잔데 그곳으로 가기 싫어, 도망치다 죽다가 살아난 뒤에야 니네베로 가 억지로 회개를 선포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도 요나 예언자처럼 니네베의 구원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다른 민족의 구원을 싫어하지 않아도 무관심한 사람은 아닐까요? 

싫어하는 사람은, 요나에게 니네베처럼, 다른 민족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고,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거나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챙길 사랑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교 주일을 맞아 진지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남북이 화해하고 북한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일본과 중국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일까요? 

솔직히 우리의 사랑이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니네베도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에 못 미칩니다. 

사실 나는 나도 진정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같이 아파할 정도로 행복하지 못하며 다른 이의 구원을 걱정할 정도로 구원을 사는 사람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이 마음 아프지 않으면 아직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구원이 걱정되지 않으면 아직 하느님의 구원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한다면서도 참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적어도 사랑이 자신을 채우고 넘쳐 남에게까지 흘러가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행하게도 사랑 대신 미움이 가득하여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본기도의 내용처럼 수확할 밭의 일꾼, 곧 선교사들을 보내시어 모든 이가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주십사고 기도해야겠지만 그 전에 내가 선교사로 파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구원과 사랑을 살아가게 해달라고, 세상의 복음화에 앞서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를 포함하여 선교사들이 세상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본기도를 이어서 바쳐야겠습니다. 

“수확할 밭에 일꾼들을 많이 보내시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성사로 힘을 얻어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늘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야 할까? 

 

얼마 전에 어떤 자매가 자신과 결혼하자는 어떤 형제와 결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하니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라면 나의 딸은 절대 그런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우 이창훈 씨 딸 효주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TV에 출연하여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효주는 공부하면서 계속 어딘가를 응시하였습니다. 그렇게 바라봐야 공부할 힘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 바라보는 곳에는 5만 원권 지폐 모형이 달려있었습니다. 심지어 금주머니 열쇠고리, 골드바 자석, 금전운을 부른다는 돈나무 그림도 붙어있었습니다. 아이의 꿈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은 그래서 편안할까요? 아이는 불안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물론 엄마와 분리되면 안 되는 불안증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집착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착은 다 자기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욕구는 다 ‘생존’이란 두 단어로 집결됩니다. 다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가 불안하다는 말은 부모가 자기 생존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다 자기 생존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불안하면 그 대상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용하게 됩니다. 딸의 이 불안함은 이창훈 씨의 가족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창훈 씨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머니가 계셨지만 5남매 중 유일한 아들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이창훈 씨를 보호하기 위해 학교 앞으로 이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함께 있어 주지 않을 때는 하교하다가 나쁜 일도 많이 당하곤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호해주지 못할 것, 왜 자신을 낳았는지 부모에 대한 원망도 들었습니다. 

그에게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돈과 인기였습니다.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일하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어린 신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자 인기가 떨어지고 수입도 줄었습니다. 이것이 다 아내 탓이라고 하여 혼자 우울증 걸려 방황하였습니다. 임신한 아내는 이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습니다. 매일 이혼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불안’이 해결된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감정이 자녀에게 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선교하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하시며, 또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십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사랑하고 선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는 먼저 죽음까지 이기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 나를 보호해주시니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불안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만약 쥐의 꼬리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쥐일 수도 있고 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불안해합니다. 확인한 뒤에 불안해 할 수 없습니다. 쥐면 안심하고 뱀이면 싸우든 도망치든 결정해야 합니다. 불안은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의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증을 없애기 위해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명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믿음 차원에서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만이 진정 불안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 정은표 씨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족도 재정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정은표 씨 부부는 자녀들에게 불안함을 품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 공부도 방해합니다. 하지만 지웅이는 서울대에 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구글에서 창의력이 가장 높은 부서의 특징을 조사하였습니다. 결과는 소통이나 아이큐나 학벌 등에 있지 않았고 그 부서의 ‘심리적 안정감’(Psychological safety)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아이들 공부도 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하면 외우는 기계밖에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날입니다. 먼저 가족이 복음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민족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을까요? 나 먼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실하게 믿기 위해 성령을 받는 기도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부터 복음화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능력은 욕망과 함께 온다.

 

욕망이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행동이나 마음을 말합니다. ‘~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미국의 작가 나폴레온 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욕망이 있다면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능력은 욕망과 함께 온다.” 
 
제 형님이 은퇴 후에 요즘 그림을 계속 그립니다. 그리고 그린 그림을 가족 SNS에 계속 올리십니다. 점점 더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것을 그림을 잘 모르는 저도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형님이 그린 멋진 그림을 보며 “우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에게는 그림에 관한 관심 자체가 없어서 욕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도 생기지 않습니다. 
 
제 형은 한 번도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그리고 싶다’라는 욕망을 가지면서, 여기에 본인의 능력도 추가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욕망은 능력도 함께 오도록 합니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최초로 등정했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에베레스트산을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욕망이 계속 커졌던 것입니다. 이 욕망에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최초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마태 10,5; 루카 10,1 이하). 그러나 이때는 일종의 실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하셨고,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체험을 위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신 뒤에 파견하셨습니다. 
 
이번 파견은 그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이제 결정적이고 본격적인 파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전교는 주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반대를 받아 때로는 박해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교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냅니다. ‘전교하고 싶다’라는 욕망 자체를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키워야 합니다. 그에 따른 능력도 생길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언제나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 파울로 코엘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가장 예수님다운 삶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들어오신 예수님의 삶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삶은 만남이며 삶은 생활입니다. 함께 생활하시는 예수님의 삶을 만납니다. 

전교는 만남이며 전교는 생활입니다.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복음의 기쁨을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은 봉사이며 봉사는 전교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 자제가 봉사와 나눔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삶의 현장에 가까워지는 삶이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뜨거운 마음과 따뜻한 손길 친절한 말 한마디가 전교의 핵심입니다. 생활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교입니다. 먼저 우리 앞에 있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복음의 배려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전교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배려와 존중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실천입니다. 그 실천의 중심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입니다. 생활의 실천이 복음이며 전교입니다. 새로운 실천 새로워지는 생활이 필요한 복음의 시간입니다. 복음을 우리의 삶으로 기쁘게 응답하는 배려의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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