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1월 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6.
반응형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주님, 의로운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거짓 없는 입술로 드리는,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계명의 길 꿋꿋이 걷고, 당신의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2022년 11월 6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2마카 7,1-2/ 7,9-14)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 제2독서
    (2테살 2,16-17 / 3,1-3,5)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십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0,27-38)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6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복음
루카 20장 27-38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정래 시몬 신부 강론

 

 

2022년 11월 6일 (일)
조정래 시몬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11월 6일 (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부활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부활 신앙과 관련된 성경 말씀을 듣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받게 되는 어떠한 고문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형제들의 이야기입니다. 형제들이 차례로 죽기 전에 한 말에서 죽음과 부활 그리고 생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함께, 자신의 지시를 잘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편지의 맥락으로 보면 그 지시 내용은 거짓된 종말에 관한 가르침과 왜곡된 부활 신앙을 경고하며 온갖 이단과 거리를 두라는 말씀으로 짐작됩니다.

한편 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신앙을 전하고자 하셨지만, 당시 유다교 사제 계급이었던 사두가이들은 부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들과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다인에게 권위를 지닌 율법, 곧 오경에 근거하여 논증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친숙하게 지내셨다면, 죽음 뒤에도 영원히 그러하신다는 논리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방식으로만 부활을 이해하는 바리사이들의 태도도 경계하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부활 신앙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현세의 삶을 무한대로 연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 이후의 상황과 영원한 생명은 현세와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명확히 이해하지도, 하느님을 직접 뵙지도 못하지만, 그때는 그분을 마주 뵙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기쁨이 충만한 시간을 맞이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생명이신 하느님 사랑의 필연인 우리 생명

 

저는 지금 특강을 하기 위해 전남 장성에 와 있는데 오랜만에 선배 형제를 만나서 코로나를 앓고 난 뒤 건강은 어떠신지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아주 유쾌한 그러나 의미 있는 말을 듣고는 서로 웃었습니다. 

그 형제께서 ‘살 때까지 살아야지’라고 하신 겁니다. 이에 제가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고요?’라고 되받은 겁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의미 있는 말을 주고받고 어제오늘 저는 이 말들을 되새김질하게 되었는데 마침 오늘 주제도 죽음과 부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건가요? 

죽을 때까지 사는 건가요? 

아니면 살 때까지 사는 건가요? 

제 생각에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은,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그 선배 형제처럼 살 때까지 살려는, 곧 부활의 의지와 희망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죽음에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죽을 때까지만 살 수 있고, 그래서 부활의 의지와 희망은 도무지 있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기에 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의지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늘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렇게 믿는 겁니다. 

이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는 사람에게 저는 안 믿으면 어쩔 거냐고, 그것을 안 믿으면 무엇을 믿을 거냐고 되받아칠 겁니다. 

저는 믿는 쪽을 선택하고,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저의 생명은 우연이 아니고,

생명이신 하느님 사랑의 필연이라고. 

그리고 내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생명이신 하느님이 사랑으로 창조하신 존재라면 죽음으로 끝나도록 나를 있게 하셨을 리 없다고.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유한한 생명의 존재인 우리도 자식이 죽는 것을 원치 않고,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살게 되기를 원하고,죽었더라도 부활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그리 크지 않아도 우리는 내 자식이 죽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원한 생명이시고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생명들이 죽음으로 끝나길 원하시겠습니까? 

저는 다른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런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믿지 않고 저의 부활을 믿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활을 안 믿는 자에겐 부활이 없는 이유

 

영화 ‘47m’(2017)는 상어가 가득 찬 멕시코 바닷속에 떨어진 두 영국 여성의 탈출 이야기입니다. 

