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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1/2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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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 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2022년 11월 22일 (화)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묵시 14,14-19)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1,5-11)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2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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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복된 체칠리아를 기리며 해마다 기쁘게 지내게 하시니 교회가 전하는 그의 모범을 저희가 충실히 본받아 성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게 하소서.

 

 

복음
루카 21장 5-11절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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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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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2일 (화)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2일 (화)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재난에 관한 예고입니다. 이 내용이 우리의 신앙 여정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17; 2코린 6,16 참조)이라는 관점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는 때때로 귀가 얇아져 하느님의 뜻에 머물기보다 다른 가치들을 더 중요시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 돈, 자녀 교육은 일상생활에서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고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닥쳐올 재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경기 침체, 전 세계를 둘러싼 절망적인 상황과 정세 때문에 세상이 당장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나라가 오고, 그분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실현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것(루카 21,19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푸라기에 속아 지푸라기를 잡지 않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지요. 잡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다급하면 다 이렇게 지푸라기에 속아 붙잡게 되는 것인데 그 다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위급한 상황이 코앞에 닥쳤는데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진다든지 죽음이 코앞에 와있는데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든지 할 때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를 잡지 않으려면 수영을 미리 배워둔다든지 붙잡을 것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평소 위급한 상황에 대한 대비가 늘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대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준비일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위급한 상황이 갑작스럽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당황하여 허둥지둥 대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대처할 것이며, 그래서 지푸라기를 붙잡지 않고 나를 구해줄 것을 붙잡을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허둥지둥하다가 지푸라기에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 참으로 지푸라기들이 많고,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하느님 대신 지푸라기를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점쟁이가 지푸라기이고, 어떤 때는 사이비 종교인이 지푸라기이며, 병들었을 때는 의사조차도 지푸라기일 수 있습니다..하느님이 아니라면 사실 그 무엇도 지푸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지푸라기를 하느님인 양 잡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멸망의 표징과 부활의 표징의 차이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여러 표징이 나타날 것이라 하십니다. 첫 번째는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고, 두 번째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며, 세 번째는 큰 지진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표징의 방식은 바로 우리 자신에서 시작하여 세상과 자연, 그리고 하늘로 시선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방위적인 표징이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한 사람의 힘든 죽음을 생각해봅시다.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는 말기 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병원에서 함께 입원하였던 다른 암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그 환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이름은 정자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눈의 실핏줄이 더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

그리고 그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이지은 씨는 갖은 방법을 써서 아내를 그 남편으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처럼만 죽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남편은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 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 품 안에’] 

이지은 씨의 남편은 죽음 앞에서 이전에 죽은 분의 죽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할 뻔하였습니다. 죽음이 다 그런 모습처럼 여겼고 자신도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는 일입니다. 꼭 그런 죽음을 따를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멸망하는 이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곧 잘못된 믿음, 부정, 반란,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그리고 하늘의 징조까지 따릅니다.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결국 멸망하게 될 이 세상에 관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라 이 과정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죽음도 있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전쟁과 반란도 없으며 큰 지진이나 전염병도,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징조도 없습니다. 말기 암 환자를 18년 동안 보아오며 김범석 교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 이야기입니다. 일흔 살의 암 환자였습니다. 이 환자는 병원에 왔을 당시 이미 폐암 4기로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사자인 할머니도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비록 완치 목적이 아닌 생명 연장 수단의 항암치료일지라도 씩씩하게 잘 따라와 주셨습니다. 진료 때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옅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만 하셨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우리 애들이 걱정이지. 어린 손주들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살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할머니는 그렇게 항암치료 받으면서 의연하게 일상을 이어 나갔습니다. 가금 안부를 물을 때면 딸과 같은 동네로 이사 가서 손주들 볼 일이 더 많아졌다면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정밀검사를 해보니 할머니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종양은 이미 너무 커졌고 이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할 때 환자들과 가족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합니다. 

“분명 좋아진다 했잖아요.” “왜 나만 약효가 없는 거예요?” “치료 열심히 받았는데 왜 나빠져요?”

가장 처음 반응은 부정, 그리고 분노, 마지막은 원망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마음 안에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과 병이 창궐하고 헛것까지 보다가 결국엔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란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잘 치료해주려고 애썼는데 내가 미안해요. 오늘도 치료 잘 해줘서 고마워요.”

