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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1월 4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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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예루살렘은 튼튼한 도성, 견고하게 세워졌네.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 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이스라엘의 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네. 그곳에 심판의 왕좌,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2022년 11월 4일 (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필리 3,17-21 / 4,1)
    우리는 구세주를 고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6,1-8)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4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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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님, 복된 가롤로 주교에게 심어 주신 굳센 정신을 주님의 백성에게 부어 주시어 교회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저희도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참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게 하소서.

 

 

복음
루카 16장 1-8절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 강론

 

 

2022년 11월 4일 (금)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4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오늘 복음만 들으면 신자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협잡꾼’ 또는 ‘사기꾼’처럼 묘사된 집사의 모습을 주인이 칭찬하는 것으로 비유가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신자들에게 ‘협잡꾼’이 되라는 것일까요? 이 비유는 신앙 공동체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뜻의 고사성어 ‘견지망월’(見指忘月)은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지 못하고 부수적인 것에만 집착한다는 의미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듣는 우리도 ‘견지망월’의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비유에서 ‘협잡꾼’의 모습 그 자체를 신앙인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핵심은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세속적 이익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비유 속 집사의 모습 그 자체가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그처럼 부정한 일조차 약삭빠르게 처리하는데, 하물며 빛의 자녀들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 실현에 훨씬 능숙해져야 한다는, 공동체를 향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천사 같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들의 공동체, 자신의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공동체, 성령께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복음 정신을 실천하는 데에 얼마나 능동적이며 적극적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한 때는 불의했지만 이젠 사랑하는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 간에 서로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합니다. 개신교는 서로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호칭에 대해 비아냥대거나 비판할 때 형제로 대하지 않으면서 형제라고 부른다고 비판하고, 너도나도 다 집사이고 집사 아닌 사람이 없다고 비아냥댑니다. 

사실 오늘 주님께서 집사의 비유를 드실 때 군중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러니까 일반 군중이 아니라 당신 제자들이 집사라는 말씀이고, 당신 제자들이 집사로서 역할을 충실하고 정의롭게 수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대입하면 집사란 일반 신자가 아니라 신자들을 잘 돌보아야 할 사제를 말하는 것이고, 개신교에서는 목사와 일반 신자 사이에 직책을 맡은 사람일 겁니다. 그런데 협의적으로 얘기하면 이런 뜻이지만 넓은 의미로 얘기하면 꼭 그런 것만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신부나 수도자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다 제자지요. 

그러므로 나는 집사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주님이 부여하신 직책 곧 제자직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오히려 얘기해야 합니다. 

실제로 본당이나 재속프란치스코회 안에서 책임을 맡으라고 하면 거부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교회나 복지시설 봉사자가 점점 줄어드는데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의 시간과 힘을 그런 것에 쓰고 싶지 않고 산과 들로 놀러 다니는 데 쓰고 싶고, 도자기를 만든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취미생활 하는 데 쓰고 싶고, 내 영혼을 건강하고 살찌게 하려고 좋은 강의 듣는 데 쓰고 싶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2번에서 이렇게 비판하십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버립니다.” 

오늘 비유에서 집사가 불의한 이유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기 때문인데 어떻게 보면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준 것도 낭비이지만 주님은 그것이 영리한 행위이고 그래서 불의한 집사를 영리한 집사라고 하십니다. 

일반 세속의 주인에게는 그런 행위가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유용하는 또 다른 불의가 되겠지만,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에게는 그것이 유용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적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재산) 곧 시간이나 능력이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하는 데 쓰라고 주신 거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고, 곧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산다고 한탄한 다음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라고 필리피 신자들에게 역설합니다. 

하늘의 시민인 우리도 과거 하느님 것으로 우리 배 채우는 데만 힘썼다면 이젠 그러지 않는 곧 하느님의 선을 이웃과 나누는 영리한 집사, 곧 한때 불의하였지만 이젠 이웃을 사랑하는 영리한 집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것을 비우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조우성 변호사의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에서 “아버지고 동생이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세요” 내용입니다. 조 변호사는 좀 특이한 소송을 맡게 되었습니다. 누나가 자신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건물에서 나가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소송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동산 소유주는 누나이며 현재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누나는 서울에 있는 자기 건물 2층에서 아버지와 남동생이 살 수 있도록 별도의 보증금이나 월세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10년째 그 건물에서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누나가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합당한 보증금과 월세를 내라는 새로운 임대차 계약 체결을 요구했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누나는 기존의 무상 임대차 계약을 해지한다는 통보를 하고 아버지와 남동생을 나가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소장 내용만 보면 아버지와 남동생은 6개월 이내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지금 사는 곳에서 나가면 마땅히 잠잘 곳도 없는 상황인데 누나가 이렇게 갑자기 매몰차게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데 대해 아버지와 남동생은 누나에게 크게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누나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자기 아버지를 엄동설한에 바깥으로 내몰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오갈 데도 없는 아버지를 추운 겨울에 내쫓는다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법은 천륜만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조 변호사가 더 깊은 내막을 알고서는 누나가 아닌 천륜만 고집하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누나와 형욱 씨는 10살 터울입니다. 아버지는 외향선을 타는 뱃사람이라 집에서 자녀들과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한 사고로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더는 배를 타지 못하고 노름과 술에 빠져 어머니에게까지 심한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남편의 폭력을 참다못한 어머니는 누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출했고 이후 누나는 아버지와 형욱 씨를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동생 형욱 씨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습니다. 덕분에 형욱 씨는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누나는 악착같이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모았고 형편이 조금 안정이 되자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의정부에 두 채의 건물 소유주가 됩니다. 누나는 사업을 해보겠다는 형욱 씨를 위해 5억 원에 달하는 돈을 조달해 주었습니다. 형욱 씨는 투자금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누나의 결혼을 아버지와 동생이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남자의 학력이 고졸이고 분명 누나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려는 속셈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보면 달라질 줄 알아서 남자 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해 주었지만, 아버지는 면전에서 면박까지 해주었습니다. 가족 간에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조 변호사는 변호를 의뢰한 형욱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욱 씨, 제가 하자는 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제가 이 사건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욱 씨에게 이러한 글을 재판할 때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문득 소송을 진행하다가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에게 누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누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부분이 컸습니다. 특히 매형 될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마음으로 축하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됩니다.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한 따뜻함을 그분에게서 느꼈을 텐데 이를 헤아려주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나는 평생 누나에게 짐만 되는 존재였습니다. 이번 사건의 결과에 상관없이 더 이상 누나에게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초안을 읽어본 형욱 씨는 난처해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소송은 지게 되어 있고 방법은 이것뿐이었습니다. 형욱 씨는 못내 불안해하면서도 이 준비서면을 제출했습니다. 3주 뒤 재판 당일, 누나 측 변호사는 “재판장님, 원고 측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예 영구적인 무상사용 계약서를 하나 쓰려고 한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누나에겐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돈을 너무 당연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이 야속했던 것입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살고 있던 건물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고 이후 가족 간의 관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 비유입니다. 결론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입니다. 나를 맞아들일 친구를 불의한 재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의롭지 않은 재물이란 나의 것이 아닌 재물을 의미합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여긴 데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핑계로 누나의 재산을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책과 같은 것에 자기 이름을 써넣는 것처럼 누나의 재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은 것입니다. 누가 나의 것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다고 해 봅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가족도 필요 없습니다. 

