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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1/2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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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2022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 11,1-10)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

  • 오늘 복음
    (루카 10,21-24)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2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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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 하느님, 저희의 간청을 자비로이 들으시어 시련을 겪는 저희를 인자로이 도와주시고 이 세상에 오시는 성자께 힘을 얻어 다시는 옛 악습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복음
루카 10장 21-24절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9일 (화)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9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성자에게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성자의 기쁨과 성부께 올리는 성자의 기도 안에 성령께서 개입하심을 드러내는데,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밀한 관계를 전제합니다.

한편 본문에는 “철부지”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본래 ‘아이’, ‘미성년자’, ‘미숙한 자’를 뜻하지만, 더 나아가 ‘교육받지 못한 이’, ‘지혜를 갖추지 못한 이’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면 성자께서 성부께 감사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철부지’ 같은 일흔두 제자가 전한 복음을 ‘철부지’ 같은 이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성부께서 베푸신 은총의 결과입니다. 

성자께서 성부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감사 기도 안에는, 세속적 기준으로 턱없이 모자란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선의와 은총을 베푸셨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성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부의 계시와 은총이 바로 ‘철부지’ 같은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 메시지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3장 16절의 행복 선언은 그 내용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한정됩니다. 반면 루카 복음 10장 23절은 행복 선언의 대상을 확대 적용합니다. 곧 구약 성경의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짐으로써 더 이상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의 중요한 주제인 ‘보편적 구원’이 실현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철부지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격 미달’인 우리도 은총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얼마나 공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떤 메시아를?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얘기합니다. 이 이사야서를 읽다가 저는 문득 메시아가 어떤 분이시길 사람들이 원할까 생각게 되었습니다. 

능력의 메시아? 어제 백인대장의 청을 받아들여 종을 고쳐 주신 주님처럼 내가 아플 때 그리고 내가 청할 때 언제든 고쳐 주시는 메시아? 

사랑의 메시아? 고쳐 주시지는 못해도 손을 얹어주시는 메시아? 고쳐 주시지는 못해도 손을 얹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평화를 주시는 메시아? 다른 건 다 없어도 마음의 평화만 있으면 되니, 다른 건 안 주셔도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메시아? 

이런 메시아가 내게는 좋은 메시아겠지만 이런 메시아가 진정 메시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이 이런 메시아이기를 거부하실 겁니다. 나만을 위한 메시아이시기를 거부하실 것이고, 나만을 위한 메시아는 메시아도 아니실 겁니다. 

능력의 메시아도 맞고, 사랑의 메시아도 맞고, 평화의 메시아도 맞지만 나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메시아라고 오늘 이사야서는 얘기합니다. 

그래서 먼저 정의의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메시아는 정의로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평안과 다릅니다. 평안은 나의 안정과 안전을 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얻어지는 것이기에 차라리 나 혼자 있을 때 평안하고 많은 사람이 이런 평안을 추구하고, 그렇지만 그런 평안을 깨지기 십상이며 그런 평안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평화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고 관계적이어야 합니다. 평안을 위해 관계를 피하고 배제하는 평화가 아니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평화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평화입니다. 

좋은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고, 평화도 인간끼리의 평화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짐승 사이의 평화, 짐승과 짐승 사이의 평화까지 모든 평화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평화는 모든 평화이고 메시아의 사랑도 모든 사랑입니다. 메시아는 나만을 위한 사랑은 하실 수 없고 , 평화도 나만을 위한 평화는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이런 메시아를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나는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너희는 성령으로만 기뻐하여라.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를 마치고 많은 성과를 내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니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 기쁨의 원천이 성과가 아닌 성령이어야 함을 우리는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복음을 전하면서도 ‘업적 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의 기쁨을 성과에 두는 것입니다. 이런 때의 특징은 1. 숫자에 집중한다, 2. 아랫사람을 다그친다, 3. 기도 시간이 줄어든다로 들 수 있습니다. 

한 대전의 개신교 목사님이 10년 동안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도원에 들어가서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예수님,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아무리 해도 신도가 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목사님은 억울해하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제가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신도가 많이 늘었다면 너의 신도가 는 것이냐, 나의 신도가 는 것이냐?”

우리는 그저 그분의 종일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이전 신자들의 숫자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복되지 않는 것을 볼 때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우울해집니다. 이렇게 숫자에 집중할 때 성령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소식을 듣고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특별히 행복을 자녀에게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의 자유를 빼앗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재 발굴단에서도 아이들은 어머니의 강요에 혼자 방에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서도 숨이 턱 막히는 엄마의 공부 강요와 꾸중 때문에 혼잣말을 계속해서 하는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예쁜 아이인데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엄마는 다 자기를 위해 해 주는 관심인데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딸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결국엔 세상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다가는 공허함만이 남고 후회만이 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어떤 기쁜 일이 있을까?’라며 우리는 여전히 기쁨의 원천을 밖에서 찾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기쁨의 원천을 성령께 두어야 합니다. 

