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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2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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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

 

 

2022년 6월 21일 (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유다 임금에게 주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라시며,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21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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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천상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알로이시오가 놀라운 정결과 참회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하셨으니 그의 공덕과 전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그 정결과 참회의 정신을 충실히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7장 6절, 12-14절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김용찬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6월 21일 (화)
김용찬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6월 21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여기서 ‘거룩한 것’은 하느님께 바쳐진 제물을 떠올리게 하며, 이 구절을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 견주어 보면 ‘거룩한 것’과 ‘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이방인을 ‘개’에 빗대기도 하였지만, 문맥상 여기서 ‘개와 돼지’는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의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구절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겪었던 모진 박해와 시련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율법과 예언서, 다시 말해서 구약 성경의 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마태 22,34-40 참조)과 더불어 예수님 가르침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끝자락에 이처럼 ‘황금률’을 당신 가르침의 결론으로 강조하십니다.

한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문이 바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문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늘 나라의 가르침을 실현하고 예수님을 따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왕 살바에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흔히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도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 

- 네가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도 해 주어라.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왜 네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 생각에 전 세계에서 제일 개인주의적인 나라가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어디를 가면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를 유치원 아이들마냥 졸졸 따라가기에 매우 집단적인 공동체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면의 이면에 너와 나의 경계를 분명히 두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들에게는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아주 분명하게 있고, 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예의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남을 자기 집에 초대하지 않고 자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단체로 움직이고 깃발을 따라 일률적으로 따라가는 것도 어쩌면 남에게 피해주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확치도 않은 일본 사람 얘기를 제가 왜 했냐 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가 그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간에는 아주 예의 바르고 절대 피해를 주지 않지만 서로 매우 경계하고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국가적으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나라가 또한 일본입니다. 

어쨌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으로는 사랑을 이루거나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랑이요, 피해도 사랑도 주지 않는, 어쩌면 더 사랑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남을 해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십계명을 봐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외에는 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왕 살바에는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일생 걱정으로 일관하는 인생,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고, 비록 보잘것없더라도 목표만은 사랑에 두고 살고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내가 해주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다 아는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 해주려다가 호구가 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애덤 그랜트는 사람을 ‘기버-테이커-매처’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습니다. 기버는 내어주는 사람이고 테이커는 빼앗는 사람이며 매처는 받으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을 보았더니 가장 높은 위치에 기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위치에도 기버가 있었습니다. 

왜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호구가 되는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에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도 아이에게 폭력까지 당하는 이지현 씨가 나왔습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이의 호구가 됩니다. 이것 하나만 조심하면 됩니다. 

개는 훌륭하다 10편에 토르라는 강아지에게 온 가족이 당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는 개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토르라는 강아지는 아무 때는 끼어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애꿎은 것을 물기는 하지만 화를 잘 냅니다. 가족은 평화를 위해 토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마음씨 좋은 가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은 가족에게도 토르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토르는 가족들이 잘해주는 게 자신보다 서열이 낮아서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잘해주는 것이 오히려 토르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토르가 가족을 ‘몰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괜히 끼어들어서 마음에 안 들면 으르렁대고 무언가를 주어도 왜 미리 잘하지 않았느냐고 엄포를 놓습니다. 생존본능 중의 하나인 교만을 가족들이 키워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베풂은 호구가 되기 딱 맞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래서 먼저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좋은 것을 주는데, 그것들이 그 좋은 것을 받고 오히려 나를 밟고 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면서 호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면서도 호구가 되기 있는지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내 감정을 살피면 됩니다. 

