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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1월 8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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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네.

주님을 믿으며 좋은 일 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네 마음이 청하는 대로 주시리라. 주님이 흠 없는 이들의 삶을 아시니, 그들의 소유는 길이길이 남으리라. 주님은 사람의 발걸음 지켜 주시며, 그 길을 마음에 들어 하시리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의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거기에서 길이 살아가리라.

 

2022년 11월 8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티토 2,1-8 / 2-11-14)
    우리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7,7-10)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8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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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복음
루카 17장 7-10절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동휘 도로테오 신부 강론

 

 

2022년 11월 8일 (화)
신동휘 도로테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8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기도할 때  마음가짐

 

「미사 통상문」에서 ‘공통 감사송 4’를 많은 신자분이 좋아합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이 감사송의 내용을 곱씹어 보면 겸손한 태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감사송의 내용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이 주인을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종은 종일 밖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드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면 공동체 안에서 봉사할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 그리고 만일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밀려오는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만큼의 기도를 하였다면 하느님께서 하나만큼의 은총을 베푸셔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일을 완성하시는 데에 반드시 우리의 찬미를 필요로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보잘것없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겸손하게 섬기는 신앙인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받을수록 겸손해지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주종관계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일까요? 

하느님은 인간에게 그렇게 인자한 분이 아니시고 인간을 종처럼 부려 먹는 분이시며 이런 하느님께 인간은 낮에는 힘들게 일해야 하고, 돌아와서는 시중들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는 쓸모없는 종이라고 굽신거려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일까요? 

한 마디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임을 강조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얼마간 그런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17장인데 앞선 12장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종을 너무도 사랑하고, 오히려 식탁에서 종의 시중을 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착각하지 마라! 너희는 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일 겁니다. 

‘오냐, 오냐 하니까 할애비 수염까지 당기려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손주를 나무라는 말이지만, 할아버지는 이런 나무람에 오히려 괜찮다고 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그러니까 애가 버릇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단지 할아버지와 손주의 얘기만이 아니고, 너무 잘해주면, 미성숙한 사람은 자기 주제를 망각하고 버릇이 없어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할아버지와 버릇없는 손주의 예를 들어 얘기하는 것이지요. 

사실 성숙한 사람은 잘해줘도 자기 주제를 망각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잘해줄수록 고마움을 더 느낄 뿐 아니라 잘해주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더 존경할 것이고, 자기는 그렇게 잘한 것도 없고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일 겁니다. 충직하고 겸손하고 성숙한 종이라면 자기가 할 바를 다한 다음에도 우리는 주님께 쓸모없는 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비천한 존재이고 비굴해야 하는 종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시고 넘치는 사랑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가르치시는 말씀일 겁니다. 

하느님께 사랑받을수록 더욱 겸손해지는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회의를 위해 지방에 와 있습니다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간신히 올렸습니다. 그래서 내일 혹 강론이 올라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순종 중에서도 항상 기쁠 수 있는 이유

 

영화 ‘폭풍의 시간’을 조금 각색한 줄거리입니다. 

1989년 폭풍우가 심하게 치던 어느 날, 엄마는 일을 나가고 혼자 남겨진 니코는 자신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것을 녹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앙헬의 집에서 크게 다투는 소리를 듣고 조심스럽게 앙헬의 집으로 가봅니다. 그곳에는 앙헬의 부인 힐다가 쓰러져 있었고 칼을 든 앙헬을 본 니코는 도망치다 차에 치여 죽고 맙니다. 

25년 뒤 자상한 남편 다비드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딸 글로리아와 함께 베라라는 여성이 니코가 살던 집으로 이사 옵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오래된 티브이와 비디오카메라를 발견합니다. 

베라는 호기심에 비디오를 틀어보고 니코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25년 전 오늘 살인사건을 목격하고 도망치다 사망했던 아이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 밤 갑자기 꺼둔 비디오가 작동하면서 베라와 니코가 서로를 보고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니코는 앙헬의 집에서 크게 다투는 소리를 듣고 나가려고 합니다. 니코가 안쓰러웠던 베라는 니코에게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며 밖에 나가면 죽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니코는 뛰어나가고 연결이 끊깁니다. 