저도 새로 온 본당에서 사목하며 신자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강요와 설득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자유는 건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유는 자존감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강요받으면 자존감이 줄어듭니다. 신앙도 결국 하느님 자녀라는 자존감을 올려주는 것이기에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는 어떤 성과도 교회적이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학원은 보내면서 미사는 빠져도 괜찮게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밥을 주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는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때 신앙을 먼저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부모는 자녀 때문에 우울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은 성령으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부시켜봐야 결국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시켜놓고 무엇을 하셨을까요? 하.사.시.에 보면 제자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극기하시며 혼자 기도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분은 그 기도 덕분으로 성령으로 가득 차서 기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도 정해놓은 기도 시간을 일 때문에 줄이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 시간을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쁨임을 믿는다면 적어도 대죄는 짓지 않고 기쁨으로 살 수 있는 정도의 기도 시간은 내가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그 기도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성령이 기쁨임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살 때 어떤 때가 제일 기뻤을까요? 

부모님께서 하라고 가르치시는 대로 했는데 일이 잘되어 기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하라고 해서 잘하고 다녔는데 정말 인사성 밝다고 칭찬받았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말씀을 통해서도 받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노트 한 권씩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를 살 말씀의 양식을 먼저 적게 할 것입니다. 한 문장이면 족합니다. 성경 말씀이면 좋고 하.사.시. 혹은 기도하다 떠오른 말이나 유튜브를 보다 느낀 말도 좋습니다. 그 한마디를 적고 하루 동안 되새기며 살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기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았을 때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때 행복합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래서 한 말씀 쓴 다음 밑에다가는 감사일기를 쓰게 할 것입니다. 결국 은총은 감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물론 강요할 마음은 없지만, 잘하면 상을 주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성령으로 기쁨을 느끼며 살도록 해 주어야 하는 사제의 몫인 듯싶습니다. 모든 기쁨은 성령에게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 서비스 기업인 ‘구글’의 뉴욕 사무실에는 간식 휴게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식 휴게실로 인해 직원들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말이 많아졌습니다. 휴게실에는 각종 초콜릿을 비롯한 견과류, 쿠키, 과자, 맥주 등이 잔뜩 있는데, 직원들은 물 한 번 가지러 왔다가 간식을 한 움큼 집어 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직원의 몸으로 나타났습니다. 허리둘레가 늘어났고, 체력은 떨어져 갔습니다. 
 
간식 담당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간식인데, 오히려 건강이 안 좋아지니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걱정이 커졌습니다.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간식 담당자는 간식 위치를 바꿨습니다. 직원의 눈높이에 간식이 있어서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눈높이 선반에는 생수를 놓고 설탕이 들어간 탄산수와 초콜릿 등의 간식은 냉장고 아래나 반투명 유리 뒤에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위치를 바꾸고 7주가 지나자 직원들이 생수만을 주로 가져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허리둘레를 늘려주는 초콜릿이나 탄산수의 소비량이 엄청나게 줄어들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상이 달라지자, 행동도 변한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을 보는 사람은 자기 행동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에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세상 안에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 제자를 비롯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시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간이 가까울수록 구원의 열쇠를 들고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르는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일상 안에서 알아보고 있을까요? 아니 주님을 잘 바라볼 수 있도록, 내 눈높이를 맞추고 있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이사 11,2)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말을 들으려고 주님을 보지 않는 어리석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의 길에 가까워지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을 자세히 보면 할 말이 많아진다. 자기 삶이 자세히 보인다. 그 일상을 구체적으로 쓰면 글이고, 그리면 그림이다.

- 김용택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가난함도 우리의 부족함도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신비입니다. 가난함도 부족함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이 됩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깨닫는 삶 또한 우리의 가난함과 부족함입니다. 

가난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의 삶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는 신비의 맑은 눈높이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부족한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며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을 아드님에게 넘겨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로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의 실천으로 예수님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행복이란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받아들임의 기쁨입니다. 무엇을 받아들여 할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사랑과 나눔의 인격을 보는 기쁨 또한 관계로부터 주어지는 관계의 신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보려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관계의 아픔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가난함과 부족함을 통해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의 가난함과 부족함 안에 행복이 탄생하길 기도드립니다. 행복은 사랑의 탄생인 가난함과 부족함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을 향하는 행복입니다. 막을 수 없는 신비 거스를 수 없는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는 대림시기의 기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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