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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2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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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부활 제7주간 목요일 -

 

 

2022년 6월 2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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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주님의 성령을 보내시어 저희를 영신의 선물로 가득 채워 주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새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7장 20-26절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창영 이레네오 신부 집전

 

 

2022년 6월 2일 (목)
이창영 이레네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6월 2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주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세 차례에 걸친 험난한 전교 여정에 이어서 예루살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전한 바오로에게 주님께서는 이제 땅끝인 로마에 가서 당신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동시에 그에게 “용기를 내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위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힘을 주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 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 또한 아버지 안에 계시듯,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머물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노래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염원은 “제 안에”, “아버지 안에”, “우리 안에”, “그들 안에”, “저와 함께”와 같은 반복되는 표현들에서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주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죽음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고, 오늘도 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내주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십자가와 죽음, 성체와 사랑의 삶은 우리를 하느님과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과 일치의 하느님 안에 머물며 주님을 깊이 체험한 이는 이 좋으신 분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잘못된 사랑법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어제와 오늘 읽는 복음은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며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청하는 그 유명한 대사제의 기도인데 계속되는 청원 중의 하나가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입니까? 제 생각에 이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청 같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하나 되려는 마음조차 없습니다. 하나 되고 싶은 마음조차 없다는 말이고, 하나 되는 것이 오히려 싫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되는 것이 왜 싫을까요? 

첫째는 그 사람이 싫기 때문입니다. 싫은 사람하고 하나 되고 싶지 않은 것인데 그 사람이 싫은 이유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내 마음에 들이는 것이 내키거나 내키지 않는 것인데 좋아하는 사람은 내 집안에 들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들이지 않는 것과 같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가 되기 싫은 두 번째 이유는 이 자기를 버리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란 수 없이 많은 요소, 예를 들어 자기 취향, 자기 기호, 자기 입맛 같은 것들로 이루어졌고, 입맛도 자기 입맛이 있어서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먹기 싫습니다. 

그러니 자기 입맛을 버리면 뭐든지 먹을 수 있는데 프란치스코처럼 자기 입맛을 버리기 위해 음식에 물을 타거나 재를 탈 마음이 있으면 되는데 우리는 그 자기 입맛을 버리기 싫은 겁니다. 

이런 상태를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죄의 상태라고 했고, 나병 환자를 보는 것조차 싫은 것이 죄 중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좋고 싫음을 버리자 쓰디쓴 맛이 달콤한 맛으로 바뀌며 나병 환자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고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이고, 이 맛의 포기와 변화의 시점을 회개의 시점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 되기 싫은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사랑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미워하는 그런 사랑법 때문이니 우리는 이런 사랑법을 바꿔야 하는데 이 또한 좋고 싫음을 버리거나 초월해야 사랑할 수도 하나 될 수도 있음을 깊이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일치의 기술 : 영광을 보여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제 당신 제자들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된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 기도 목적은 오로지 그들의 ‘일치’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서는 ‘이름과 진리’를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신자들을 위해서는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

우리가 이 영광의 뜻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마지막 구절을 통해 보면 영광은 곧 ‘이름’,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당신께서 받으신 사랑의 영광, 곧 성령을 신자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분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을까요? 어머니에게 순종해도 잘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돈 벌어오는 분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옛날 정형화된 가정의 예입니다). 어쩌면 어머니에게 하는 그 순종이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순종하는 것에 머뭇거립니다. 이렇게 되면 형제들 간의 분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가정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됩니다. 

자녀들을 일치시키려면 어머니는 자신을 따르는 것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임을 인식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든 남편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에게 보는 영광입니다. 영광은 아버지에게서 오지만 어머니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광을 보면 아이는 편안하게 어머니에게 순종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싸우지 않고 일치합니다. 

