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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5일 (일) 성령강림대축일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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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령 강림 대축일 -

 

 

2022년 6월 5일 (일) 성령 강림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오순절에 사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5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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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오늘 이 축제의 신비로 모든 민족들과 나라에 세우신 하느님의 온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니 성령의 선물을 온 세상에 내려 주시고 복음이 처음 선포될 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이제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20장 19-23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진호 안토니오 신부 집전

 

 

2022년 6월 5일 (일)
성령 강림 대축일
이진호 안토니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6월 5일 (일)
성령 강림 대축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당신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제1독서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도들에게 하늘에서 불꽃 모양의 성령이 내려온 사건을 전합니다. 오순절은 원래 과월절이 지나고 오십 일째 되는 날에, 밀 수확을 마무리하고 하느님께 맏물을 바치며 드리는 감사 축제였는데(탈출 23,16; 34,22; 레위 23,15-21 참조), 점차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고 율법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로 발전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저마다 다른 언어로 말하는데, 이를 듣고 세상 모든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사도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자신들의 언어로 알아듣게 됩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고려하면, ‘하느님의 위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 약속의 성취이며, 이로써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요 메시아이심을 알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시어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며,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이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는데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 뵙고 기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 기쁨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거기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파견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숨’은 인간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부어 주신 “생명의 숨”(창세 2,7)이 떠오르게 하며, 제자들은 하느님 생명의 숨과 함께 성령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습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이 성령으로 새로 나 죄를 용서받는 은총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가 탄생하고 선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세상.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한 자리에 모여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읽은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민족에 상광없이 그리고 신분에 상관없이 우리가 모두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고 단언을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민족과 사람들이 하나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현실을 보면 사도의 단언처럼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도의 공동체처럼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까? 

오늘 서간은 그것이 한 성령 안에 우리가 있지 않고 한 성령을 받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하나가 된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도 할례나 음식 문제로 갈라질 뻔하기도 했지요.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도들의 교회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을 하는 것은 오늘 사도행저의 다음 말씀입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한자리에 모여 있었기에 한 성령을 받게 되었고, 한 성령을 받았기에 한 몸이 되는 연쇄적인 과정의 그 첫 번째 과정이 바로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인 셈입니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천릿길의 그 한걸음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고,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과 의지로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내용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갈망과 의지 위에 꽃피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하나 되고픈 갈망이나 의지느커녕 서로를 두려워하고 거부하고 밀어내는 상황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일치의 은총을 주시려고 해도 주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공동체처럼 한마음, 한 뜻의 완성된 공동체가 되려면 하나가 되고픈 마음이 우선 각자에게 있어야 하고 또 그 마음이 모아져야 하는데 모여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도 모여 있었습니다. 실망하고 모두 흩어졌을 수도 있었는데 모여 있었던 것이고,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평화를 주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숨을 불어넣어 주실 때 그걸을 같이 들여마신 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숨을 들이기는 것이 아오스딩 성인의 말대로 바로 기도인데 우리의 들숨이 서령을 마시고 날숨이 악령을 내쫓는 것이 되어야 하고 제자들처럼 같이 성령을 받아 마시는 것이 공동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할 때 맨손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고 체조의 마지막 동작이 숨쉬기인데 그때 앞에서 구령을 부쳐주면 그 구령에 따라 같이 숨을 들이키고 내쉽니다. 

이 숨쉬기의 구령을 주님께서 부쳐주시고, 그 구령에 따라 성령의 들숨과 나숨을 쉬는 우리 공동체가 되고 우리의 공동 기도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바람을 가져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저절로 되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전도연은 아들이 유괴되어 잃고 신앙을 가지고 용서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살해한 범임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며 편안해하는 그를 보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합니다. 교회도 나가지 않고 교회에 돌을 던지고 자해까지 시도합니다. 

이 영화는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면서도 과연 진정한 용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왜 전도연은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진정한 용서가 되지 않았을까요? 성령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용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힘이 들면 언젠가는 포기하게 됩니다. 

전도연이 진정 기도하여 성령의 힘으로 용서하였다면 상대가 용서받았다고 해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렇게 힘든데 가해자가 힘들지 않다고 말하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 가운데 특별히 ‘용서’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이는 분명 교회에 성령의 힘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내려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용서에서도 성령의 힘이 작용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내가 하는 용서와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의 차이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와 내가 하는 용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령은 불가능한 일까지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용서를 하려는 이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트레이 랠포드가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2015년에 피자 배달하던 22살 청년 살라후딘 지트무드를 무참히 살해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재판정에서 학교 교장이자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인 희생자 아버지 솜밧 지트무드가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 증언합니다. 

“트레이 알렉산더 랠포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요. 내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선량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아들을 도운 것처럼요. 살라후딘이 여기 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아들의 방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해쳤다고 해서요. 나는 악마에게 화가 납니다. 악마를 탓합니다. 당신을 잘못 이끌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인도했으니까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걸 꼭 알아주세요.”

트레이는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것입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말을 이어갑니다. 

