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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1/24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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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2022년 11월 24일 (목)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묵시 18,1-2.21-23; 19,1-3.9ㄱㄴ)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 오늘 복음
    (루카 21,20-28)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24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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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만물의 기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 복된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기까지 성자의 십자가를 충실히 따르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전하며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복음
루카 21장 20-28절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주형 세례자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4일 (목)
이주형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4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복음화의 탁월한 도구이다.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멸망 예고는 세 차례 등장하는데(19,43-44; 21,20-24; 23,28-31 참조),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두 번째 예고입니다.

마태오 복음(24,15-21 참조)과 마르코 복음(13,14-19 참조)의 병행 구절에서는 묵시 문학적 문체를 사용하며 종말의 대환난을 집중적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 파괴를 역사적 사건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신학에 따르면, 이는 메시아 임금,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최종 심판의 예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에만 한정되어 있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시작점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뻗어 나간다는 ‘보편적 구원’의 주제를 다룹니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라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이제 유다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만백성에게 선포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집중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보편적 구원’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널리 선포되고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복음화의 탁월한 도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늘정신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황폐해질 때가 올 텐데 그날은 징벌의 날이면서 속량의 날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어제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황폐해지는 것이, 징벌이 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속량이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황폐해지는 것이 징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 황폐해지는 것이 속량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던 사람, 이 세상을 자기의 영원한 거처로 삼던 사람, 하느님이 이승과 저승의 영원한 주인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 멸망이 하느님의 징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 멸망이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되지 않고 그저 세상이 황폐해졌다고 생각될 겁니다. 

실은 그래서 이 사람들이 징벌을 받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 곧 이 세상이 황폐하게 된 것이 자기들의 잘못 때문이고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릴 것이고, 하느님을 향하여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속량을 받습니다. 속량은 거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죽음으로써 속죄한다고 우리는 흔히 말하는데 죽음으로 속죄하려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오히려 살려주십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징벌이나 하러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처음 육화하신 분이 징벌이나 하러 다시 오실 리가 없습니다. 육화를 완성하려고 재림하실 것이고, 그것이 속량입니다. 

이런 주님께 우리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기만 하면 됩니다. 뱀처럼 교만하게 머리를 쳐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허리가 꺾여 땅만 쳐다보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라는 말입니다.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기가 꺾일 대로 꺾인 사람이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이 세상이 망할 때 이제 더 이상 세상은 향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을 향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탈출하고 산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예루살렘은 성전의 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진 세상이고, 산은 늘 하느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세상이 망했다고 허리가 꺾여 옴짝달싹 못하고 꿩처럼 머리 처박고 있지 말고, 얼른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하느님 계신 산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망해도 정신 차려야 합니다. 아니 그럴수록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하늘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적들에게 둘러싸인 예루살렘엔 들어가지 마라.

 

오늘 복음도 역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산으로 달아나고 시골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산이나 시골은 오늘 복음에서 반대 의미로 사용됩니다. 마지막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땅에서는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망하기 직전 세상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것입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망하기 직전 예루살렘과 같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같이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을 알아보는 길은 그 사람의 감정입니다. 망하려고 하는 사람은 까무러칠 정도로 절망하고 두려워할 것인데 그것이 절망적이고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할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공유하는 감정이 두려움과 절망의 감정이라면 나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어리석은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평화 속에 계셔야만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흔들리시기 때문입니다. 일단 내 마음의 평화를 깨는 사람이라면 만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상대의 감정에 휩쓸려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하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도 그렇게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적들에게 둘러싸인 사람 안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도의 한 부부는 작은 발단, 곧 남편이 차를 마시려고 넣어둔 돈 20원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의 나쁜 감정 안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단 누군가 만나서 내 감정이 요동친다면 그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상대도 변해야 하고 나도 변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집 놔두고 12년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산 여인’이 올라와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다 떨어진 비닐하우스에서 12년 동안 노숙자처럼 사셨습니다. 그런데 30미터 옆에는 새로 지어진 깨끗한 자기 집이 있고 남편이 마련해 준 별채도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그 집에 들어가시기를 거부하시고 고생하고 계신 것입니다. 