토르가 아버지만을 특별히 공격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두려움의 냄새’를 맡기 때문입니다. 생존 욕구가 높은 개들은 두려움의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를 이용해야 자기가 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가 두려워서 잘해준다면 그 잘해주는 것은 다 상대를 더 교만하게 만들고 나는 호구가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몰이하며 최강자임을 자처하려는 토르를 강 훈련사는 되려 몰아붙입니다. 그 와중에 개에게 물려 피까지 흘립니다. 하지만 순종할 때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다시는 개에게 지나친 관심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은 절대 나를 두렵게 만드는 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 사람이 두려워질까요? 내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상대에게서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내 부족한 것을 충족하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토르에게 저렇게 대하는 가족들도 분명 토르의 귀여움을 원하고 있습니다. 화내지 않을 때 가끔 부려주는 애교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언가 얻으려 하는 것을 아는 개는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두렵게 만들고 지배하려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베풀 때는 상대에게 원하는 게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잘해주면서도 가스라이팅 당하기에 십상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두려워집니다. 

유튜브에 보면 ‘EBS 부모’에서 방영되었던 ‘불안한 엄마, 무법자가 된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5살 소라는 부모의 지나친 사랑에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는 생떼 부리면 다 됩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그런 마음을 부모가 다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 눈에는 아이가 절제 없이 자라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기가 죽어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기죽는 아이가 아닙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자신의 엄마에게 칭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단만 맞다 보니까 자기는 자녀를 키울 때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칭찬해주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아이로 자라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미안해서, 그래서 두려워서 무언가를 해 줄 때 나도 망치고 상대도 망칩니다. 두려워서 무언가를 줄 때는 호구가 됩니다. 결국 상대에게 지배당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하셨기에 당연히 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 아이는 그 마음을 이용하게 됩니다. 미안함도 두려움입니다. 

그냥 지금 해 주어야 하는 일을 하십시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목자입니다. 목자의 양은 그 좁은 문 뒤에 계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양 떼를 이용해서도 안 되고 그래서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차피 자녀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 것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망가져도 주님 것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냥 맡겨졌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안한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랑, 그 좁은 문 뒤에 내가 데리고 가는 사랑해야 할 대상의 주인이 계십니다. 다만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 하나가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평생 구두 수선을 해왔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고 허름한 구둣방을 운영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지요.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니, 너의 구둣방을 오늘 방문하겠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니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구둣방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청소했고, 구둣방에서 드실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도 준비했습니다. 또 구둣방이 추워서 따뜻한 담요로 예수님 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개꿈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 생생한 꿈이었기에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아주 허름한 옷차림의 거지가 들어왔습니다. 너무 춥다고 하면서 이불이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담요를 주었습니다. 잠시 뒤에 한 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음식이 좀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너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청소부가 와서는 너무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음료를 주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냐면서 따졌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의 구둣방에 세 번이나 갔었다. 그리고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이웃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내게 해 주는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사실, 이와 비슷한 구절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이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서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이 황금률을 새롭게 표현하십니다. 
 
첫째, 보답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말고 솔선하여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교훈을 성경 전체의 정신을 종합한 말씀으로 제시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결국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경력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감동하게 만들 수는 없어. 하지만 삶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

- 김성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 7, 13)

 

닫힌 문이 아니라 열려있는 문이다. 단지 들어가는 문이 좁을 뿐이다. 좁은 문의 기준또한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여전히 문(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은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좁은 문은 넓은 문으로 이어진다. 

좁은 문의 시작은 낮아지고 작아지는 여정의 시작이다. 낮아지고 작아지면 다투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 좁은 문으로 하느님과 우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좁은 문은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이다. 좁은 문을 체험한 사람이 모든 문에 감사할 수 있다. 

좁은 문을 받아들인 사람이 넓은 문을 받아들일 수 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은 하느님 안에서 결국 하나이다. 좁은 문의 십자가와 넓은 문의 부활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좁은 문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사람만이 새로운 변화를 체험한다. 

내려놓고 떠나보내는 좁은 문이 좋은 문이다. 좋은 문은 열려있다. 관계의 중심에는 우리를 제대로 보게하는 좁은 문이 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내려놓게 하는 좁은 문의 소통이다. 내려놓아야 구원이며 작아져야 자유롭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자신을 반성하며 기도하는 시간이다. 좁은 문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걸어가는 모든 여정이 구원을 향한 여정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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