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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5월 3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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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

 

 

2022년 5월 31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게 주님께서 한가운데에 계시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인사하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5월 31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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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를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도록 이끄셨으니 저희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 살며 마리아와 함께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장 39-56절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창영 이레네오 신부 집전

 

 

2022년 5월 31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이창영 이레네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5월 31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는 만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이 둘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하면서도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였지만 성령에 힘입어 아이를 갖게 된 마리아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하느님의 손길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였지만, 자신들의 남은 인생 전부를 그분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만나 자신들에게 섭리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하여 더 큰 확신과 위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마리아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섭리에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서로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되어 줍니다.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마리아이며 엘리사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안에서 끊임없이 머무르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만남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고 있는지요? 한 신앙인으로서 다른 신앙인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 주는 만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만남이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 힘과 용기가 되어 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어제는 공동체 형제들과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기후 비상 시대-리허설’이라는 연극을 보기 위해 명동 국립 극장을 가는 전철에서 책을 보고 있는 한 친구를 보게 되었는데 요즘 책을 잘 안 보는 시대에 책을 보니, 그것도 젊은 친구가 보니 그 자체가 관심이 가서 무슨 책을 보나 살짝 엿봤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이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였습니다. 무슨 이런 책이 있을까 생각이 되면서도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을 묵상하며 가던 길이었기 때문인지 만남이라는 주제와 즉시 연결이 되면서 어떤 만남은 가져야 하고, 어떤 만남은 우리가 그 만남을 피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피해야 할 만남 하면 즉시 나를 유혹한다든지 피해를 주는 사람이 생각이 나고, 요즘은 상처에 민감하고 조그만 부담도 못 견뎌 하니 상처를 주는 사람이나 부담을 주는 사람이 이내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책이 이런 유의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것이라면 읽어야 할 책이 아니고 우리도 이런 이유로 누구를 만나지 않아서 안 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진정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상대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어떨 때 누구를 만나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나기만 하면 남 흉을 보게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 이유도 그 사람이 남 흉을 잘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흉을 보고 싶을 때 그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외로울 때 만나고 싶은 사람도 제 생각에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외로움이 병이 될 지경이라면 만나야 되겠지만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인 이유 때문임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외로울 때는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때인데 이 영적인 좋은 때를 날려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위로보다는 격려를 나누는 사람, 서로 영감을 주고 열정을 북돋는 사람, 이웃 사랑을 위해 같이 좋은 일을 할 사람, 위의 목적을 위해 같이 책을 읽고 나누기를 하는 사람, 뭐 이런 사람들이 퍼뜩 떠오르는데 우리 신앙인이게는 오늘 마리아에게 엘리사벳과 같은 사람, 엘리사벳에게 마리아와 같은 사람일 겁니다. 

험담을 하기보다는 기도를 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자기에게 내린 은총과 주님의 구원 업적을 나누고 찬양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그저 친척 사이이기에 만난 것이 아니고,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서로 위로하기 위해서 만난 것도 아니고, 같이 특별하게 임신한 사이이기에 만난 것도 아니고, 요즘 젊은 엄마들처럼 태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보를 나누거나 친교를 나누기 위해 만난 것은 더더욱 아니고, 자신들 안에서 그리고 자신들을 통해서 이룬 구원 업적을 같이 찬양하기 위해섭니다. 

오늘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여기서 나눔을 그쳐야 하는데, 아무튼, 우리는 오늘 우리의 만남이 어떻고 또 어떠해야 하는지를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을 기해 돌아보는 날이 되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복은 알아보면 오고 알아보는 이에게 간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당신이 가야 할 곳을 택하실 때 성모님은 당신을 바로 알아볼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당시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알아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지구상에 엘리사벳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바로 엘리사벳에게 달려가셨습니다. 심지어 의인 요셉도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알아볼 눈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요셉 성인보다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저는 이 법칙을 “볼 줄 알면 온다”라는 법칙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왜 하느님은 아드님은 성모님 태중에 주셨을까요? 볼 줄 아는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지만 실제로 그 안의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명예, 돈에까지 해당하는 법칙이라 믿습니다. 

어쩌면 성모님의 사람을 가려서 만나는 것 아니냐고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이들은 사람을 가려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보물로 만들어주신 분을 위함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간다는 말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성체’를 두고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품은 우리 각자도 거룩한 성체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우리 안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2006년 필리핀에서 한 어부가 낚시하다 왠지 묵직한 대왕조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열어보니 씹다 만 껌 같은 허여멀겋게 보이는 무언가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부는 거참 희한한 게 다 있다며 그것을 침대 밑에 넣어두고 10년 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우연히 그것의 가치를 알게 된 어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 큰 진주로 최소 ‘1,000억’원을 호가하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조개가 그만한 진주를 만들려면 몇 년을 살아야 하는지조차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어부는 1,000억 원을 침대 밑에 두고 1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부라면 진주를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값이 많이 나가는 진주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와도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선물하는 것은 진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님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어떤 것을 선물하지 않으십니다. 