원인은 이렇습니다. 할머니가 지내시는 비닐하우스는 새집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는 동안 임시로 가족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런데 새집이 지어졌는데도 그곳에 계속 머물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남편도 설득하다 지쳐서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말도 안 하고 담을 쌓고 12년 동안 살았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마음이 토라진 것은 남편이 시어머니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2년 뒤에 새집을 짓자고 했는데 남편이 어머니의 뜻대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해서 할머니가 더 난처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아기를 낳느라고 몸이 안 좋아졌는데 그것에 대해 뭐라 하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편까지 그러니 모두 싫어진 것입니다. 

제작진은 남편과 이야기하여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 붉은 꽃임을 알아내고 별채를 붉은 핑크빛으로 새로 개조해서 시어머니의 기억이 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음식을 해서 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렇게 별채에 들어와 본 아내는 깜짝 놀랍니다. 남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년 만에 별채에서 잠을 자 보기로 합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저는 남편이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12년 동안 집에 안 들어오시고 뭐가 불만인지 말도 안 하는 아내를 지척에 두고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내와 말다툼해봐야 자신의 감정만 더 상할 뿐입니다. 그때는 아직 아내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미움과 원망이라는 적들에 의해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들어가면 남편도 죽습니다. 그러니 떨어져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제 제작진들에 의해 상담받고 아내의 적들도 조금은 약해졌고 남편도 아내의 불만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아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만나니 아내는 이제 남편의 집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사람을 어디까지 만나야 하고 어디에서 헤어져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항상 감정을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감정이 상대의 감정 때문에 흐트러지고 상대의 감정을 따라간다면 당장 그 관계에서 나와야 합니다. 산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시골은 원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머물며 내가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사람으로 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도우심으로 힘이 생기고 상대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내가 상대를 바꿀 수 있다고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나도 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먹혀서 나의 감정, 곧 성령의 열매를 소진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성령의 불을 끄는 일입니다. 가라앉는 배에 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좋은 남편의 공통점 세 가지.

 

심리학자 베르가드는 남성 7,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끝에 좋은 남편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찾았습니다. 
 
첫째, 침착하다. 다툴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갈등을 대강 끝내지 않는다. 
 
둘째, 성실하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약속을 꼭 지킨다. 
 
셋째, 안정적인 삶을 중요시한다. 
 
어떻습니까? 이 글을 보신 남편은 자기 자신이 ‘좋은 남편’인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이 좋은 남편의 기준으로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자기는 다르다면서 거부하겠습니까? 혹시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남편’이라면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이에게는 엄격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위의 세 가지 좋은 남편의 공통점은 결국 아무렇게나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자신의 진정한 성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나의 불행이 아닌, 나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도 계속 우리에게 좋은 사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말고 ‘남’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 순간에는 손해 보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엄청난 선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환난에 대해 계시해주십니다. 하느님 분노의 날은 곧 닥쳐올 것이고, 그날에 예루살렘은 짓밟힐 것이며,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거나 포로가 되어 다른 나라에 잡혀갈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나 이렇게 끔찍한 종말의 메시지가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해주십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또다시 ‘사람의 아들’ 모습으로 와서 선택된 자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의해 우리는 구원될 수 있습니다. 단, 주님을 거부하고 악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될 때만 끔찍한 종말의 세계에서도 주님을 통해 구원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 특히 주님께서 간절하게 원하시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선물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새는 궁하면 아무거나 쪼아 먹게 되며, 짐승은 궁하면 사람을 헤치게 되며, 사람은 궁하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

- 공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을 마침내 이루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을 실현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 여정입니다. 영원한 것은 영원하지 않는 것을 내려놓을 때 확연히 드러납니다. 화려함도 우쭐거림도 거만함도 모두 사라져 갈 것들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성전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아우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이며 말씀은 관계이며 말씀은 사랑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끝내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관계를 통해 관계를 이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되시어 사람들을 속량하십니다. 구원은 존귀함의 또 다른 체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십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표징도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속량의 표징들입니다. 공포와 두려움 불행과 황폐함도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욕망의 그림자만을 쫓았던 우리들이 사랑의 참된 실체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올 한 해를 통해 우리가 만난 하느님께서는 어김없이 기다림을 통한 속량 인내를 통한 속량 용서를 통한 속량을 우리들에게 베푸셨습니다. 무너지고 허물어져야 할 것은 우리들의 교만과 이기심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속량은 새로운 삶의 변화입니다. 더 깊어지고 더 새로워지는 우리 삶의 변화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다시 사랑을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속량이며 사랑의 순리입니다. 역행하지 않고 순리를 따르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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