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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1/3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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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2022년 11월 30일 (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로마 10,9-18)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오늘 복음
    (마태 4,18-22)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30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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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간절히 비오니 일찍이 복된 안드레아 사도가 주님의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렸듯이 이제는 주님 곁에서 저희를 위하여 영원한 전구자가 되게 하소서.

 

 

복음
마태 4장 18-22절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강론

 

 

2022년 11월 30일 (수)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11월 30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믿음과 선포’라는 주제를 묵상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어부였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전합니다(1,40-41 참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믿음 선포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믿음을 전하며 주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믿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참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듣지 않고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데, 선포의 내용은 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사로운 내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믿음의 내용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전해 준 신앙의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우리도 후손들에게 믿음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복음화의 방법은 삶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 중매쟁이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안드레아 사도는 제게 구약의 아론과 같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론이 형제간이면서 영도자 모세를 조용히 보필했던 것처럼 안드레아도 사도들의 대표인 형을 조용히 보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단 안에서 역학관계입니다.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주님의 첫 제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중요한 사건 때 그러니까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타볼산 변모 때,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주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다른 세 사도는 주님과 함께였지만, 안드레아는 거기에 끼지 못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안드레아는 이렇듯 중요한 역할에서 벗어나 있음은 물론 많이 등장하지도 않았고 요한복음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닙니다. 

이런 역학관계 안에서 안드레아는 열등감을 느낀다거나 소외감을 느껴 주님께는 반감을, 세 사도에게는 시기 질투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럴 수도 있었음에도 안드레아는 그러지 않았음을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모두 영적 중매쟁이의 역할입니다.형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첫 제자가 될 때 주님을 먼저 따라가 본 것은 안드레아였고, 주님 계신 곳을 보고 와서는 베드로를 주님과 연결해 줍니다. 

다른 두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소년이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를 주님께 연결하고, 그리스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러 왔을 때 연결한 것은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신 후에도 안드레아는 앞에 나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형을 주님께 인도하고 옆에서 도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리던 구도자였고, 메시아를 만났을 때는 그분을 자기만 독점하지 않고 형과 다른 제자들과 나누는 영적 사랑의 소유자였고 중매쟁이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오병이어나 그리스 사람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소년의 오병이어를 주님 앞에 가지고 왔을 때 그는 이것이 그 수많은 사람에게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소년과 함께 주님께 가지고 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주님께는 소용이 있음을 알고 소중히 여긴 그입니다. 

작은 자를 내치지 않고 끌어안고,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고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능성을 보고 소중히 여긴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작은 역할이지만, 영적인 중매의 중요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인간적으로 보면 무시할 수도 있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주님께서 소중히 쓰시도록 연결한 그의 영적인 사랑을 본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창조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지만 형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과 사람을 잡는 일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무슨 차일까요? 물고기 잡으며 그냥 살면 되지 않을까요?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존엄성, 혹은 나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에게 사람이 물고기가 아닌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다 존중받고 싶습니다. 귀하게 여겨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정말 인간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엄할까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누가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적어도 나라는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가 국민을 존엄하게 보았을까요?

2022년 10월 28일 금요일 밤 10시에 방송된 KBS1 TV ‘시사 직격’이란 프로에서 ‘3천 달러의 삶 – 해외 입양 잔혹사’라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입양은 우리나라에서 부모를 찾을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 입양되지 않는 아이들을 외국에서 찾아와서 아이들을 살펴보고 데려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60년간 약 25만 명의 아동이 마치 물건처럼 외국으로 팔려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냥 70~80년대는 특별히 더 나라에서 달러가 필요했고 입양기관도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경찰서에 길을 잃어 맡겨지는 아이들은 부모를 찾을 기회도 주지 않고 거의 해외로 입양 보냈다고 합니다. 마치 현재 인터넷 쇼핑하듯 외국인들은 서류상으로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팔려 간 아이들의 존엄성은 이미 포기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에 최근 어린 시절 해외로 입양된 한인 입양인들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모여들었습니다. 덴마크를 주축으로 미국, 벨기에 등 여러 국가에서 모인 이들은 자신의 해외 입양 과정에서 강압, 뇌물, 문서 위조 등의 불법 입양 양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인권침해와 국가개입 여부의 진실을 밝혀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고아가 아닌데도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문서를 위조하여 3천 불을 받고 보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인신매매이고 그 이상의 범죄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우편 배송 아기’라 불리는 이 대리입양 시스템이 한국의 해외 입양률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의 입양 적격성 심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입양아동을 폭력, 학대 등의 위험에 노출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아이 수출국 최상위 국가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인권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입니다. 

