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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19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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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22년 6월 19일 (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빵을 먹고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시어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19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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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이 놀라운 성찬의 성사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성체 성혈의 거룩한 신비를 공경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9장 11ㄴ-17절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성체 성혈 대축일
안승태 요셉 신부 강론

 

 

2022년 6월 19일 (일)
안승태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성체 성혈 대축일

 

 

2022년 6월 19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그리스도의 또 다른 빵이 됩시다.

 

제1독서의 멜키체덱은 성경에서 언급된 최초의 제사장입니다.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던 그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멜키체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여겨지며,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시편 110[109],4)라는 메시아적 신탁은 마침내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실현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의 몸과 피를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대사제이시며, 새 계약의 중개자가 되십니다.

제2독서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성찬 제정문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몸소 성체성사를 세우신 내용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기억’(ἀνάμνησιζς, 아남네시스)이라는 말은 이천 년 전의 사건을 그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사제를 통하여 봉헌되는 미사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거행된 완전하고도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성체 거양 다음에 “신앙의 신비여!”라는 사제의 선창과 함께 바치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현재, 예수님의 죽음을 전하는 과거,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미래, 곧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 공존하며 천상 잔치의 영원한 기쁨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앞서 헤로데는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하며 예수님에 관해서 질문하였는데, 우리는 오늘 복음을 읽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참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복음의 내용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동작들, 다시 말해서 빵을 ‘들고’, ‘축복하시며’, ‘떼어’, ‘나누어 주셨다’라는 네 동사가 예수님의 성찬 제정문과 엠마오 발현 이야기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작의 연속성’을 통해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성찬례를 제정하시고,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식탁에 앉아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분께서 바로 같은 예수님이심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사제를 통해서 거행되는 미사 안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요한 6,51 참조)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이 놀라운 신비로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또한 주님과 더욱 깊이 일치하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생명의 주님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빵’이 되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최후 만찬상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만찬상에 대해 요한 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경우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또는 죽음의 그 순간에도 사랑했다는 뜻인데 주님도 그러셨다는 뜻일까요? 

제 생각에 그런 뜻도 있지만, 아마, 아니, 틀림없이 그 이상일 것입니다.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하신 것은 물론 그 후에도 사랑하셨고, 그래서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가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셨고, 더 나아가서 세상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영원히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당연히 주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것을 포함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주셨음을 포함하고 다 주시고 나서 더 주실 것이 없으니 당신 자신마저 주신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의로운 인간이 죽으면서 가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의 몸까지 그러니까 전신 기증까지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당신 생명을 바친 것과 당신 몸을 주신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 인간이 당신 몸을 먹도록 주신 것인데 그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체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 유효하려면 주님 말씀대로 그것을 기념하며 주님의 몸과 피를 마셔야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주시는 것이 주님 몫이라면 받는 것은 우리 몫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아무리 영약이라 하더라도 먹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효하고, 먹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 몸과 피를 먹으라고 주실 때 우리는 받아 먹어야 하고, 그것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알고 기념하며 받아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모르고 성체를 받아 먹는 사람에게는 성체가 쥐나 개에게 성체가 아니듯 성체가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저는 오늘 축일의 부속가를 노래할 때마다 웃음이 나곤 하는데 바로 다음 구절 때문입니다. 

"천사의 빵 길손 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마라." 

천사의 빵이고 자녀들의 참된 음식을 개에게 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은 진짜 쥐나 개에게 주지 말라는 말일 뿐 아니라 개 같은 사람에게도 주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개 같은 사람입니다. 

정말, 주님의 이 사랑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개입니다. 이 사랑을 완전히 망각하고 기억하지 않는 사람도 개입니다. 기념하지 않는 사람도 결혼 기념일을 기념하지 않는 사람처럼 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양식은 공동체를 만들고 음식은 외로움을 만든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이 살과 피는 탈출기의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모세처럼 광야에서 헤매는 백성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십니다. 이 빵을 먹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체성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밝혀집니다. 먹는 것은 이것과 직결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102회에 9년째 구토하는 금쪽이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금쪽이는 14세 외동아들입니다. 머리가 좋은 아이였지만 구토증세를 달고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울렁거리고 메스껍고 복통이 나며 이내 구역질을 합니다. 응급실에 가서 링겔을 맞아도 계속 구토가 나옵니다. 이 증상이 9년째 지속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금쪽이는 건강문제로 등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쪽이는 초등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중학교 복학은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건강과 학업이 동시에 걱정됩니다. 금쪽이는 제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사는 게 지옥 같다고 합니다. 