케이트와 리사는 케이지 안에 들어가 7m나 되는 상어들을 보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합니다. 리사는 들어가기 전까지 겁을 먹었지만, 바닷속의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 신나서 감탄합니다. 한창 재밌던 중 케이지를 매달고 있던 줄이 끊어져서 엄청난 속도로 물속 47미터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떨고 있는 리사를 대신해서 케이트가 무전을 하기 위해서 수심 4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무전에 성공합니다. 케이지에 다시 매달아 들어 올릴 고리를 가지고 구조하러 온 사람은 리사의 눈앞에서 상어에게 잡아먹힙니다. 리사는 상어를 피해 하비에르의 가방에서 작살과 케이지에 매달 인양용 줄을 가져옵니다. 리사는 무전으로 구조 대원의 사망과 인양 줄 확보를 알려주고 케이지에 줄을 묶고 케이지에서 기다리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30미터 지점도 넘어 둘은 구조되는듯했지만, 줄이 가늘어서 또 끊어져 다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리사의 다리가 케이지의 철근에 깔려 리사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위에서 공기탱크 두 개가 떨어집니다. 그동안 질소중독에 걸릴까 봐 내려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케이트는 산소통을 집어 케이지로 잽싸게 이동하려 하는데 순간 상어에게 물립니다. 

리사는 케이트의 죽음에 절망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케이지 바깥 가까운 곳에 떨어진 새 공기탱크를 가져오기 위해 케이지에 걸려있던 작살총을 쓰기로 하는데 작살은 억지로 안으로 가져오려다 방아쇠가 바깥 나사에 걸려 발사되는 바람에 자기 왼손을 찌르고 맙니다. 피가 나고 공기 게이지는 0바입니다. 겨우 공기탱크를 작살로 가져오는 데 성공해서 교체합니다.

그때 무전으로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상어에게 공격받아 상처는 입었지만 살아있었습니다. 리사는 자기 조끼를 낀 곳에 넣어 부풀려 다리를 빼내고 케이트를 구하러 갑니다. 그러나 케이트의 다리가 심하게 물려 피가 흐르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더 꼬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죽기 살기로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30미터 위치에서 잠수병 예방을 위해서 5분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신호탄을 키는데 사방에 상어가 천지입니다. 그리고 이 신호탄도 얼마 못 가서 꺼지고 둘은 전속력으로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구명 링에 매달려 둘은 사는 듯했지만 리사가 상어에 물려 수면 밑으로 사라집니다. 리사는 상어의 입을 꽉 막고 상어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풀려나서 다시 구조됩니다. 이렇게 둘은 구조되어 배 위에서 상어에게 물린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습니다.

​그런데 안도하고 있던 리사의 다친 손이 피가 흐르지 않고 물속인 듯 공기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리사가 물속에서 공기탱크를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질소중독으로 환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자 남은 리사가 겨우 공기통을 건져 다리가 아직 케이지에 낀 채로 케이트가 죽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구조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무장한 멕시코 해양 구조대가 도착해서 리사를 구조해서 수면으로 올라오고 영화는 끝납니다.

이 세상은 마치 바닷속과 같습니다. 우리 생명은 각자의 산소통에 든 산소의 양에 달려있습니다. 산소가 충분한 바다 위로 올라가면 더는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산소가 다 떨어져 가는 것만 겁낸다면 바닷속은 지옥이 됩니다. 

