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9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9.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6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

 

 

2022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가 아합 임금에게 올라가서 음식을 드시라 하고 기도하자 큰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돌아와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9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5장 20ㄴ-26절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장인우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6월 9일 (목)
장인우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6월 9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서로 사랑하여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 율법에 대한 충실을 뜻하며,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뜻에 대한 충실을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의로움’은 매우 중요한 낱말로, 예수님께서는 특히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시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5장 21절에서 48절까지 이어지는 구절은 ‘여섯 가지 대당 명제’라고 하는 구절의 첫 번째 단락으로서 “너희는 ……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면서,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을 심화하시며 형제에게 성내고 욕하는 것까지도 엄격하게 경고하십니다. 또한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껄끄러운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마치 훤히 다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주님의 이 같은 요구에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의로움은 결국 ‘사랑’이라는 한 낱말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이신 예수님과 일치할 때,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들과 화해하며 형제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화가 나거든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오늘 주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지만 저는 형제와 싸웠더라도 그리고 아직도 미움과 분노가 태산 같더라도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와 화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너무도 좋겠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미움과 분노가 태산 같으면 그럴 수 없고, 그럴 수 없는 상태에서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이 면목 없어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슬슬 하느님을 피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웃과 화해를 한 다음 하느님께 가야 한다면 영영 못 가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와 미움이 태산 같더라도 그래서 카인처럼 그놈을 때려죽이고 싶을 지라도 기도하러 가라. 가서 하느님께 그놈 나쁜 놈이고, 때려죽일 놈이라고 고자질하고 화가 풀릴 때까지 마음껏 욕하고 흉보라고. 

그렇게 하여 혹 화가 풀리고 그래서 하느님 말씀 들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하느님 말씀도 들으라고. 

이것이 제가 얘기하는 화날 때의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한 저의 지론은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안에 사랑이 가득하고 찬미가 저절로 나와야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화가 나고 그래서 저주밖에 나올 것이 없어도 그 저주를 하느님께서 내려주십사고 청하면 그것도 기도입니다. 

시편을 보면 저주의 기도가 있는데, 저주를 내가 직접 퍼붓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기도로 청하고, 누구를 욕하거나 흉보고 싶을 때에도 하느님 앞에서 욕하고 흉보면 기도가 됩니다. 

그에게 직접 욕하거나 다른 사람을 찾아가 흉보는 것보다 이것이 더 낫고 기도가 되니 좋지 않겠습니까? 

이게 저의 생각이니 화해하고 예물을 드리라는 주님 말씀이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토를 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화해를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니까 화해의 전 단계로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 화풀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화풀이는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화는 반드시 풀어야 하는데, 화풀이는 그 화를 푸는 행위입니다. 

화를 풀지 못하고 혼자 꿍꿍 하는 사람이 있고, 화를 당사자에게 무식하게 풀거나 엉뚱하게 다른 사람에게 푸는 사람도 있는데 화풀이를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최고이고, 그것이 곧 기도이고 굿으로 치면 살풀이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 볼만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라는 표현입니다. 

미움과 분노 가운데서도 일단 주님 앞에 간 겁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참된 예물이 되려면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께로부터 물러나 형제를 찾아가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 “바보”, “멍청이”라고 한 사람을, 우리말로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개새끼”라고 해야 할 사람을 이제 형제로 받아들이기로 하며 찾아가는 겁니다. 

개의 새끼가 아니라 하느님의 새끼이고 그래서 나의 형제인 그를 화풀이 기도 안에서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떳떳합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화해를 형제간에 해서 떳떳하고 혼자 가지 않고 형제가 같이 아버지 앞에 가서 떳떳하고 행복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화가 멈추는 때 :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일 때

 

대한 신경정신의학회 조사 결과 한국 성인의 50%가 분노 조절 장애를 겪고 있고 이 중 10%는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분노 조절을 잘 못 하는 나라가 되었을까요? 대부분은 부모 때문입니다. 

‘응답하라 1988’ 중에 언니랑 생일이 3일 차이라 매번 언니 생일날 생일파티 하는 덕선이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니가 불은 케이크 초를 덕선이 나이만큼 빼고 다시 초를 붙이려 합니다. 케이크값을 아끼려는 부모의 마음이고 부모는 아이가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덕선이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만 무시한다고 분노합니다. 

