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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1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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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

 

 

2022년 6월 12일 (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잠언의 저자는 하느님의 지혜가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모습이 갖추어졌다고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 덕분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12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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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아버지, 진리의 말씀이신 성자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신비를 인간에게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참신앙으로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알고 오직 한 분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흠숭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6장 12-15절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삼위일체대축일
김용호 베드로 신부 집전

 

 

2022년 6월 12일 (일)
김용호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삼위일체대축일

 

 

2022년 6월 12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제1독서는 심연이 생기기 전,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지혜’가 있었음을 전합니다. 영원에서부터 계시는 그 지혜는 바로 ‘말씀’(로고스)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요한 1,1-2 참조). 

창세기는 한 처음에 ‘하느님의 영’이 함께 계셨음을 전합니다(1,2 참조). 이런 까닭에 한낱 미천한 인간 피조물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복음 말씀은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언제나 일치를 이루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는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느님 계시의 충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시고 이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어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자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며 은총 속에 머물게 됩니다. 세상의 환난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그 희망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먼저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모든 발걸음은 믿음, 희망, 사랑으로 지극히 충만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바랍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에 감사드리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시편 8,2.5)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삼위일체를 꼭 믿어야 하나?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은 삼위일체를 얘기하지 않는데 만일 하느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믿지 말아야 할까요? 바꿔 말하면 삼위일체의 하느님만 믿어야 할까요? 

과격하게 얘기하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꼭 믿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꼭 삼위일체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시면 안 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면 더욱 안 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면 안 믿어도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이 삼위이시건 아니건, 하느님이 한 분이시건 아니건 상관없으며,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마치 사랑치 않는다면 부모가 열이든 하나든 우리에겐 상관없는 것과 같고,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부모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삼위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면 삼위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당신들이 창조한 피조물을 삼위로 구원하신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사랑이시라면 삼위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경우 외톨이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외톨이가 되는데 그래도 사랑하고 싶으면 개라도 사랑하듯이 사랑에는 짝이 있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삼위일체이신데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성부라고 하고, 사랑받으시는 하느님을 성자라고 하며, 성부와 성자 간에 오가는 사랑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부간의 사랑처럼 하느님 안에서 내재적으로 이뤄지는 사랑이라면 부부의 사랑이 자녀를 생산하듯 하느님에게서 발출하는 사랑이 창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랑은 어떤 사랑이건 이처럼 늘 창조적이고 생산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목과 같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임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지 않지만, 그 사랑이 불완전할 수도 있고, 이 불완전한 사랑이 미움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고 애를 낳았지만 그 사랑이 불완전하면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어 서로를 파괴하고 자신을 소모하며 더 나아가 자녀에게 부모로서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하여 아이를 망칠 수 있지요. 

이 경우, 엄마로서 또는 아버지로서는 자녀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다했어도 부모로서는 사랑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데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그 사랑이 완전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끝까지 그리고 완전하게 사랑하시는데 그것을 일컬어 우리 교회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적으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를 뒤이어 성령을 보내셨다고 믿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먼저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편부 또는 편모의 사랑이 아니라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의 큰 사랑을 느낄 것이고,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작용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또한 느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할 것은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과 행동으로 느낄 수 있게 사랑할 것입니다. 성령처럼 기도로 그 사람 안에 힘과 기를 북돋는 사랑을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삼위일체 사랑 참여 방법 : 기도와 말씀 봉사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어려워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실 모든 사랑은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사랑하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면 창조자가 되고 그러면 영원히 삽니다. 우리가 어떻게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유방암 투병 중인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기 마지막 날, 제자들의 선물을 받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학생들의 노래가 강당 가득 울려 퍼집니다. 교단에 앉아있던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부르는 제자들의 모습에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유방암 투병 중인 애드리아나 로페즈 선생님께 바치는 사랑의 세레나데입니다. 

애드리아나 로페즈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학생들이 부른 곡은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한 미국 가수의 노래, 원곡 멜로디에 자신들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로 가사를 바꿔서 불렀습니다. 합창단 감독인 그렉 브라인버그는 로페즈 선생님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헌신적인 교사입니다.”

