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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15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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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

 

 

2022년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영의 두 몫을 청해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15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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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께 바라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시니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6장 1-6절, 16-18절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양종석 베다 신부 강론

 

 

2022년 6월 15일 (수)
양종석 베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022년 6월 15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오늘 행한 작은 노력과 실천들은 어떠한 지향이었나요?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조건으로 자선, 기도, 단식이라는 세 가지 종교적 신심 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자선, 기도, 단식은 하느님과 형제들 그리고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날 수 있는 은총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선, 기도, 단식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행할 때에 제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올바른 자세를 깨우쳐 주십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은 먼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는 이들을 ‘위선자’에 빗대며 경고하십니다. 

또한 그들은 받을 상을 현세에서 이미 다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남몰래 자선을 베풀고, 골방에 홀로 숨어 아버지께 기도하며, 단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행하는 이들은 장차 하느님 아버지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자선, 기도, 단식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 있었던 작은 노력과 실천들을 어떠한 지향으로 행하였는지 곰곰이 성찰해 봅시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세상의 영예와 존경과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오직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고자 하였는지, 그래서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영원한 선물에 마음을 두었는지. 우리 삶의 방향이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영예를 향할 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점점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여 하늘 나라의 상을 받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짝사랑이 좋고 짝선행이 좋다.

 

저는 짝사랑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짝사랑이란 상대방도 모르게 하는 사랑이고, 그래서 보답을 받거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요, 그래서 누가 알아주건 말건 하는 사랑이며 자신이 사랑으로 가득차고 넘쳐서 하는 사랑이요, 남이 아니라 자기를 만족케 하기에 하는 사랑입니다. 

저는 이런 사랑을 못하지만 받기는 많이 합니다. 자신을 밝히지 않고 뭔가 제게 좋다고 생각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내는 것인데 이런 짝사랑은 앞에서 얘기한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짝사랑보다 더 높은 사랑입니다.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선행도 짝선행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짝선행은 말이 선행이지 실은 사랑이며 사랑 중에서도 상(上)사랑 곧 높은 사랑입니다. 이런 선행을 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사람은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선행을 하기 이전에 선과 사랑으로 이미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선행을 한 다음에는 오늘 주님 말씀대로 하느님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안에 선과 사랑이 충만하지 않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사람은, 그래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는 짝선행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은, 그리고 하느님바라기가 아니라 사람바라기인 사람은 그래서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개에게 애정을 구걸하면 개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선행이나 단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요? 

‘개는 훌륭하다’에서 모든 가족을 다 물어 재끼는 데도 개를 너무나 불쌍하게 여기는 한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강 훈련사의 말은 이렇습니다.

“개에게 많이 물리는 보호자의 특징이 뭐냐면 자책이 많아요. 누가 물려도 개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고 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개에게 지배당하게 돼요.”

강 훈련사는 온 가족을 다 물고 다니는 개를 정신 나간 개라고 하지만, 엄마는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워합니다. 강 훈련사는 말합니다. 

“뭐가 죄인 줄 알아요? 사랑만 한 게 죄인 거예요.”

사랑만 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개에게 영광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물리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대상은 내가 섬기는 대상이고 그러면 그 대상에게 지배당합니다. 그러면 그 대상처럼 됩니다. 

어머니는 강 훈련사가 개를 길들이려고 하자 매우 불쌍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강 훈련사는 주인이 안쓰러워할수록 봄이는 더 엇나간다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강 훈련사가 개를 길들일 때 눈물까지 흘립니다. 이는 개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개의 수준으로 내려가려는 행위입니다. 나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그 개에게 물리는 자기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에게 영광을 구걸해서는 안 됩니다. 개는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대소변도 싸고 혀를 깨물어 피를 흘립니다. 강 훈련사는 개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를 교육합니다. 개에게 영광을 구하지 말고 가족에게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개가 피를 흘리더라도 자기 가족을 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강 훈련사처럼 개를 길들이려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개에게 영광을 구하는 어머니일까요? 개를 길들이려면 어느 정도는 개에게 미움과 분노를 감수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게도 해야 하고 똥을 싸게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에게나 자녀들에게 피해를 주는 엄마가 됩니다. 