베라는 자상한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어떤 형사가 다가와 혹시 힐다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묻습니다. 그녀는 지금은 역사가 바뀌어 앙헬이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원래는 니코의 죽음으로 앙헬이 그 자리에서 붙잡혀서 자살하고 아내의 시신은 도축장에 묻을 것이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이렇게 경찰과 베라는 시신을 찾아내고 다른 여자와 살고 있던 앙헬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그 경찰은 말합니다. 자신이 니코라고. 생명을 구해줘서 감사하다고. 

니코는 베라의 말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 준 베라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그림으로 그리고 베라가 이사를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경찰이 되어서 말입니다. 베라는 바람을 피우는 다비드와 헤어지고 니코와 결혼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니코의 25년간의 삶은 어땠을까요?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베라에게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라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경찰이 되어서 정의를 바로잡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되어 베라를 기다렸습니다. 25년 뒤에 자기가 살던 집으로 이사 올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베라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괴롭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베라를 만날 것에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결국 베라를 만나서 그 행복을 나눕니다. 

누군가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감정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할 때는 그러면 나처럼 행복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순종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행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순종하라고 하시면서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하십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그분의 기쁨에 벌써 참여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로 20년간 살며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기쁠 수 있었던 이유와 같을 것입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에사우에게 환영받기 위해 에사우가 살았을 법한 삶을 살며 많은 열매를 맺으며 에사우가 기뻐할 것에 자신도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도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리스도의 감정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겸손해야 하는 이유, 감사해야 하는 이유

 

주변에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있습니다. 확진된 적 없는 사람을 만나기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하긴 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확진 경험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확진 경험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코로나가 맞다’라고 생각해서 병원에 가보고, 자기 진단키트로 검사를 해도 늘 ‘음성’입니다. 혹시 ‘슈퍼항체 보유자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매일 미사와 안치 예식으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3년째 코로나 팬데믹 안에 살면서도 아직까지 확진 없이 건강하게 있다는 자체를 떠올려 보니 거의 기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는 “대인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확진되지 않더라.”라고 농담하기도 하지만,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지 않았던 저였기에 이렇게 확진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큰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이를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신 ‘내가 건강해서.’, ‘내가 조심해서.’라는 이유를 붙이면서, ‘나 때문에’라는 생각만 했었음을 반성합니다. 
 
그 누구도 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음을 이번 팬데믹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고, 또 감사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는 주님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 뜻보다는 내 뜻을 더 내세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 시대에 대한 이해를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종일 밭에서 힘 빠지게 일하고 돌아와서 또 집안일을 해야 하고 배고픔을 참고 먼저 주인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종이 등장합니다. 이를 보면 그가 노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노예는 이런 일들을 하기로 하고 고용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주인은 주인대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현대와 같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분명히 악덕 주인일 것이고 신고 대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이와 같은 주인과 종의 관계는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너무 흔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하는 하느님의 일 모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하지 않고, 내 일이 바쁘다고 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고, 내게 물질적인 이득이 없다면서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고 있었을까요? 주님 뜻보다 내 뜻을 더 내세우는 사람은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련이란 꼭 방해 거리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우리의 발아래 놓으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

- C.F 블렌차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우리들을 봅니다. 우리에게 없는 겸손된 마음입니다 아무리 높아져도 십자가 아래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누군지를 묻습니다. 쓸모없는 종을 성장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쓸모가 있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사랑을 내어주시며 구원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삶의 중심이 되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께 뿌리를 두는 삶이 바로 겸손한 우리들 삶입니다. 일을 시작하시는 분도 일을 마치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밀고 끌고 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피었다 지는 꽃같이 머물렀다 가는 삶같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뜨겁게 인정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쓸모없는 종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위령 성월의 고운 빛깔입니다. 쓸모없는 종을 받아주시길 겸손되이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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