직장으로 보면 이 영광은 리더가 가진 ‘법인카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인카드는 회사에서 팀원들의 일치를 위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준 영광입니다. 리더가 법인카드로 가끔 회식해 주거나 팀에게 필요한 것을 산다면, 팀원들은 그 리더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회사에 순종하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팀의 결속력은 강해집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인민군 장교가 동막골의 촌장에게 리더의 역할을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군대도 아닌데 동네 주민들이 촌장의 말에 순종하여 단합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뭘 잘~ 믹이야지!(먹여야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은 본래 하늘이 주는 것이란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리더는 팀원들의 먹고사는 것을 책임져 줄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더 데레사가 몇몇의 후원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주신 법인카드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필요한 때면 언제든 쓸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이 형제 자매들을 일치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께 순종하면 그것이 동시에 아버지께도 순종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자녀들은 계속 어머니 머리 위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영광을 찾습니다. 자녀들이 엄마의 머리 위에 아빠가 준 ‘영광의 관’을 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박효진 장로의 유튜브에서 선배 장로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시면서, “이제 천사가 왔으니 내가 갈 때가 되었나보다. 나가서 좀 봐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뭔가 보이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빨리 나가서 보라니까 뭘 그리들 꾸물대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집은 초가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초가집 지붕 위로 둥그렇게 불과 같은 형체들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지붕이 불에 타는 것 같았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처럼 불은 있지만 집은 태우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족 모두 이 광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고 아버지는 이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 보니 지붕 위에 있었던 천사들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받은 아버지의 자녀들은 서로 싸울까요, 아니면 사이좋게 지낼까요? 부모의 뜻은 언제나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 형제간에 싸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자녀들은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의 영광을 보고, 어떤 자녀들은 보지 못합니다. 그 영광을 보지 못할 때는 어머니의 말에 권위가 없어서 자녀들이 말을 안 듣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먼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 영광은 바로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또한 내가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십자가로 아버지께 순종하여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이 영광이 있는 한 교회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을 포기하면 분열합니다. 가톨릭이 아닌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교가 분열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영광을 교회에 주시고 그 교회를 통해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계속 드러내는 교회여야 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중략)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0.22)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은 안 변한다 vs 사람이 참 한결같다

 

사람들이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을 직접 듣게 된다면 기분이 좋을까요? 부정적인 특질에 대해 체념하는 듯한 표현으로 주로 쓰기에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참 한결같다.”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앞의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말과 다른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의 주인공이 자신일 때는 기분이 좋아지게 됩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긍정적인 특질을 바라보며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이지만 좋아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싫어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 생각과 달리 상대방이 다른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상대방 말을 오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히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조심해도 오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믿는 상대에 대해서 우리는 관대해집니다. 믿음이 깨졌을 때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 믿음이 굳게 세워져 있을 때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믿음의 관계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 믿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의 내용에는 믿고 있는 제자뿐이 아니라, 장차 모든 시대의 모든 장소에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 곧 교회를 이룰 사람들까지 기억하고 계십니다.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믿음의 관계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믿는 이들 모두가 굳은 믿음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제1독서를 보면, 바오로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런 사명을 전달해주시지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의 관계를 형성한 사람은 끊임없이 “용기를 내어라.”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에 희망을 만들어가면서 힘차게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믿음의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좋은 관계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불평불만만 던지지 말고, 먼저 믿어보십시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석수가 101번째 망치질로 바위를 깨뜨렸다면, 이는 101번째 망치질이 아니라 지금까지 두드린 100번의 망치질의 결실이다.

- 제이콥 리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 17,25)

 

깊은 마음은 깊은 사랑이다. 모든 기도의 시작은 사랑이다. 삶의 신비를 알려주는 사랑이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하느님을 사랑의 일치로 마음 깊은 곳의 그 간절함까지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계신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의 사랑이 삶의 씨앗이 되셨다. 우리의 기도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힘을 다시 삶에서 얻는 기쁨이다. 하느님의 위대하신 사랑의 힘을 다시 알게되는 예수님의 고백이다. 하느님을 모르기에 삶을 모르는 것이다. 사랑도 실재이고 삶도 실재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선물로 주시고 삶까지 선물로 주셨다.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는 일이다. 아버지 하느님을 아는 것은 우리 삶에서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알려주는 영광의 참된 여정이다. 아름다운 사랑은 아름다운 삶이며 아름다운 기도이다. 하느님을 알게되는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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