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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24일 (금) 예수성심대축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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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4일
예수성심대축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예수 성심 대축일 -

 

 

2022년 6월 24일 (금)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몸소 당신 양 떼를 먹이시고 그들을 누워 쉬게 하시리라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구원받게 되리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24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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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성심을 통하여 저희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리며 기뻐하오니 이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은총을 언제나 가득히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5장 3-7절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예수 성심 대축일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6월 24일 (금)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예수 성심 대축일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6월 24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되찾은 양의 이야기

 

세리나 죄인과 같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가까이 하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루카 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 곧 되찾은 양(3-7절 참조), 되찾은 은전(8-10절 참조), 되찾은 아들(11-32절 참조)에 대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잃었던 당신 자녀를 다시 찾았을 때 느끼시는 하느님의 큰 기쁨을 전하십니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밤낮으로 길을 헤매며 애쓰는 목자,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는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심 안에 머물며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착한 목자,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심장마저 꿰찔리시어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예수님께서는 또한 성체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우시고 다시 살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오늘 하루, 예수 성심과 하나 되어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세상의 모든 사제가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 주님의 착한 목자로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을 보고, 배우고, 키우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 성심 상본을 보면 하트 모양의 심장이 상처를 입은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마음의 상처, 가슴의 상처, 심장의 상처를 주님께서 입으셨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게 한 것은 우리 인간의 죄라고 하고, 그렇게 상처를 입으셨음에도 우리 죄인을 용서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이라는 것이 예수 성심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흩어진 양 떼를 하느님께로 모아들이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동가식서가숙하신 분이신데 그분을 우리 인간은 십자가에 못박고 가슴에 상처를 입혔지만 그분은 그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으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허망하게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상처로 우리 상처는 낫고 구원받았다고 베드로 서간은 얘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의 상처가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해주셨다는 말이고 주님의 상처를 보고 우리 상처가 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상처로 어떻게 우리의 상처가 낫게 될까요? 

우선 주님의 상처를 보는 사람이 상처가 낫게 됩니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고 자기 상처만 보는 사람은 그 상처가 나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수백 번 우리를 위해 죽으셔도 상처가 치유될 수 없습니다. 내 상처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몰되어 있다는 것은 상처만 보고 치유를 보지 않는 것이기에 치유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의 상처를 보지 않고 이웃의 상처만 봐도 상처가 많이 치유됩니다. 그것은 나만 상처 입은 게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상처를 보게 되면 더더욱 치유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서 입은 상처를 주님으로부터 치유받는 것이고, 주님의 큰 사랑 까닭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엄마에게서도 비슷하게 상처를 치유받지 않습니까? 밖에서 상처받고 와서는 그 아픔을 엄마에게 다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상처 주는 짓에도 상처받지 않고 다 받아주고 치유해주는데 그것은 엄마의 그 큰 사랑이 당신이 받는 상처는 초월하고, 곧 당신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의 상처를 껴안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나의 상처가 이해받고 위로받는 것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나의 상처에 호하고 따듯한 입김을 불어주고 약을 발라준다고 그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외부의 치유가 아니라 내 안에 치유의 힘이 생겨야 합니다. 면역력이 약해 병균의 침입을 받고 상처를 받을 때 면역력을 키워야 하듯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 엄마의 큰 사랑 보고 그 사랑을 배우고 키워야 합니다. 

사랑이 상처를 초월하게 하는 힘이고 치유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큰 사랑을 기리는 오늘 우리는 상처받아도 상처받지 않는 예수님의 그 큰 사랑에서 우리 상처를 위로받을 뿐 아니라 그 큰 사랑을 보고, 배우고, 키워야겠습니다. 

다음 주일까지 어쩌면 월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다음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성심을 본받으면 성화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방치합니다. 도대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맹수가 우글거리는 광야에 방치하는 것이 왜 사랑일까요? 

우리는 가끔 버릇없는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를 볼 때가 있습니다. 왜 남의 애 기죽이냐고 되레 화를 냅니다. 그것이 사랑일까요?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자신을 무는 개까지도 감싸는 어머니를 나무랍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개가 다른 사람을 물게 될 것을 용인하는 범법자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정말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물리면서까지도 잘해주는 주인일까요, 아니면 강 훈련사일까요? 