고아로 자라난 아버지가 아이가 드라이버로 자기 스포츠카에 낙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쳤습니다. 아이의 손이 부러졌고 아버지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낙서를 했나 봤습니다. 

“LOVE U DAD”(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어떤 물건에 ‘나의 것’이란 표를 해 놓으면 나는 가족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나의 것’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맞아들일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나의 것’을 포기함으로써 평생 거처를 다시 얻었습니다. 나의 것이란 생각만 없애도 그 사람 안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스님은 자신이 아끼던 난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니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소유의 자유를 말하며 가진 것을 최소한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난을 선물하였다면 그 난에는 아직도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미련이 남거나 상대에게 보답을 기대합니다. 불교에서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주인이 안 계시지 가지면 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주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무소유는 가진 것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가지고 있어도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면 많이 갖건 적게 갖건 내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불의한 재물은 내가 가졌지만, 나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모든 것들입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불의한 재물로 여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 위에 ‘주님 것’이란 이름을 써 놓아야 합니다. 

제가 함께 방을 쓰던 아프리카 친구가 저의 것을 자꾸 자기 것처럼 쓸 때 짜증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어떤 분이 “내 것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내 것이라는 말을 안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자꾸 “내 것”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어서 외톨이가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면서도 “어차피 내 거 아냐!”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의롭지 못한 것”, 곧 주님의 것을 내가 유용한다고 여겨야 합니다. 나는 나의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소유이지 나의 것을 다 내어주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나의 것이 애초에 있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은 다 주님 것을 맡겨 놓은 것으로 여기고 가지고 계십시오. 그래도 무소유입니다. 욥의 이 말을 새깁시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의 이야기에 왜 우는 거야?

 

우울증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지요. 처음 상당하면서 참 많은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으려고 책상 위에 놓인 휴지를 뽑는데, 상담 선생님이 자기보다 더 많이 울고 계신 것입니다. 이 자매는 ‘남의 이야기에 왜 우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몇 차례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자기는 울면서 말하고, 상담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울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온종일 내담자들을 대하실 텐데 그때마다 저렇게 울면 힘들어서 어쩌시지?”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남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을 걱정하는 마음을 통해 이제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내담자의 이야기에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담자는 울고 있는 상담 선생님을 걱정하면서 치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하는 마음이 치유의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이런 점에서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자가 집사를 해고합니다. 이유는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루카 16,3)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재산을 횡령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보다는 그의 능력 부족으로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다가 부자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서 빚문서를 고칩니다. 기름 백 항아리는 쉰 항아리로, 밀 백 섬은 여든으로 고칩니다. 
 
어떻게 보면 간교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른 집사입니다. 이 사실이 들통나면 깜빵에 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집사의 주인인 부자는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합니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주님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당해 보이는 수단까지 동원하는 약삭빠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의도가 어떻든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강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서로 도울 것이니까요.

- 드라마 ‘스토브 리그’ 중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관계안에서 함께하십니다. 우리들 삶 또한 관계로부터 태어나 관계 속에 살다가 관계로 마무리하는 관계의 삶을 살다 갑니다. 현실적 관계처럼 한순간에 아무 것이 아닌 관계가 될 수 있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들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존의 욕구처럼 절박한 것이 우리들 신앙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의 돌파구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의 돌파구는 삶의 대처방식처럼 막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우리들 삶의 자세입니다. 주지 않고 받으려는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약은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관계의 선물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지혜로운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칭찬은 끊임없이 관계를 이어가는 집사의 관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관계맺는 방식이 외적인 욕망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내적의미를 찾는 기쁨의 방식이길 기도드립니다. 건강한 관계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 깨닫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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