금쪽이의 증상은 6살 때부터 장염을 앓은 후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병원을 전전하며 괜찮아지는가 싶었는데 11살쯤 다시 증상이 심해져 시골 학교로 전학을 하였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고 8번이나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금쪽이는 대인관계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말을 할 때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상대가 말하는 단어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가 구토를 하는 이유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빠가 글씨 연습하자며 앉혔을 때 숨이 거칠어지고 트림이 나왔고 구토 전조 증상까지 보였습니다. 금쪽이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강요에 학교가 싫어졌습니다. 남들과 비교되는 게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오은영 박사는 ‘공부 멈춤 선언’을 하라고 부모에게 말합니다. 일단 아이가 살아야 하니 그렇습니다. 부모가 주는 ‘밥’ 안에는 부모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부모는 밥을 주며 자기 뜻을 아이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이 버거울 때는 부모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뜻이 부담스러워 뜻을 거부하니까 몸이 음식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은 몸과 직결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은 어떤 뜻이 들어있을까요? 공부를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라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말합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루카 9,12)

황량한 곳은 말 그대로 하면 사막처럼 텅 빈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텅 빈 곳을 당신 성체와 성혈로 가득 찬 곳으로 변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하셨을까요?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4-17)

사막도 배불리 먹을 것이 있고 그 음식을 함께 먹을 공동체가 있다면 더는 황량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바뀝니다. 이를 위해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의 양식을 먹는 자녀들은 서로 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향으로 양식을 내어줍니다. 한 부모의 양식을 나누어 먹는 것 때문에 형제들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이 잘못되었을 경우는 위 금쪽이처럼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사회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씨 가족의 지웅이는 동생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동생을 잘 보살핍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그러기를 바라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모의 음식을 거부한다면 동생과의 사이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부모가 주는 양식 안에는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분명 부모가 주는 음식은 사회성과 직결됩니다. 어쩌면 그 사회성이 양식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금쪽이 24회에도 식음을 전폐한 아이가 나옵니다. 음식을 먹으려고는 하지만 삼킬 수가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목에 꽉 찬 것 같다고 하며 음식을 넘기지 못합니다. 이 금쪽이도 수액으로 연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아보면 됩니다. 언제부터 그랬냐면 엄마가 직장을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엄마가 직장을 나간다고 다 아이들이 식음을 전폐할까요? 엄마가 일을 나가는 것이 아이에게 그만큼 커다란 충격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자 금쪽이는 사실 남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아이가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로부터 양식을 충분히 먹지 못하면 결국엔 동생과의 관계도 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고, 또 동생과도 원만해지려면 아이는 음식이 아닌 양식을 더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토하며 양식을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식은 부모의 사랑이고 부모의 사랑은 곧 형제간의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성체를 영하며 성당에서 형제들과의 친교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부모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형제간의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절로 한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 형제간의 친교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미사 할 때 형제간의 친교로 이어지지 않는 성체는 진정한 양식이 아니고 이제 음식일 뿐입니다. 음식을 먹기 때문에 친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미사만 하고 집에 돌아가고 친교 공동체, 봉사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성체성사를 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서로 사랑하는 친교의 무리가 형성되지 않는 성체성사는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냉담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냉담은 성체를 영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 성체를 영하면서도 효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이 정도는 되지 않더라도 하느님 자녀들끼리 서로 친교를 맺는 형제 공동체는 만들어져야 합니다. 양식은 곧 친교 공동체를 지향함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보면 아직도 심장이 뛰어?

 

미국 코넬 대학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인간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즉,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가는지를 본 것입니다. 결론은 길어봐야 30개월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꼭 두근거리는 감정을 가져야만 사랑이 있는 것일까요? 
 
어느 영화에서 “나를 보면 아직도 심장이 뛰어?”라고 묻는 부인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연애 4년에 결혼 3년이야. 아직도 심장이 뛰면 그건 심장병 같은데?” 
 
사랑은 처음에 분명히 떨리고 설렙니다. 그 단계를 거치면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지만, 늘 숨 쉬고 있어서 익숙해지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주님과의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처음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마냥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과의 사랑 관계가 익숙해집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합니다. 예전의 기쁨을 또 설렘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사랑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만약 설렘이 없어졌다면 지금 익숙해지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 주님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일회적 사건으로 당신 사랑을 끝내지 않고, 성체와 성혈을 주심으로 인해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계속되는 사랑입니다. 
 
미사 때마다 이루어지는 그 사랑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 주님을 모실 때 느꼈던 설렘과 기쁨도 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공기와 같이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꼭 필요한 우리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영적 양식은 이렇게 차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은 계속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셨던 사랑을 나의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기만 하는 사랑을 넘어서 주는 사랑이 되어야,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잘 따르는 것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모든 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걸 보진 못한다.

- 공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루카 9, 17)

 

우리 삶의 모든 희노애락과 함께하는 삶의 미사성제이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대축일이다. 사람과 성사(聖事)는 일상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변화는 참된 실천이다. 

빵과 포도주의 변화는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난다. 실천과 투신 구원은 생명의 진정한 가치이다. 생명으로 오신 하느님께서 생명을 살리신다. 보이지 않던 하느님께서 성체와 성혈로 우리에게 오신다. 우

리의 삶이란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자리이다. 사랑의 빵 사랑의 포도주를 먹어야 사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을 통하여 모든 것은 사랑이 된다. 빵과 포도주의 소명이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소명이다. 

모두를 배불리 먹이시는 하느님께서는 행동하시는 변화이시다. 참으로 소중한 하느님 생명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성체와 성혈은 감사이며 실천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매일매일 빵과 포도주가 되어 오시는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다. 

모두를 살리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생명으로 생명을 구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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