물론 입양 가서 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사진만 보고 서류 한 장으로 물건처럼 아이를 사 온 부모가 아이의 인권을 존중해줄까요? 여기에서 1984년 초등학교 6학년 때 프랑스로 입양된 김유리 씨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폭력의 노예로 성장해야 했습니다. 부모를 고발하고 올해 초 입양서류를 확인하던 중, 자신이 호적상 ‘고아’로 기재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친부모의 이름과 한국에서의 삶을 모두 기억하기 충분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유리 씨가 받은 입양서류 속 친부모의 이름은 모두 ‘무명’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의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잠시 보육원에 아이들을 맡겼던 것인데 보육원은 그런 아이들까지도 다 고아로 서류를 위조해서 팔아버린 것입니다. 해외 입양률이 정점을 찍은 1980년대에는 출생아 중 1%가 넘는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었고, 이는 일종의 민간외교 정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김유리 씨는 아예 성적 욕구를 풀려고 자신을 입양하려고 한 양부와 이를 묵인한 양모에게 자신을 성적 노예로 넘겨버린 나라와 입양기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건 아동 인신매매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 입양 수수료를 낸 목적은 아이를 물건처럼 사서 자기 성적인 욕구를 푸는, 아이가 그런 물건이 되는 것을 바랐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다시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합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존엄성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자기를 존엄하게 여겨주는 대상 안에 속해 있어야 존엄합니다. 만약 돈을 좋아하는 나라나 성적인 욕구에 빠진 양부에게 맡겨지면 그 존엄성은 짓밟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엄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을 존엄하게 보아주는 대상은 그 창조자뿐입니다. 인간에게는 부모입니다. 왜냐하면 자녀에게 자신의 살과 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종교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물고기로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어렸을 때 길을 잃어 남의 집살이 하던 10년간 학교도 가지 못하고 종처럼 일하면서 존엄성을 잃었습니다. 일하며 매도 수없이 맞았고 일한 값도 한 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짓밟은 그 집이 아주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습니다. 천주교를 믿는다고 사람을 존엄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도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냥 어쩌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물고기 대신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우리 존엄성을 보장해주실 수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세상 누구에게 의존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만든 사람만이 그 만든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그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좀처럼 이런 인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믿을수록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없는 나라가 됩니다. 생존, 곧 돈에만 집중하며 인간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나를 만든 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려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창조자이심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생존을 위해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웃을 살게 하는 창조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창조자가 되라고 하신다면 우리도 창조자의 자녀란 뜻입니다.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여 하느님 자녀로 만드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 속하였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내가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은 내가 창조자의 일을 할 때 더욱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여자들을 사랑할 때는 ‘한 여자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존재’라는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창조자의 협력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스스로도 이렇게 큰 자존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느끼는 자존감이고 그 사람이 갖는 존엄성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기를 피조물이라 여기는 한 우리를 존엄하게 보아주지 않습니다. 나도 하느님과 같은 창조자가 되었음을 믿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을 물고기로 봅니다. 자신을 창조자의 자녀라 믿는 이들만 창조자의 존엄성에 참여하고 창조자답게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이 창조자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창조자로서 창조자와 함께 사랑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신에게 쓸모없다고 말하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아이에게 “너는 쓸모없어.”라고 계속 말하면,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도 쓸모없다고 말하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고 하더군요. 
 
쓸모없다는 말은 어떤 행동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을 때 듣게 됩니다. 문제는 그 한 번의 일로 쓸모없다고 단정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부분을 보고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잘못입니다. 이 잘못에 누군가의 삶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빠다킹 신부의 맘고생크림케이크’라는 평화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촬영은 모두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서 합니다. 공개 방송이라 누구나 함께할 수 있지만, 평일 오후의 촬영시간이 부담되는지 또 텔레비전에 자기 얼굴이 나올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오시는 분이 늘 적습니다. ‘많이 오시면 더 힘내서 할텐데...’라는 마음만 간절합니다. 그러나 만약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냥 벽보고 강의한다고 생각하자, 적은 수라도 자리를 채워주시는 그분들이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영광이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 역시 이렇게 신부가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가 있게 주님께서는 만드십니다. 
 
성 안드레아 축일인 오늘, 그의 부르심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의 형 베드로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목직을 받고 흔쾌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죽음의 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성인 역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떠올린다면, 세상의 가치는 모두 이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서 주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나를 쓸모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부르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가 이미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잊히지 않을 만큼 슬프다.

- 시드니 해리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삶이 있는 곳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시고 사람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소박한 어부(漁夫)인 안드레아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가십니다. 부르심은 만들어가는 사랑의 벅찬 여정입니다. 사람을 낚기 위해 아끼던 그물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여정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따름이라는 과거의 그물까지 버리는 행위입니다. 이와 같이 버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 없이 따를 수 없고 사랑 없이 이어질 수 없는 부르심의 숨 가쁜 현장입니다. 

신앙의 이야기는 열매를 맺는 감사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부르심과 응답의 치열한 관계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풍랑처럼 요동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사람을 낚으면서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여정은 사람이 되어가는 창조의 아픔입니다. 낚이는 아픔 건져 올려지는 두려움을 거칩니다. 부르심의 길은 사람으로 시작하지만 사람이 아닌 하느님과의 힘겨운 내려놓음과 버림의 반복입니다. 하느님으로 가득찬 행복은 집착하고 있는 그 그물마저 버리고 따르는 행복입니다. 

사람을 낚고 사람을 건져 올리는 성 안드레아 사도의 치열한 내적 행복을 만나는 기쁜 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버리고 낚이고 건져 올려지는 사랑과 아픔이라는 성장의 여정입니다. 성장의 그 이름 값진 신앙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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