합창을 마친 학생들은 힘찬 응원과 격려로 스승의 쾌유를 기원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응원 때문이었는지 치료를 잘 마치고 완쾌하였습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신비가 있습니다. 분명 그렉 선생님과 로페즈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하나의 사랑을 만들고 있습니다. 먼저 그렉 선생님이 로페즈 선생님에게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렉 선생님의 사랑에 동참하였습니다. 노래를 배우고 꽃을 준비하고 깜짝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로페즈 선생님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들여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여기서 예수님은 그렉 선생님입니다.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본인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원하였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도와줄 성령을 동원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렉 선생님에게 순종하였듯이, 성령께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시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13-14)

‘그렉 선생님 – 아이들 – 로페즈 선생님’이 삼위일체이듯이 ‘그리스도 – 성령 – 교회’가 삼위일체입니다. 이 삼위일체 신비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성령과 같은 아이들의 역할에 의해 완성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비가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처럼 그렉 선생님으로부터 노래를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또 그것을 로페즈 선생님에게 불려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기도와 말씀 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배우는 시간이고 말씀 봉사는 그 배운 것을 가르치는 시간입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바빠서 부제 일곱을 뽑았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삼위일체 신비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

기도와 말씀 봉사로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개는 훌륭하다’에서 개를 키울 자격이 없는 수준의 견주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코비라는 보더콜리를 키우는 모녀인데 강형욱 훈련사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코비가 활동량이 부족하여 옷도 찢고 사람도 무는데, 말도 없이 또 다른 강아지 담비를 입양한 것입니다. 코비는 담비를 괴롭히고 담비는 변기 뒤에 숨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쟤네 원래 저렇게 놀아요!”라고 말합니다. 

보더콜리는 워낙 지치지 않는 활동량을 자랑하기 때문에 하루에 3번 정도는 산책시켜줘야 하고 엄청난 애정을 쏟아부어야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 조련사는 모녀에게 무릎을 꿇고 담비를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은 그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에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도 촬영을 이어가기 위해 훈련장으로 코비만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모녀는 담비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훈련을 하는데도 견주는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촬영이 중단됩니다. 모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배우러 온 건데…. 그런 쪽으로 훈련을 한 게 없고…. 잘 모르겠어요.”

오늘 복음에서 성령께서는 아드님께 순종하시고 아드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어주십니다. 배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분께 무릎 꿇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배운 순종을 알려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성령의 역할을 할 때 삼위일체에 속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입니다. 순종 없는 사랑은 그래서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기도와 말씀 봉사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

 

지난 3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는 역대급 선거라는 말을 합니다. 2위와의 득표율 차가 0.73%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몇몇 분으로부터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0.73%라도 더 지지받았다는 것을 왜 잊을까요?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 모두 사라져서 자기가 지지했던 후보가 100%의 지지로 당선된다면 어떨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견제 세력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발전도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0.73%의 득표율 차는 양측에 큰 깨달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잘 하지 않으면 더 큰 반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새로운 변화로 지지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요? 
 
서로 이념의 차이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을 떠나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이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의 삼위일체입니다. 잘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사랑만을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그 베푸심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이처럼 참사랑을 주시기 위해 성격이 다른 세 위격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 역시 이제 후회할 짓을 하지 않고, 특히 우리 신앙의 공동체가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삼위일체의 삶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이 얼마나 삼위일체의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사랑 없이, 자기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면서, 세상에 하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그런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정면으로 죽음을 마주하며 살아가면서, 나는 이제야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요한 16,15)

 

사랑의 위대한 힘을 믿는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들 생명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이기에 소중하고 고귀한 품위를 지닌 사랑의 값진 존재들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온전한 사랑이시다. 사랑은 사랑의 관계로 흘러간다. 사랑의 관계는 신뢰와 내어드림 확신으로 더욱 깊어간다. 이렇듯 사랑의 본질은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친밀감과 열정 헌신으로 드러난다. 

성부의 선의와 성자의 나눔과 성령의 일치로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신다. 삼위일체의 삶에 응답하는 삶이 하느님 자녀들의 올바른 삶이다. 올바른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끄심에 순명하는 삶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대축일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우리의 현실을 전적으로 봉헌하는 은총의 신비이다. 삼위일체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뜻이시다. 하느님의 뜻은 가장 좋은 사랑의 나눔이다. 우리의 나눔 안에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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