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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2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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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2022년 6월 23일 (목)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그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열린 할례식에서 아기 아버지 즈카르야가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 부르겠다고 합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23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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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복된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영신의 기쁨을 주시고 모든 신자의 마음을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장 57-66절, 80절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강론

 

 

2022년 6월 23일 (목)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명동성당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022년 6월 23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부르시고 선택하셨음을 전합니다. 그를 통해서 온 백성을 당신에게 모으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알리시고 모든 민족들에게 빛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빛’이시며 ‘계시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환히 드러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가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다윗과 같은, 아니 다윗보다 더 위대한 그들의 주님, 메시아가 나오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바로 온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에 앞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자신을 낮추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전합니다. 그의 이름 ‘요한’은 주님의 천사가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미리 알려 준 것인데,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통하여 많은 이를 하느님께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이를 믿지 않았고, 그 결과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이렇게 즈카르야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시 말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 뒤 주님의 손길에 따라 성장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가 되어 예수님의 길을 미리 닦아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고,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이끕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잘 아시며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존재로 하느님을 가리키는 존재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마침 어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에 대해 나눴습니다. 오늘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축일에 앞서 예언자에 대해 나눔을 한 셈입니다. 

어제 저는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파견된 사람이라는 취지로 나눔을 했습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예언자인양 하는 자이고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지도 않는 자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참 예언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그분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합니다. 사람들이 열망하는 그분이 결코 아니라고 강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이 거짓 예언자였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여길 때 침묵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은근히 그것을 즐겼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분 없는 자기는 없다는 뜻으로 자기는 그분이 아니라고 강하게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모든 인간이 하느님 없는 자기가 없지만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하느님 없는 자기는 없다고 해야 합니다. 

나는 나가 아닙니다. 하느님 없이 있는 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독립적인 나가 아니라 관계적인 나라는 얘기이고,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내가 있는 존재라는 얘기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의 나까지 하느님 없이는 있을 수 없는 나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람은 그분과의 관계에서만 자신을 얘기하고, 말뿐 아니라 자기의 존재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세례를 주고 있는 요르단강에 주님께서 나타나 지나가시자 요한은 주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바로 그분이시니 그분을 따르라고 하며 제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인계합니다. 

자기만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제자들도 이제 자기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인계하는 겁니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존재,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리키는 존재,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마침내 인계까지 하는 존재, 우리도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함을 세례자 요한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이름을 이어준 분의 이름을 들어 높일 때 성장한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하느님은 즈카르야가 이름을 지어주도록 허락하시지 않고 당신이 주신 이름을 받도록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세례자 요한을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쓰시기 위한 계획이 드러납니다. 

저는 이름을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사실 놀림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제 이름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저를 당신과 같게 여기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상대를 나와 동일시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려견이 죽었을 때의 고통은 자녀가 죽었을 때의 고통에 비견될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반려견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어주고 불러주던 이름이 없는 동물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그 동물을 나처럼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름을 지어주시며 당신처럼 대해주시는 부모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수준처럼 성장하여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손흥민 선수나 김연아 선수를 봅시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에게 이름을 준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이름을 준 분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피땀 흘렸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모만큼 성장합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이는 부모처럼 성장할 수 없고 그래서 사회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이름만이 아니라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세례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즈카르야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와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 인입니다. 세례명을 가진 우리도 이에 감사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도록” 살아갑니다. 내가 주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리며 사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 나라에 얼마나 합당하게 성장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왜 인간처럼 될 수 없을까요? 어느 정도는 그 이름에 맞게 성장하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이름을 지어준 대상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를 발음하지 않으려고 다른 모음을 붙여두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정도로 발음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절대 부르지 않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러면 뭐 하러 당신 이름을 알려주셨을까요? 우리가 합당하게 부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의 이름을 불러주는 감동적인 동영상이 여럿 있습니다. 처음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부모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할 때는 다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를 위해 당신들 이름 없이 그저 엄마와 아빠로 살아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자의 이름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자녀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 엄마로 살아온 김경희님의 인생은 힘들지 않았나요?”

대부분 부모님은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부모로 살 수 있게 해 준 자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엄마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부모들은 한결 같이 대답합니다. 

“내 인생의 전부!”

이름을 준다는 말은 내 전부를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부모의 이름을 불러줄 때 나도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고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보니 어떠셨나요?”

자녀들은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그냥 엄마는 엄마인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거 같아요.”

이제 나도 성장했다면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줄 수도 있어야겠습니다. 그분들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당신 이름을 잃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대등하게 여겨주신다면 나도 그분 뜻에 따라 성장했음을 그분 이름을 부르며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아, 이 아이가 이만큼 컸구나!’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장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분명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찬양!’이 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 됩니다. 

저도 신자들이 “삼용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기분이 나빠서 “앞으로 당신을 신부님이라 부르지 않겠소. 당신을 전삼용 씨라고 부르겠소”라고 하면 그것은 사제로서의 저를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모처럼 성장한 것은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런 의미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히려 그분께 찬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 감사와 사랑을 담아 야훼라고 불러봅시다. 그분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버킷 리스트가 있습니까?

 

버킷 리스트가 있습니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말입니다. 이 버킷 리스트가 있어야 희망을 품고 지금을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인가? 버킷 리스트는 내게 사치스러운 말이야. 나는 버킷 리스트가 없어. 이유는 간단하지. 하고 싶다고 하면 바로 실천하니까. 남겨두지 않으니 리스트에 적을 수가 없지.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그걸 지금 당장 하지 않고 종이에만 적고 있나? 먹고 싶은 건 매일 당장 어떻게든 잘 먹고 살면서 말이지.”(김종원, ‘마지막 질문’ 중에서) 
 
버킷 리스트가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을 전혀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희망은 실천을 당장 해야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한 희망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막연하게 하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희망이 의미 있을까요? 희망의 구체화를 위해 지금 더 주님의 뜻을 잘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봐야 합니다. 희망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실천해야 희망이 구체화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는 희망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얼마나 아기 갖기를 희망했겠습니까?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즈카르야는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를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희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고 글 쓰는 판에 쓰는 순간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희망을 안고 태어난 세례자 요한도 철저하게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면서 철저하게 희망의 주님만을 바라보며 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희망은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구체화 됩니다. 막연한 희망이 아닌,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면서 보이는 희망이 될 수 있으며 그 희망 안에서 살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도전에 성공하는 비결은 단 하나,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 디어도어 로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루카 1, 63)

 

가장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탄생한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가까이와 멀리서 바라보는 탄생은 사뭇 다르다. 사람을 통하여 길을 여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확실한 예수님을 먼저 보여주시는 세례자 요한의 뜨거운 삶의 시작이다. 

삶이란 만남의 숨가뿐 여정이다. 탄생도 함께 나누는 기도이다. 나눔으로 감추어진 신비는 생활로 드러난다. 하느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묻는 가슴의 탄생이다. 가슴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사람이 만들어진다. 

희망의 사람이 만들어지는 사람의 탄생이다. 사람의 탄생과 하느님의 탄생이 사랑 안에서 결국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이 감사라는 것을 알게된다.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요한의 탄생이다. 하느님은 계획하시고 우리는 실행한다. 

사람에게 의미있는 시간은 하느님을 향하는 시간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의 탄생이다. 탄생이 가치의 여정을 걸어간다. 이것밖에는 길이 없다. 삶을 선물로 받고 가치를 또 넘치는 은총으로 받았다.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의 오늘이다. 간절히 바라는 희망이 우리에게 오신 참희망을 만나는 희망의 뜨거운 신비이다. 신비의 여정이 탄생이며 봉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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