이 어머니는 왜 개의 감정에 그렇게 집착할까요? 아마 어렸을 때 자신이 이 개처럼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어렸을 때 받지 못한 사랑을 대신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진짜 가족들을 물리게 만드는데도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개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무엇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있었을까요? 바로 짐승입니다. 사람이 동물을 보면 길들이려고 하지만, 같은 동물은 동물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동물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따라서 동물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애벌레에서 나비로 새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나비가 애벌레에게 영광을 구해야 할까요? 그러면 아직 애벌레란 뜻입니다. 개에게 자란 옥사나 말라야에게 잘 보이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도 그런 수준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옥사나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안타깝습니다. 사람인데 짐승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길들이려 노력합니다. 길들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영광을 올리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을 왕직이라 합니다. 

위와 비슷한 라오라는 개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강 훈련사는 훈련하다 이빨이 부러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개 앞에서 우리가 인간임을 잊을 때 개에게 잘 보이려 하고 그러면 진짜 개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을 끌어올려 주는 사람이지, 개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라오도 이름을 듣고 주인에게 반응하지 않는 개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개입니다. 주인에게 영광을 올릴 줄 모르는 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개에게 애정을 구걸합니다. 힘으로 하다 안 되니까 불쌍한 척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필요하고 나에게 순종하게 될 때까지 훈련을 멈추면 안 됩니다. 이미 그 과정을 거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된 이들은 이 십자가의 길이 꼭 필요한 줄 압니다. 그래서 상대를 위해서도 아픔을 줄 줄 압니다. 

강 훈련사는 좁은 우리에 개를 가둬놓고 함께 머뭅니다. 그러며 말합니다. 

“넌 지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거야. 제일 싫은 사람하고!”

거의 학대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 안의 공격성을 꺾어놓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개의 수준으로 끌어내림이 아니라 개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줄 아는 사람만이 개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수준이 되었다면 인간이라고 믿는 이들을 이렇게 대하고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영광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강 훈련사는 주인과 함께 작은 풀장에서 개를 빠뜨리고 주인이 아니면 자신을 구해줄 대상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야 주인에게 순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오는 벽이 아니라 보호자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호자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과 함께 살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해서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합시다. 하느님이 되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미 하느님이 된 사람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으면 사람들이 영광을 구해야 할 대상이 아닌 본성을 끌어올려야 할 대상으로 보입니다. 

영광을 받으려면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애벌레를 나비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는 나비밖에 없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만드는 법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들일 수 있습니다. 왕직을 수행해야 할 대상에게 마치 신하처럼 영광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자기 자녀에게 “나처럼만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모가 있을까요? 부모들에게 “자녀가 여러분과 같은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아니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아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부모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가 과연 쉬울까요? 부모와 함께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을 무시하고 어떻게 전혀 다른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자녀가 잘되길 바란다면 자신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먼저 살아야 합니다. 세상눈으로는 자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떳떳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습을 보고서 자녀 역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삶은 돈을 많이 벌어야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볼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즉,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높이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삶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삶을 보고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도, 또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헤어 나올 수 있도록 직접 십자가까지 짊어지셨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다는 점에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로운 일이란, 유다인의 3가지 실천 사항인 자선, 기도, 단식에 대해 충실함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단순히 보이기 위해서 하는 이를 ‘위선자’라고 말씀하시면서 꾸짖으시지요. 
 
위선자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 말에서는 이 용어가 패륜아, 사악한 자 등의 뜻으로 쓰이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이 될 소지가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하느님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큰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하느님 나라가 우리 자리에서 조금씩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열고, 하느님 안에서 참 행복의 삶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가장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가장 똑똑한 자가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변화할 수 있는 자야말로 유일하게 살아남는 자다.

- 찰스 다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마태 6, 3)

 

간절한 비가 내린다. 오른손과 왼손 하늘과 땅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왼손과 오른손의 만남이 진정한 우리들의 공동체이다. 마음 씀씀이를 다시 배우는 시간이다. 마음을 잃어버리면 오른손과 왼손은 늘 갈등과 분열 모순에서 허우적댄다. 내용과 겉치레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점점 메말라가는 우리 영혼이다. 말 없는 사랑의 실천이 간절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있다. 여기도 저기도 너무 말이 많다. 참된 신앙은 참된 자선으로 이어진다.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선은 하느님을 드러낸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자선은 자기기만과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참된 자선의 길잡이가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진심으로 진실을 실천하신다. 진실한 관심 진실한 자선이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사람이며 사람을 다시 아름답게 하는 존재도 사람이다. 따뜻한 손길 진실한 마음이 담긴 자선(慈善)이 우리의 위선(僞善)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 

삶의 길은 위선이 결코 아니다. 자선과 기도 단식의 중심에는 가장 좋은 만남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자선은 도움이 필요한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참된 만남은 요란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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