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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4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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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6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7주간 토요일 -

 

 

2022년 6월 4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로마의 자기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찾아 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며 그의 증언은 참되다고 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4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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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 축제를 마치는 저희에게 너그러이 은혜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 신비를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21장 20-25절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2022년 6월 4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6월 4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이스라엘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을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끝까지 전하고자 하였던 “이스라엘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행전은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로마에서 바오로가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친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사명에도 들어맞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바오로 사도가 전한 이스라엘의 희망이며, 온 인류의 희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의 선포는 교회 역사 안에서 사도들과 부활의 증인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집니다.

복음서 가운데 마지막인 요한 복음 21장 20-25절은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증언되고 복음서가 기록되었으며 공동체 안에서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을 다시 한번 떠올립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아버지 하느님의 권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기록된 말씀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예수님. 그분께서 바로 우리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우리를 먼저 초대하셨고, 이제 모든 이에게 이 은총의 선물이 전해지도록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부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방해받지도 상관하지도 않는 나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부활 시기를 끝내며 교회 전례는 독서와 복음으로 각기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과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최후를 얘기하지 않고, 계속 선교하는 것으로 얘기하고 그뿐 아니라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이때 실제의 바오로 사도는 갇혀 있는 상태였고 많은 방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이 바오로 사도가 아무 방해를 받지 않았다고 함은 방해가 없어서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방해에도 불구하고 방해받지 않았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마치 축구에서 집념의 축구 선수가 온갖 수비 방해에도 그것을 뚫고 마침내 공을 넣는 것처럼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선포를 했다는 말이겠습니다. 

오늘 얘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금 상태에 있지만 찾아오는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그였지요.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러므로 방해를 받는 것은 내가 방해를 받아야지 받는 겁니다. 누가 방해를 했어도 내가 받지 않으면 방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바오로 사도처럼 아무리 누가 방해해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하는 선교 협동조합을 감히 바오로 사도의 선교와 비교할 수 없는 거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선교하려고 한다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불랙 리스트에 올라 제가 중국에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에 와있는 분들을 선교하자고 한 것이 여기 선교 협동조합이잖습니까? 

제 생각에 상관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말라는 말씀이잖아요? 우리말에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난다는 말이 있지요. 

한 손으론 소리 나지 않으니 소리 나기 위해선 다른 손이 필요하다는 말도 되지만 이를 뒤집으면 아무리 시비 걸어도 상관치 않으면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갈등(葛藤)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갈등이란 칡 나무 갈과 등나무 등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칡이나 등나무 모두 꼬는 성질이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꼬니 풀기 어려운 문제처럼 풀기 쉽지 않은 매듭이 되고 갈등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칡이나 등나무가 아무리 꼬아와도 내가 칡이나 등나무가 아니고 거기에 얽히지도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고 갈등은 아예 생기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만 중요합니다. 베드로 사도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일만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중요한 것 그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아무런 방해를 받지도 않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방해를 해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나, 중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관치 않는 나가 되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따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매진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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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가장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방법

 

예전에 전문적으로 산악자전거를 타시는 형제님을 쫓아서 몇 번 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전거로 산에 오르는 것은 다리의 힘만 좋으면 그럭저럭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겁이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산에서 내려오다가 크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형제님을 쫓아 내려가는데 앞에 툭 튀어나온 돌멩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급하게 잡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그때 형제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돌멩이나 나무뿌리 같은 장애물을 보고 겁을 내면 반드시 넘어집니다. 그냥 과감하게 확 지나가면 됩니다. 이게 가장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앞에 장애물이 놓이면 겁을 내고 맙니다. 주저하게 되고 그래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확 지나가면 그만이었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나를 넘어지게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미국 작가 앤지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용기란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무섭지만 계속 나아가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어떻게 될지를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형제들 사이에서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체험했던 제자들이기에, 이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죽음의 위협도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의 참 기쁨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불안하기만 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주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남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자기 사명에만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에 신경 쓰면서 두려움 안에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감하게 확 지나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방법인 것처럼, 주님만을 굳게 믿고 자기 사명에만 충실한 것이 가장 안전하게 주님을 따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방법에 충실했던 바오로가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사도 28,31 참조).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사소함 속으로 더 깊이,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다.

- 최인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요한 21, 23)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며 많은 형제들이 떠났다. 고민하고 아파한 이 자리에서 주님 말씀을 듣는 모순된 상황이다. 하느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결단이 다시금 필요한 시간이다. 수 많은 핑계를 대며 하느님과의 나와의 관계에 또한 불충실하였다. 

낡은 가치관을 버려야 할 새로운 가치관의 흐름이다. 충실한 관계는 개별성과 독자성을 통해 어려운 이 시간을 견디며 헤쳐나가는 삶이다. 오직 모르는 삶의 앞날만이 우리들에게 펼쳐진다. 앞세우지 말아야 할 우리들 뜻이다. 꺼내 놓아야 할 상대에 대한 진실한 공감이다. 

공감하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원칙은 잃지 않아야 한다. 갈등과 부딪힘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상대와 타인 이웃과 형제에 대한 평가를 내려놓고 우리자신에 대한 성찰과 결심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느님께 흐르게 하는 신앙의 올바른 자세이다. 

떠난 형제들도 남아 있는 형제들도 모두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안에 있다. 그 어떤 뒤에도 숨지 않는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개별성의 여정 고유성의 역사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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