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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위령의 날 둘째 미사 (22/11/02)

by 평화다방 202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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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나 참으로 비참하구나.” 되뇌면서도 나는 믿었네. 문득 놀라 나는 말하였네.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아, 주님, 저는 당신의 종. 당신이 제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2022년 11월 2일 (수) 위령의 날 둘째 미사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2일
위령의 날 둘째 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둘째 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지혜 3장 1-9절)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제2독서
    (로마 5,17-21)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11,25-30)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2일 (수) 위령의 날 둘째 미사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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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의 날 첫째 미사 (22/11/02)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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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의 날 둘째 미사 (22/11/02)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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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의 날 셋째 미사 (22/11/02)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고,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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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믿는 이들의 영광이시며 의로운 이들의 생명이신 하느님,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세상을 떠난 하느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부활의 신비를 믿은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복음
마태 11장 25-30절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 강론
위령의 날 첫째 미사

 

 

2022년 11월 2일 (수) 위령의 날 첫째 미사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위령의 날 둘째 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2일 (수) 위령의 날 둘째 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의인들의 고통과 희망’에 관한 성경 말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둘째 미사에서 우리는 ‘의인들의 고통과 희망’에 관한 성경 말씀을 듣습니다.

제1독서인 지혜서는 ‘의인들이 왜 고통받으며, 하느님께서는 왜 침묵하시는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지혜서 저자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구원의 효과를 아담의 원죄에 빗대어 대조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죽음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구원과 의로움, 곧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입니다. 

한편 복음은 성부 하느님을 향한 성자 그리스도의 감사 기도로 시작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에 젖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지만, 하느님께서 어린이와 같은 이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진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얻어 내거나, 인간의 논리와 계산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죄와 벌, 원인과 결과 같은 인간적 사고를 초월하시는 창조주 하느님만이 모든 이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미사 가운데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간직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리사랑을 너머 치사랑을

 

아시다시피 위령의 날에는 세 차례 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두 번째 미사를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핼로윈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 모두에게 주님께서 안식을 주십사는, 영원한 안식을 주십사는 마음이기에 두 번째 미사의 복음을 택한 겁니다. 

지난 월요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들에게 줘야 할 위로는 우리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주님의 위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주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이들은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신 대로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것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직접 건네는 위로도 있어야겠지만, 우리의 위로는 한계가 있기에, 특히 이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는 우리의 위로가 직접 전달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은 오직 하느님 손에 있기에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저는 요즘 추세를 걱정스러워합니다. 위령미사를 드리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 말입니다. 

제가 사제로 서품된 30여 년 전만 해도 생미사보다 연미사가 많았는데 요즘은 생미사가 훨씬 더 많고, 생미사도 자녀들을 위한 미사가 대부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가운데서 효도는 구닥다리로 치부되고, 치사랑은 실종되고 내리사랑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는 입 싹 닦고 되돌릴 줄 모르고, 손주는 봐주면서도 부모는 노인 요양원에 보내기도 합니다. 

똑같은 현상이 우리 신앙에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자녀를 위한 생미사는 자주 바치면서, 부모를 위한 연미사를 자주 봉헌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요양원에 맡기고 자주 찾아가지 않는 것처럼, 부모를 하느님께 맡기고 돌아가신 날 한 번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의 문제는 하느님 사랑에도 해당됩니다. 부모를 향하지 않는 사랑은 하느님께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로만 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기만 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줄은 모릅니다. 이것은 기우제를 드려 하늘이 비를 내려줬는데 감사제를 올리지 않는 것처럼,.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는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은 사랑의 영원한 미성숙입니다. 나의 사랑이 성숙해지면 이제 받기만 하지 않고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어린애처럼 그저 받기만 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의 성숙한 사랑과 성숙한 신앙은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하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사랑에 산이와 죽은 이의 영혼을 맡기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사랑, 곧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연옥의 존재 이유 :
우리 안에 다 자라지 못한 십자가가 있다.