“아들과 아내를 대신해 당신을 용서합니다. ”

한 인터뷰에서 지트무드는 아직도 아들이 죽은 악몽을 계속 꾼다면 힘들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가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 때문임을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화가 나지 않지만, 저 자신을 탓합니다. 보호해주지 못해서요. 목이 완전히 잘려 나갔어요. 끝없이 슬퍼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죽인 그 남자를 여전히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인생에 우연이란 없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죠. ‘아들은 22세에 죽는 걸로 적혀 있구나.’ 알라신이 아들에게 멋진 22년 인생을 내려줘서 감사하다고 느꼈습니다.”

믿음엔 이미 성령의 힘이 작용합니다. 저는 타 종교 안에서도 성령 강림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위험한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솜밧 지트무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또 무너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자기 아들을 저렇게 무참히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하였다면 그것은 성령의 힘입니다. 그가 믿는 종교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또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해주시는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안아줍니다. 눈물을 닦으라고 수건도 줍니다. 성령으로 하는 용서의 특징은 나의 용서가 힘들지 않기에 상대와 함께 있는 것도 힘들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자기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한 것은 분명 내 힘으로 한 용서입니다. 비록 그리스도를 믿어도 성령의 힘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며 사는 게 싫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용서입니다. 이 용서에는 힘이 없습니다. 상대를 보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한 용서는 상대와 함께 머물고 싶습니다. 원수를 보는 것이 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바자는 술을 마시다 총기가 오발로 발사되어 절친 도널드 로렌트를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죄를 뉘우치며 도널드의 가족이 원하면 평생을 감옥에서 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널드의 부모는 오히려 그의 가석방을 추진하고 그가 나왔을 때를 대비하여 숙소와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면 상대를 보는 것이 매우 괴롭습니다. 하지만 도널드의 부모는 자기 아들을 죽인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오히려 그렇게 용서할 수 있게 만든 힘이 자신들 안에 있음을 되새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정원 씨의 용서도 성령으로 한 용서입니다. 고정원 씨는 유영철을 만나려 했고 유영철을 통해 성령의 힘을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영철을 자기 양자로 삼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은인으로 여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용서로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나를 위한 내 힘으로 하는 용서여야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위한 주님 힘을 통한 용서여야겠습니까? 성령 강림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용서를 통해 성령을 체험하라고. 

마리아 고레티는 자신을 찌른 사람과 천국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성령의 은총을 받게 한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게 힘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힘들면 안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만 성령을 받으려는 노력은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입니다. 제가 보좌 신부 때 한 자매는 일주일 동안 한 시간씩 성당에 앉아 있는 노력을 했는데 바람 나서 나간 남편이 용서되었고, 다른 자매는 일 년 동안 그렇게 했더니 남편이 미워 보이지 않고 불쌍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오면 이전처럼 남편을 잘 대해줍니다. 아직도 바람을 피우고 있지만 그를 보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입니다. 

내가 용서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힘들지 않을 때까지 성당에 앉아 있으십시오. 주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다만 나무에 붙어있는 노력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성령강림이 일어납니다. 성령강림이 일어나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맺힙니다. 성령께서는 하려고는 하되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오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응원이 꼭 경기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전국대회에서도 늘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자주 응원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응원을 열심히 하면 멋진 플레이도 많이 나오고, 또 승리할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분명히 실력이 더 중요할 텐데, 응원으로 더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반의 야구부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응원하면 정말로 힘이 나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편의 응원이 더 크고, 야유가 쏟아지면 괜히 화가 많이 나고 실수도 잦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홈그라운드의 잇점’은 분명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 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편이 없고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만 생각되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응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응원이 꼭 경기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안에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등등. 응원할 곳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인가요? 혹시 응원이 아닌 야유의 성격이 더 짙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우리를 계속해서 응원하십니다. 실력 발휘를 잘 할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면서 지켜주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지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위치가 나옵니다. 바로 가운데에 서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가운데 서신다는 것입니다. 계속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멈추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천지창조 때의 인간 창조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지요. 예수님과 깊은 일치 속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응원하는 주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긴 이 응원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우리는 결코 주님과 정반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응원에 힘을 얻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의 죄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 응원의 힘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응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한다고 주문을 걸고 사랑을 앞세우면 일도 사람 관계도 나아지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 이병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 22)

 

우리자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아들임으로 새로워지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의 일상성 안으로 기쁘게 들어오시는 성령이시다. 새로운 탄생 새로운 시작을 불러 일으키시는 사랑의 성령이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 부활의 궁극적 의미는 가장 좋으신 성령의 현존이다. 우리 삶의 모든 여정에 함께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신앙 공동체의 가장 본질적인 뿌리이시다. 공동체를 건설하고 공동체를 성장시키신다. 성령은 다양한 은사로 신앙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신다. 

하느님 자녀들에게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이다. 성령의 은사는 봉사의 삶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새롭게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뜻이다. 가장 좋으신 성령이시여, 모든 억압과 모든 죽음 단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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