강 훈련사는 개를 물속으로 끌고 갑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일단 살아야 하는 게 우선이 되어서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개에게 입마개도 하고 조금씩 개를 주인에게 의지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광야로 끌로 나온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아의 압제에서 구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당신께, 혹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강 훈련사가 물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척박한 곳으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깨 위에 그대로 있으려 하지 않고 본인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방치하신 것도 이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어깨에서 무슨 일에나 자신을 죽이고 순종할 수 있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성심입니다. 사랑의 목적입니다. 사제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나라 카리사마 대표 배우인 최민식 씨를 길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캐나다에 살다 와서 최민수 씨와 혼인한 강주은 씨입니다. 강주은 씨는 빚이 지금 시세로 30~40억 있는 최민수 씨와 결혼하여 힘겨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했던 최민수 씨에게 최대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계속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참았습니다. 한국말도 잘하지 못할 때라 만화를 그려가면서 소통해야 했습니다. 사고를 칠 때도 참아내며 그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강주은 씨는 지금 연매출 600억 상당의 홈쇼핑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재정적으로 안정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반면 최민수 씨는 월 40만 원의 용돈을 타서 씁니다. 기름값 하면 남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주은 씨는 최민수 씨가 돈 개념이 없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광야를 선사합니다. 그래도 최민수 씨는 강주은 씨에게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사람의 이기심을 없애려면 환경의 결핍을 주어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자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 기를 살려주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습니다. 구원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선물하십니다. 당신의 결핍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궁핍과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물에 빠진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장 자기가 사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못된 아이를 감싸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가 나에게 앙심을 품더라도 순종을 가르치는 게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어깨에서 꼼짝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기 전에 주님께 의지합시다. 그냥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아멘!” 하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래야 결핍 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종만이 살길입니다.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순종해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좋은 일 3가지 적기.

 

인간은 부정적 경험을 많이 기억할까요? 아니면 긍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할까요? 
 
듀크 대학의 브라이언 섹스톤 교수는 이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부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한 상태이면 긍정적이고 평범한 일을 인식하는 감각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피곤할 때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잠을 자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잊게 됩니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Three Good Things’라는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일종의 행복 기록으로 그날의 멋진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적는 것입니다. 매일 세 가지씩을 기록하면 평소 무심코 지나쳤을 작은 기쁨과 소소한 기쁨을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좋은 일 3가지. 적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찰을 힘들어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습관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크고 대단한 곳에서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주님을 찾지 못한다면,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우리도 아닌 광야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그냥 방치해놓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서 방황하고 있을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만을 찾으면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늘 함께합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기억보다는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와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제로 지내는 예수 성심 대축일은 주님의 사랑 가득한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사랑받음을 강력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은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실천하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 주님 안에서 함께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장애물이란 목표지점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목표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면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

- 헨리 포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루카 15,6)

 

마음의 주소를 찾는 시간이다. 예수 성심께 마음의 길을 다시 묻는다. 우리 삶의 중심에는 우리를 살게하시는 예수 성심이 계신다. 예수 성심은 끊임없이 사랑과 용서를 우리들에게 건네시며 베푸신다. 지극한 사랑은 지극한 정성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이시다. 마음은 열어야 마음이다.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서로를 헤아리는 진실된 마음이다. 깨어있는 마음은 잃어버린 양을 몸소 찾아 떠나고 위하는 열린 마음이다. 열려있기에 낮아지고 낮아지기에 서로를 아낄 수 있다. 

예수 성심을 닮아가는 것이 참된 우리들 신앙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우리의 본모습은 우리들 참된 마음에 있다. 우리들 마음을 기다리시는 예수 성심이시다. 예수 성심께 지쳐있는 우리 마음을 봉헌한다. 

진실한 기도 참된 실천 이 모든 것은 예수 성심의 간절하신 마음이다. 간절하신 마음은 회개로 지극하신 마음은 독단과 편견 합리화를 겸손된 열림으로 거룩하신 마음은 새마음으로 바꾸어주신다. 

끊어진 마음의 길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시는 예수 성심이 우리를 아름답게 정화시켜 주신다. 예수 성심에서 길을 찾고 마음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에서 마음을 회복한다. 날마다 열리고 나누는 마음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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