사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그냥 ‘열혈사제’에 나오는 정도일 것입니다. 드라마 열혈사제를 보고 신앙을 갖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있어도 이상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사제는 그냥 한 종교의 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이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에게는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생명의 빵을 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존재입니다. 

사제는 한정된 시간에 신자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야 할까요? 당연히 사제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제를 사제로 세워준 것에 대한 예의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방문함으로써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 하느님을 알아볼 이들에게 우선 다가가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야 하는 수준의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자신 안의 하느님을 믿게 할 성덕에 오른 사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이슬람 왕인 술탄을 찾아가 선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탄은 십자군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행동은 무모한 행동이었을까요? 술탄은 성 프란치스코에게만 이슬람 땅에서 선교를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성지들에 가톨릭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 그곳에 자기 형제들을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219년 프란치스코는 선교하기 위해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까지 가게 됩니다. 이 당시 십자군은 다미에타의 나일강이 범람하며 홍수가 나고 역병이 돌면서 그리고 양쪽 지휘자의 능력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서른일곱의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교황 대리 펠라조의 특사로 서른아홉의 이슬람 술탄 알 카밀을 만나 평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술탄과 그 백성들이 개종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과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피워 이슬람의 제사장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불에 타 죽으면 자신의 죄로 벌어지는 일이고 자신이 살아있으면 모든 이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힘이니 개종의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슬람의 제사장들은 두려운 얼굴을 하며 불을 등진 채 도망을 쳐버렸고 술탄 알 가밀은 손을 뻗어 프란치스코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죽든 살든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 알 카밀을 프란치스코의 용기에 보물을 주려 하였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고 청빈 서약을 한 프란치스코는 먼지인 양 재물을 무시하였고, 그것을 본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알 카밀이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프란치스칸은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며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인의 경지에 오르면 누구도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에게 프란치스코를 보내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군이 프란치스코를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능력을 알았기에 사마리아로 들어가면 당신의 파견이 허사가 될 것임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만 보내십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누구라도 주님을 믿게 할 자신이 없다면 그나마 자신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파견하신 것이고, 아드님은 교회를 파견하셨고, 교회는 바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알려질 때 분명 호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면 됩니다. 

우선 ‘성호경’으로 시험해 봅시다. 저희 동기 신부 아버님, 곧 가스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룻밤 사이에 몸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겪었습니다. 그 이후로 항상 성호경을 긋고 다니십니다.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아버님은 성호경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도 회개시키셨다고 합니다. 그중에 목사님도 네 분이나 있다고 합니다. 성호경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내가 먼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호경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다가갑시다. 이것은 가려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를 가치를 알아보는 이에게 주는 것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이와의 연결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지난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겨울을 보내고 날씨가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서 겨울옷들을 정리했습니다. 세탁소에 맡길 옷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때 제가 했던 행동이 있습니다. 혹시 주머니에 물건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주머니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빈 주머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옷에서 손에 잡히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돈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공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돈을 어떻게 써야 더 행복할까요? 
 
많은 이가 자신을 위해 쓸 때 더 행복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을 위해 쓸 때 행복감이 더 오래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을 위한 마음이 그 사람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 인간은 도저히 혼자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누군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됩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이와의 연결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이와 단절되는 혼자만의 삶보다 다른 사람과의 연결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그런데 문득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왜 방문했을까?’라는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그냥 막연하게 친척 언니를 찾아가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는 이날을 특별히 기념할까요?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협력하고 연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협력으로써 상대방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라는 것이지요. 
 
앞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모님도 엘리사벳 성녀와의 연결을 통해 큰 행복을 느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모의 노래’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어떤 말을 하는 사람에게 ‘상관하지 마!’라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를 죄짓게 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서로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처럼, 지금 우리가 연결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 연결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그들은 과정보다 큰 성취를 원하지. 하지만 변화는 작은 일의 성취가 모여서 이루어지는거야.

- 영화 ‘비포선셋’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 43)

 

무엇이 신앙의 기쁨인지를 다시 묻게 된다. 우리들에겐 이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낼 형제자매가 있다. 쓰러지지 않게 하는 기도가 있고 쓰러졌어도 다시 일으켜주는 나눔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모임이 되고 모임은 찬미가 되고 찬미는 살아있는 말씀을 향한다. 

번져가고 넓어져 가는 복음의 기쁨이다. 사람을 살게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사랑이며 믿음이다. 길을 내는 신앙이며 현실을 끌어안는 신앙이다. 실천으로 문이 열리고 이기심으로 문이 닫힌다. 참된 만남에 함께 하시는 머무름의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역사를 믿는다. 우리의 믿음은 만남과 방문을 통해 익어간다. 나눔 없는 신앙 만남 없는 말씀은 아픈 관계이다. 방문(訪問)을 잊어버린 우리들에게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서로를 반기고 함께 나누는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방문이 된다. 신앙의 기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함께 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찬미하는 기쁨이다. 오월의 계절에 함께 한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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