할머니는 죽음 선고를 한 의사를 오히려 위로해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 할머니는 오늘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그 어떤 표징도 없으셨습니다. 착잡한 의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그날도 씩씩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마지막은 일찍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도, 가족들도, 헤어짐이 가까워졌다는 걸 받아들이고 호스피스 상담받으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할머니의 딸은 김 교수에게 생각지도 못한 편지를 건넸습니다. 

“선생님, 이제 엄마와의 작별 시간이 다가오나 봅니다. 아프기 전과 똑같이 우리를 돌보던 대단한 엄마가 자꾸 약해져 갑니다. 이제는 엄마를 놓아드려야 하는 때가 온 것이 아닌가 해요.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갈까요, 하고 선생님께 물었을 때 선생님이 엄마랑 꼭 붙어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저랑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와서 아이들 등원도 함께 시키고, 사우나도 가고, 산에도 갔던 지난 1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야속하게도 이 편지를 받은 후 얼마 못 가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평소 모습처럼 할머니의 마지막도 의연하고 씩씩했고,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편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김 교수는 말합니다. 

“나는 그동안 할머니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짐작하건대 가방끈이 길거나 넘치게 부유한 삶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권력자도, 엄청난 부자도 예정된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걸 자주 봤다.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이 평범하지만 어렵고 특별한 일을 해 낸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남아있다.”

[출처: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중 ‘18년 의사 생활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암 환자’, 유튜브 채널, ‘책썰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위 할머니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멸망의 표징도 겪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그냥 평소처럼 살고 잠처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삶의 모습입니다. 김범석 교수는 이 평범하지만 비범한 죽음이 의사 생활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이 할머니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죽음 선고를 받은 지 며칠 안 되어 제가 예수님을 믿느냐고 했을 때 “그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표징을 말씀하신 것은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멸망하는 사람과 이 세상의 미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표징을 겪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잠처럼 평화롭게 만들 믿음을 청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까지의 삶과 이별하기 가장 좋은 날

 

군대에 간 지 얼마 안 지났을 때였습니다. 선임이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임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직 처음이라 몰라서 실수한 거잖아. 괜찮아.” 
 
그리고 몇 달 뒤에 똑같은 실수를 또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절했던 선임은 인상을 쓰면서 말했습니다. 
 
“그때는 몰라서 그랬다고 쳐도, 지금 얼마나 지났는데 이렇게 실수하면 안 되지.”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면서 언제까지 멍청하게 생활할 것이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알면서도 실수했다면서 선임으로부터 심하게 혼났습니다. 아마 저와 같은 체험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알면서도 계속 실수합니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다이어트에 실패하지 않습니까? 다이어트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또 좋은 성적을 맞는 방법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원하는 성적을 맞지 못합니다. 
 
알면서도 못하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에서 오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계는 알면 실수 없이 곧바로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알면서 못하기도 하고 또 모르면서도 할 수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할 때, 이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인간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첫째,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악에 속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죄를 따라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셋째,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9) 지금의 상황, 특히 어렵고 힘든 상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주님이라는 희망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끝이 아님을 깨닫고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구원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주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더 나은 삶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 지금까지의 삶과 이별하기 가장 좋은 날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도 너를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누군가를 훌륭한 사람으로 대하면, 그들도 너에게 훌륭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이 사랑의 빛으로 우리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허물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이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탄생은 언제나 역사의 진통(陳痛)을 건너 뛰지 않습니다. 동요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참된 사랑으로 서로를 속이는 법이 없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전의 화려함보다 하느님을 향한 내면의 성전(聖殿)이 더더욱 중요함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표징들은 모두 하느님을 향한 회개의 초대입니다. 회개로 다시 세워지고 다시 시작되는 참된 희망입니다. 참된 희망은 허물어지고 자주 속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참된 희망은 우리를 저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희망입니다. 오늘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에 참된 희망을 노래합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놀랄 것이 아니라 새로워질 순간입니다. 삶이란 다시 하느님 안에서 모순의 옷을 벗고 더 기쁜 새로움을 향하는 변화입니다. 벌거벗은 나무들의 기도처럼 진실함의 기도는 모두를 기도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속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은 기도입니다. 기도의 성전은 인격의 성전이며 공동체의 성전입니다. 인격을 인격답게 변화시키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방식은 기도입니다. 끝까지 기도하는 삶에서 희망은 탄생됩니다. 희망을 탄생시키는 기도의 새날이 허물어지는 어둠을 뚫고 솟아오릅니다. 사람의 희망이 아닌 하느님의 희망을 아침기도로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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