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11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11.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6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

 

 

2022년 6월 11일 (토)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보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11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믿음과 성령으로 가득 찬 복된 바르나바를 뽑으시어 여러 민족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하셨으니 그가 굳은 신념으로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희도 말과 행동으로 충실히 선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0장 7-13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정준 리차드 신부 집전

 

 

2022년 6월 11일 (토)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김정준 리차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6월 11일 (토)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제1독서는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흩어진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이가 주님을 믿게 된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르나바는 제자들이 맨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어 사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는데,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내린 것에 기뻐하며 그들이 주님께 충실하도록 격려합니다. 더욱이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중요한 다섯 설교 가운데 하나로 ‘파견 설교’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며 마귀를 쫓아내도록 명하십니다. 사실 이는 모두 예수님께서 몸소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한과 사명을 열두 사도들이 계속 이어 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거저 받은 것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까? 오히려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이룬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자신의 힘만으로 이룬 것은 얼마나 될까요? 

곰곰이 따져 보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거기에는 생명, 시간, 가족이 있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게 된 믿음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을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된 사랑과 기쁨, 희망,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선물에 먼저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을 위해서 세상 모든 형제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 그리고 주위 형제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 위로와 나눔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축복과 평화를 빌어 주는 것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에다가 성령과 믿음도 충만한 사람이라고 사도행전은 얘기합니다. 인성적으로도 훌륭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훌륭하다는 완벽한 찬사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착함에 대해서 한 번 성찰코자 하는데 우리말의 착함은 항상 그 번역에 있어서 적절한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한자어가 아닌 순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착한 사람이라고 번역한 것 같은데 제 생각에 이것은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선한 사람이라 번역함이 좋을 듯 하고 그래서 200주년 성서도 선한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착한 사람이란 윗사람 말을 잘 듣는, 말하자면 순종을 잘하는 사람을 특히 어린이를 많이 일컫지요. 

이에 비해 선한 사람은 착한 사람과 좋은 사람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르나바 사도의 경우는 선한 사람이라고 함이 옳을듯 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라고 해야 악한 사람과 비교하여 얘기할 때 분명한 비교가 되고 선과 악과 연관지어 얘기할 때도 개념이 명확해지지요. 

제 생각에 선인이나 악인이나 선을 좋아하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일지라도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자기 자식한테는 좋은 것을 줍니다. 

주님께서도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더 그러시지 않겠냐고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선인이나 악인이나 다 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악인은 그 선을 자기 입이나 자기 자식 입에만 집어넣고 다른 사람 입에는 넣어주지 않거나 악을 주는 데 비해 선인은 그 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차이라 하겠습니다. 

선인이라고 하여 선을 자기 입에 넣지 않고 남의 입에만 넣어주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입에는 나쁜 것만 넣고 남의 입에는 좋은 것을 넣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인도 자기 입에 좋은 것을 넣는 사람인데 악인과 차이는 자기 입에만 넣는 사람이 아닌 거지요. 그러니까 자기 입에도 남의 입에도 같이 넣는 겁니다. 

우리말의 콩 하나도 나눠먹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알 듯이 나누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뭣을 나누느냐, 달리 말해서 어떤 선을 나누느냐에 따라 그 나눔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지상의 선을 나누는 것도 좋고 의미가 있지만 천상의 선을 나누는 것이 더 좋고 의미있지요. 

그리고 천상의 선을 나눈다는 것은 복음에서 좋은 것을 주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 것처럼 성령을 나누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나누는 것 곧 선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은 바르나바 선한 사람이라고 한 다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덧붙인 것이고 교회는 그를 사도라고 합니다. 

어쨋거나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 훌륭한 바르나바를 그의 축일인 오늘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self-esteem’이라는 영어를 쓰는 자존감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가지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스스로 가잘 수 있을까요? 옆에 있는 사람이 “너는 참 못났어. 왜 그렇게 사니? 장차 뭐가 되려고 그러니?” 등의 말을 계속하는데도 스스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받아야 괜찮은 사람이라는 감정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다면 자존감 고취는 불가능한 일일까요? 어렵기는 하지만 노력에 대한 성취가 모여지면서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커다란 성공만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성취를 이뤄나가면서 또 삶의 자그마한 부분에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자신은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명확합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아 보이는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의지가 강해서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라고 하십니다.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을 챙겨주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돈도 지니지 말고,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파견에 대해 “저는 못 합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파견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복음 선포를 마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 자리는 아니었지만, 주님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 사랑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 마거릿 대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 8)

 

생명을 대하는 태도 변화가 생명을 바꾸어 놓는다. 거저 받은 가장 좋은 생명이다. 가장 좋은 생명은 가장 가치있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생명에 대한 반성이다.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다시 만나는 복음의 나눔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행동이며 올바른 성장이다.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에 함께하시는 실천의 주님이시다. 

욕망의 감소가 나눔의 가치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행위의 참된 시작이다. 참된 행위는 참된 평화를 지향한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평화를 나누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가장 좋은 은총이다. 삶다운 삶 참다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참다운 삶은 애착과 집착이 아닌 지극한 나눔과 기도와 정성이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다. 실천의 참된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거저 주시는 사랑과 용서를 대면하는 반가운 생명의 시간이다. 생명이란 변명이 아닌 변화가 필요한 복음의 행위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