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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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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2022년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 26,1-6)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 오늘 복음
    (마태 7,21.24-27)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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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님, 주님의 권능을 떨치시고 그 크신 힘으로 저희를 도우시어 자비로운 은총으로 저희 죄를 없애시고 어서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복음
마태 7장 21절, 24-27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강론

 

 

2022년 12월 1일 (목)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12월 1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집을 짓는 방법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산상 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7장 13-27절 가운데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스승으로서 부르심에 응답하여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파견될 것입니다(10장 참조). 파견된 이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배움은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은 집 짓는 사람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의 뜻을 지닌 두 개의 형용사 ‘슬기로운’과 ‘어리석은’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짓는 두 사람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 집은 강물과 바람의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집은 강물과 바람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수사학적 방식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의 심판을 경고하시며, 또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결정을 내리도록 호소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을 얻기 위한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결심한 우리에게 용기 있는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상을 받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앙인이 되다 만

 

오늘 독서 이사야서의 첫 구절은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입니다. 그리고 당신 백성 보호하시려고 하느님이 성벽과 보루까지 세우셨다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이 성읍이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견고한 성읍이라도 그 안에 들어가야 보호받을 수 있기에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해야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 또는 요건은 무엇이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 성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과 요건에 대해서 오늘 독서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며, 오늘 복음은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는 사람이란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은 자기를 믿는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지요. 

저의 경우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저를 믿는 구석이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두지 않음은 물론 하느님께도 신뢰를 두지 않고, 저를 믿는 편이었고, 자신감이 넘쳐서 자신만만한 편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 자신감이 점점 쪼그라들어서 자신만만하지는 않고,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하느님 믿음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는 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문제는 자신을 믿기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문제이고, 오늘 주님 말씀대로 입으로는 “주님, 주님”하면서 하느님 뜻을 실천치 않는 겁니다. 

이면에서는 옛날의 제가 더 솔직하고 진실했습니다. 옛날의 저는 30대 중반까지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이 오글거려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 나는 종이 되어야 하고, 종이라면 주인이신 하느님 말씀대로 다 실천해야 하는데 내가 그런 종이 되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거지요. 

그러나 이제는 제가 주님의 종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주님 뜻대로 하는 것보다 제 뜻대로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Excuse me”하면서 우리말로는 “죄송합니다.”하면서.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저는 신뢰는 하면서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니,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불의한 사람이라 해야겠고, 오늘 복음에 비추어 볼 때는 믿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 해야겠지요. 

의로운 사람이 되다 만, 신앙인이 되다 만 사람이 저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이 쉽게 무너지는 사람의 특징

 

오늘 복음은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래 위의 집처럼 무너진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많은 신자가 냉담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냉담한 이들은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뜻, 곧 사랑의 실천에 목적을 둔 신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목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해서 죄송스럽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고생하며 자란 집들은 다 천주교 신자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머니를 형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용했고 그래서 어머니는 한 집은 탈출해야 했으며 한 집은 집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한 불쌍한 길 잃은 아이를 그렇게 이용하고 차별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머니가 가족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길에 쓰러진 강도 만난 사람이 형제로 보였다면 사제나 레위인이나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오직 사마리아인만 이 그를 형제로 보아주었습니다. 형제로 보이지 않으면, 가족으로 보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휴가 때 놀러 가다 체험했습니다. 저도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는 해 주었지만, 그분과 함께 있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그 사고 당한 사람이 가족으로 보였다면 그렇게 했을까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강론을 수백 번 해도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지를 않습니다. 가족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은 이상한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한 재벌가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충성하던 주인공이 그들에게 배신당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죽게 된 주인공은 죽는 순간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 재벌 집 넷째 아들 손자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래 일을 알기에 많은 돈을 벌고 재벌에 복수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요? 

주인공은 I.M.F. 때 아버지가 정리해고되어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사망하게 된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상관도 없는 옛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갑니다. 가족들은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압니다. 이전 생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였음을. 그는 가진 재산 전부를 내어놓으며 망해가는 아버지 회사를 매입하려 합니다. 이것이 복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기억만으로 지금은 남의 식구가 되어있고 아무 상관도 없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주인공의 선택은 우리 모두의 공감을 얻습니다. 누구나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의 부모였다는 기억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든 사람이 가족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겠습니까? 이 드라마처럼 ‘기적’을 통해서입니다. 그 기적은 미사 때 ‘성체성사’로 일어납니다. 성체성사를 믿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둔 한 형제들이 됩니다. 

말로만 형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진짜 형제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창조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또한 나의 형제들이 됩니다. 그분한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체성사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십계명이 지켜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다면 성체가 아니면 이는 불가능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냉담을 한다면 이는 그동안 신앙생활의 목적이 사랑의 실천이 있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다 자칫 사랑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빠질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정치적으로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해서 큰 파장을 일으킨 성직자도 있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런 신앙의 길로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을 사랑 실천이라는 암석 위에 세웁시다. 그러면 우리가 짓는 신앙의 집이 결코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 6가지

 

‘행복의 문을 여는 193가지 이야기’라는 책에서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완벽주의는 불행하다. 그는 모든 걱정을 껴안고 인생을 살아간다. 
 
2) 항상 남과 비교하려 한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경쟁심은 평안을 앗아간다. 
 
3) 자기 자신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고독하다. 
 
4) 작은 일에 신경을 집중시킨다. 이런 사람의 표정은 항상 불만과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5) 매사에 의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6) 이웃을 위해 절대로 사랑과 물질을 베풀지 않는다. 한번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밖으로 나올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더 많은 것을 간직하면서 풍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풍요로움’ 대신에 ‘빈곤함’만 가득하게 됩니다. 사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혼자만 남게 되고, 그래서 힘든 시간을 계속해서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어려움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 주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만의 사랑이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한 사랑. 그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이 세상 안에서 많은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향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냐고 항의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면 무너지고 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실행하면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사람이 되어서 어떤 시련과 고통도 거뜬하게 이겨내게 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앞선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만드는 열쇠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의 생명은 둘도 없이 귀중한 것인데도,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이 생명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진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 생텍쥐페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삶이 있는 곳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시고 사람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소박한 어부(漁夫)인 안드레아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가십니다. 부르심은 만들어가는 사랑의 벅찬 여정입니다. 

사람을 낚기 위해 아끼던 그물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여정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따름이라는 과거의 그물까지 버리는 행위입니다. 이와 같이 버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 없이 따를 수 없고 사랑 없이 이어질 수 없는 부르심의 숨 가쁜 현장입니다. 

신앙의 이야기는 열매를 맺는 감사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부르심과 응답의 치열한 관계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풍랑처럼 요동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사람을 낚으면서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여정은 사람이 되어가는 창조의 아픔입니다. 낚이는 아픔 건져 올려지는 두려움을 거칩니다. 부르심의 길은 사람으로 시작하지만 사람이 아닌 하느님과의 힘겨운 내려놓음과 버림의 반복입니다. 하느님으로 가득찬 행복은 집착하고 있는 그 그물마저 버리고 따르는 행복입니다. 

사람을 낚고 사람을 건져 올리는 성 안드레아 사도의 치열한 내적 행복을 만나는 기쁜 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버리고 낚이고 건져 올려지는 사랑과 아픔이라는 성장의 여정입니다. 성장의 그 이름 값진 신앙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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