이때 부모의 반응은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분노에 분노로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다면 아이는 더는 부모에게 마음을 터놓지 않을 것입니다. 분노를 삭이다가 누군가에게 터뜨릴 것입니다. 

사흘이 지난 뒤 덕선의 아버지는 케이크를 사서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짜잔, 우리 딸 언제 이래 커버렸을까? 허허. 아빠가 미안하다. 잘 몰라서 그래. 이 아빠가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디. 그니까 우리 딸이 쪼까 봐죠, 응?”

이때 덕선의 표정은 다시는 부모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리고 정말 화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가 화를 내니까 자녀가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먼저 화가 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울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화를 안 내려는 사람은 바리사이에 속하고 화가 안 나게 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에 속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20,22)

아예 형제들에게 원망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물을 드리고 성체를 영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20,23-24)

하지만 살다 보면 어떻게 화가 날 일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화가 나는 원인이 ‘나의 이익’ 때문임을 안다면 화가 덜 날 것입니다. 화를 내는 이유가 정말 상대를 사랑해서일까요, 아니면 손해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화를 내지 말라는 이유는 화 자체가 이기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기적이면 상대도 그런 사람으로 보여 화가 나는 것입니다.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김미경 강사는 아들은 어머니가 잘나가는 것에 비해 매우 소심하고 소침해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 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 출석 일수가 부족하여 빨리 자퇴하지 않으면 퇴학 처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어머니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를 자퇴시켰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3개월 남겨놓고 음악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학원에 보내주었더니 예고에 가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피아노 전공이어서 잘 압니다. 다른 아이들은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도 예고에 들어가기 힘든데 어떻게 지금 건반을 처음 두드리는 자신이 예고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아이가 악보를 전혀 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3개월 동안 한 곡의 악보를 외워서 결국엔 외고에 합격하고 맙니다. 하지만 1년을 버티더니 고등학교도 계속 버틸 수 없었습니다. 워낙 기반이 안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자퇴하고 폐인 생활을 합니다. 

아들은 친구들과 놀다가 새벽 4에 들어와 몰래 컵라면을 방에서 먹곤 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을 무려 5년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걸 보는 아버지는 화가 끓어오릅니다. 하지만 엄마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새벽 4시까지 기다렸다가 아들에게 따듯한 밥을 해 주었습니다. 남편이 화를 버럭 내었습니다. 이때 김미경 강사는 남편 방으로 따라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 눈에는 얘가 나쁜 애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아픈 애야. 한 번만 또 버럭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이렇게 어머니가 자신을 믿어주자 아이가 들어오는 시간이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자존감을 되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일본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합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먹을 것은 벌어보겠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어머니는 기꺼이 엄마는 기쁜 마음에 돈을 대 줍니다. 아이는 일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언어 시험도 치릅니다. 손톱이 빠질 정도로 박스 나르는 일 하다가 이젠 햄버거 가게에 취직합니다. 

그곳에서 어떤 누나를 알게 되었고 그를 성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누나는 한국과는 다른 일본의 입시제도에 관해 설명해줍니다. 어떤 교수의 마음에 들면 그 학교에 입학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보를 보지 못하는데도 피아노 교수를 하는 일본 교수를 만납니다. 그 교수는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이유 중 하나는 청각이 발달하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줍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져오면 대학에 입학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에 급히 들어와 검정고시를 보고 간신히 통과합니다. 어머니는 아이 반 친구였던 이들을 초대하여 집에서 졸업식을 해 줍니다. 상장도 열다섯 개나 준비합니다. 아이는 상장 다섯 개를 받을 때부터 울기 시작합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음대에 들어간 아들은 하루에 6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합니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정도나 되어야 인정받는 수준까지 올라갑니다. 기쁨에 차서 엄마에게 돌아옵니다. 일본 여자 친구와 함께.

그녀는 ‘어쩌다 어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아들의 편지를 읽어줍니다. 

