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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13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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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2022년 6월 13일 (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합 임금은 아내 이제벨의 간계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달라는 자에게 주며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13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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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를 뛰어난 설교자요 곤경 속의 전구자로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도움으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5장 38-42절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준정 리차드 신부 강론

 

 

2022년 6월 13일 (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김준정 리차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6월 13일 (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은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옛 법전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도 언급된(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구약의 가르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연하다고, 마땅히 정의롭다고 생각하던 기존의 가치를 넘어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과거의 가치관과 편견, 세상의 소리를 초월하여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악에 대해서 그저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도록 하십니다. 복수하지 말고, 오히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 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당하기나 합니까?” 하고 반문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한 당신 십자가의 길에서 이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소리에 파묻혀, 당한 만큼 똑같이 돌려주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때때로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홀로 매달려 계시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그분을 조금이라도 더 닮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려려니...

 

2021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의 인터뷰 기사 내용 중에 인상 깊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작은 역할만 맡고, 대부분 사람이 날 싫어해 고통스러웠다. 관객들이 야유하며 ‘이혼녀는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굉장히 좋아한다. 이상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다.” 
 
이혼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금 역시 없는 것이 아니지만, 과거에는 정말로 대단했었지요. 더군다나 공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에 대한 공격은 더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윤여정 어록’이라는 글이 회자할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이 아주 뜨겁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이를 틀렸다고,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다면서 못 살겠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려니’하면서 나를 변화시키면 그만입니다. 
 
나를 좋아했다가도 금세 싫어하기도 한다는 것, 반대로 싫어했다가도 금세 좋아하는 것이 인간 아닐까요? 따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그러려니…. 싫어하는 것도 그러려니…. 어렵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러려니….’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상대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라는 말로 대신하십니다. 오히려 더 주라고 하시지요.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치기 위해서는 손등으로 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근동지역에서는 이렇게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아주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대로 한다면, 나도 오른뺨을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속옷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속옷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옷입니다. 밤에 이불로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또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주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똑같이 반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사랑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에 대해 ‘그러려니’하며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더 멋있는 삶 같지 않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며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맞서는 것이 아니라 맡겨드리는 믿음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신앙이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주체도 제자리로 돌려놓으시는 주체도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진정한 실천이다. 

악인에게 맞서거나 악인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주님과 함께 이 길을 복음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평화는 바라는사람에게 기꺼이 바라는 것을 내어주는 참된 실천이다. 참된 실천이 죽으면 늘 소란스럽고 혼란스럽다. 

낮아지는 실천이 필요하다. 더 낮아져야 고요할 수 있다. 부여잡는 것이 아닌 내려와 하느님께 돌아서는 우리들의 회개이다. 회개는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천 번을 싸워 천 번을 지는 어리석은 반복이다.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되는 기쁨이며 고요이다. 악인에게 반응하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우리들의 호흡이다. 반응하지 않으면 지나가고 맞서지 않으면 영향력을 더 이상 끼칠 수가 없다. 

하느님께 열리는 선(善)한 삶의 기쁨이다. 악에서 구하시고 악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 순간들을 맡겨드리는 봉헌이다. 봉헌이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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