서두르지 말고 누군가가 계속 산소통을 내려줄 수 있고 언젠가는 구조대가 와서 바깥세상으로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현세주의자들입니다. 마치 바닷속이 전부이고 산소,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서로 산소를 빼앗으려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서로 살려고 남을 해치는 지옥이 됩니다. 사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이트와 리사는 서로 돕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세상,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이 가득 차서 이 지상에서는 각자의 산소통 하나로 살지만 굳이 산소통이 없어도 영원히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영원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지상의 삶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시선으로서는 인간들이 각자의 산소통으로 바닷속에 있어도 곧 죽을 인간들이 아닌 영원히 사는 인간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든 산소통을 넣어줄 수 있고 또 질소중독에 걸리기 전에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산소 게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이 있다고 믿는 이는 그래서 산 이들이고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는 죽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산소통이 고갈되면 언제나 끌어올려 주실 수 있다고 믿는 이들만을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이들은 상어에게 물립니다. 그냥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리사는 다행히 케이지에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어서 살았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제 부활에 대해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죄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우리를 구하라고 구세주를 보내주실 하느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실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위에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사랑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신도 목숨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상이심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미 구원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믿어서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이 표징입니다. 위에서 목숨을 걸고 바닷속으로 누군가를 보낸 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케이지 안에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 케이지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표징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전해지는 교회입니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이복형은 우연히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여성 타냐가 자기 동생 지바고의 딸임을 알아봅니다. 꼬마로프라는 사람이 타냐의 어머니인 라라를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타냐를 키운 것입니다. 이것이 장군과 그의 조카인 타냐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묻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느냐?” 

타냐가 주저하며 울먹거리다가 겨우 대답합니다.

“사실은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놔 버렸어요.” 

장군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대답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꼬마로프스키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다. 진짜 아버지라면 불길 속에서도 자녀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분이 아버지다.”

우리에겐 하늘에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산소통도 보내고 양식도 보내고 상어에게 물릴 것을 알면서도 아드님까지 보내신 분이 계심을 믿습니다. 안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허둥대다 상어에게 결국 먹힙니다. 믿으면 케이지 안에서 바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산소가 떨어져 가더라도 케이지에 안에서 기다립시다. 예수님께서 케이지에 줄을 연결하셨고 산소가 다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끌어올려 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부활하는 이유는 그래야 안전한 케이지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울하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고, 편안하면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아마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15년째 쓰고 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묵상 글 댓글로 누군가가 제 글에 대한 비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글쎄 제가 자기 핸드폰을 해킹해서 자신의 글을 저의 글인 것처럼 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니 그냥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사이버 수사대에까지 신고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좋은 소리만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신고까지 당하니 묵상 글 쓰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쓰고 있는 것인데, 이러면서까지 글을 써야 할까?’, ‘처음부터 묵상 글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더 편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등등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머물면서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도 났습니다. 
 
‘언제까지 묵상 글을 써야 하지?’, ‘잠도 잘 못 자면서 묵상 글을 쓰는데, 혹시 건강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또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어떻게 하지?’ 등등 이렇게 미래에 시선에 머무니 역시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이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울하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고, 편안하면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노자) 
 
묵상 글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 나의 성장을 위한 것뿐입니다. 주님과의 마음을 글로 정리하면서 주님께 조금씩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신부님 대단하세요. 저희 신자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묵상 글을 써주시다니요.”라고 말씀하시면 얼른 고쳐드립니다. 
 
“신자가 아니라 저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닌 또 미래도 아닌 이 순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와의 논쟁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불멸성, 육신의 부활, 천사들의 존재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현실을 존중하는 ‘현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뜻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결혼으로 자손을 낳아 대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기에 사두가이의 말은 모두 잘못된 말이었습니다. 또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며 따라서 산 자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하느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잘못 해석하고, 오지 않는 미래를 떠올리면서 ‘이럴 것이다’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모두 약점을 안고서 연결되어 있다.

- 로라 판 더누트 립스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주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기에 아름답고 진실합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 소중한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도 사제도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마음 기도의 자세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우리의 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참된 신앙은 신앙인의 삶에 중심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건전한 믿음의 기초적 토대는 두말할 나위 없이 기도의 삶입니다. 

신앙인은 빛과 소금이 되어오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를 통해 신앙과 삶은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실천하는 신앙이며 실천하는 방식의 시작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의미는 생활의 의미입니다. 모든 생활에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분명 기도입니다. 기도의 중심은 믿는 마음입니다. 믿는 마음은 감사와 반성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인의 소중한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은총의 평신도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기도는 서로를 향해 열려있으며 간절합니다. 기도로 이 사회와 세상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