“엄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 생각 정말 많이 했어. 근데 나는 엄마 생각하면 제일 속 썩였던 중학교 때가 생각난다. 엄마 그날 생각나? 내가 중학교 때 우리 집 부엌에 있던 식비 5만 원 없어진 날 말이야. 누가 가져갔냐고 이모도 고모도 다 내가 가져갔다고 말했어. 나 그때 정말 화가 났어. 모두가 나를 무시하는 거 같았거든. 왜 나를 무시하냐고 길길이 날뛰면서. 엄마 나 그날 내 정신이 아니었나 봐. 책상에 있는 책 다 집어던졌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렸어. 그때 엄마가 강의 갔다가 돌아오셨는데, 엄마가 내가 던지는 책을 온몸에 맞으면서 걸어오더라. 엄마, 그때 많이 다쳤지. 진짜 미안해. 그때 엄마가 나 안고 말했어. ‘엄마는 너 믿어, 우리 아들 안 가져간 거 알아. 누가 너한테 가져갔다고 그래?’ 엄마만 내가 돈을 안 가져갔다고 믿어줬어. 진짜 고마워 엄마. 근데 엄마 있지, 그 돈 내가 가져간 거 맞아. 진짜 어이없지 엄마. 근데 엄마, 엄마만 그거 알아줬잖아. 내가 돈을 가져간 것보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집에 엄마 한 사람뿐이었어. 엄마만 나 믿었거든.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 말 아무도 안 듣고 엄마 말만 듣고 큰 거야. 그래서 내가 항상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거야. 엄마 땜에. 엄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내 인생의 파트너이자,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는 나를 살려준, 나를 인정해 준 내 인생의 첫 번째 은인이야. 엄마 사랑해!”

김미경 씨는 아이를 바라볼 때 나쁜 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픈 놈으로 보았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엄마,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근데 나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마음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김미경 강사도 아들이 중학교 자퇴했을 때 처음에 한 이 말이 가장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나 어떻게!”

그리고 빨리 후회하고 상대를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의사라는 믿음을 가지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이제 ‘나 어떻게’에서 ‘너 어떻게’로 건너갑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사랑을 내 안에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참조). 

의사가 아픈 사람을 보고 화를 내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화를 낸다고 한다면 그건 상대가 더 나빠져서 자기 명예에 손해를 끼칠까 봐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면 상대가 ‘아픈 놈’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화가 안 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 자신과 화해하기

 

다른 사람의 말에 큰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 듣기에는 별문제가 없는데도, 큰 모욕을 당했다며 그 사람을 향해 심한 욕을 하기도 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의 아픔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 경우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나의 말과 생각을 24시간 쉬지 않고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그런 내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남의 말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자기를 더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남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부정적인 말만 하면 똑같이 부정적인 말로 상대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나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향한 진심 어린 배려가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말, 사랑 가득한 말, 용기를 주는 말…. 이런 말들이 나의 자존감을 높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배려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국 작가 토마스 플러는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친구가 되어라. 그러면 다른 이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이 말씀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보’나 ‘멍청이’는 종교적인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바보’는 (머리가) 빈 놈이라는 뜻으로 생각이 없어 하느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멍청이’는 하느님도 모르는 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해서, 똑같이 잘못함으로 응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철저하게 ‘사랑’에 기반하십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모든 말과 행동은 의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반복되면서 하느님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화해라는 사랑의 실천이 지금 당장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화해하면서 좋은 말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받는 것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끝없이 지속되며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힘이다.

- 오귀스트 로뎅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 24)

 

화해의 말씀을 다시 듣는다. 화해의 문을 여시는 주님이시다. 돌아보면 화해가 필요한 형제들이 많다. 형제와의 화해는 곧 나 자신과의 화해이다. 서로를 만나는 화해의 값진 시간이다. 

서로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마음이 우리의 인격이다. 산다는 것이 마음과 마음의 만남임을 다시 깨닫게된다. 화해의 마음을 먹고 걸어가는 우리들 새로운 삶이다. 부딪힘과 실망을 주님께 봉헌한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회심의 마음이 있다. 모든 길의 시작에는 회심이 있다. 함께 살아가게 하는 회심과 화해이다. 화해없이는 평화 또한 없다. 서로 화해하는 새벽미사의 참기쁨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