 

영화 ‘사일런스’(2017)는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가 일본에 선교하러 갔다가 배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럴 리 없다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도 일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카오에서 그들을 안내해 줄 기치치로라는 일본인을 만납니다. 그도 천주교 신자였지만, 가족이 다 화형당하는 것을 보고는 배교하고 마카오로 피신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로드리게스 신부 일행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배로 일본에 도착하자 그는 도망쳐버립니다. 다시 자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행히도 로드리게스 신부 일행은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 보호를 받게 되고 그들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줍니다. 

다른 마을에 갔을 때 기치치로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주교를 믿는 마을에서 종교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믿음이 육체를 이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순사들이 와서 로드리게스 신부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기치치로는 순교의 고통을 피하고자 예수님 십자가상에 침을 뱉고 후미에(예수님 모습이 새겨진 동판)를 발로 밟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피신하다가 산에서 굴러떨어집니다. 이때 기치치로가 그를 도와줍니다. 그리고 배교를 한 것에 대해 고해성사를 달라고 합니다. 그의 마음은 진심이 묻어납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사제는 정말 꼴도 보기 싫은 기치치로에게 또 고해성사를 줍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모릅니다. 기치치로가 바로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다만 자신은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기치치로는 다시 약해집니다.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많은 현상금이 걸렸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는 돈 때문에 마치 유다 이스가리옷처럼 로드리게스 신부를 팔아넘깁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배교를 강요받습니다. 한 사제의 배교가 많은 신자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치치로는 감옥까지 와서 또 고해성사를 달라고 합니다. 만약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꾸준히 고해성사를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는 한데 작은 것입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자신 때문에 무참히 순교의 고통을 겪는 신자들을 더는 지켜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결국엔 예수님의 얼굴을 발로 밟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고 공직자로 선교사 색출을 도와주며 평생을 삽니다. 그가 죽어 화장할 때 그의 손에는 아주 작은 십자가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기치치로처럼.

오늘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의 본격적인 시작인 위령의 날입니다. 오직 가톨릭 교회만 연옥이란 교리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연옥이 있어야만 하고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며 우리가 기도하면 그 고통이 감해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해 주는 것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저는 연옥에 가지 않기 위해 비르짓다 성녀를 통해 주시는 기도문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오랜 시간 바쳐오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신앙의 완성은 내 안에 떨어진 믿음의 씨앗을 얼마만큼 키우느냐에 있습니다. 그 믿음의 씨앗은 마치 겨자씨처럼 작은 십자가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나를 완전히 매달아 죽일 정도로 성장합니다. 그렇게 켜졌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나 기치치로처럼 작은 믿음으로 작은 십자가만 지닌 채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손에 들어올 작은 십자가의 크기로는 나를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옥에 가야 할까요? 하지만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믿음을 저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십자가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그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작은 십자가만 가지고 있는 신자를 하느님 나라에 들여보내면 어떨까요? 그는 죄를 지을 것이고 다른 이는 피해를 당할 것입니다. 다시 지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의 강의에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를 신앙을 가지고 용서하였다고 합니다. 딸 아이를 낳고 큰맘 먹고 아버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딸도 추행했다는 것입니다. 

딸의 상처를 아는 아버지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육체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은 아버지가 뉘우친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뉘우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 안에는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 커다란 십자가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작은 믿음만을 지닌 사람을 천국에 보내면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딸은 아버지가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모습이 보일 때까지 조금 더 고통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요셉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형들에 의해 팔려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이집트에서 갖은 고생하고 재상이 됩니다. 이제 형들이 요셉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해야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계속 괴롭힙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합니다. 결국 유다가 요셉이 잡아놓겠다던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대신 갇히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을 용서해 줍니다. 남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 용서를 보류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통해 그들에게 자신들 안에 자라나는 십자가를 완전하게 성장시킬 시간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못된 장난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연옥은 이런 자비의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기도하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굳이 그러한 고통으로 나아가지 않고 수련의 시간을 충실히 받게 됩니다. 연옥이 우리를 더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지옥의 존재는 우리에게 믿음만을 요구하지만,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그 믿음의 성장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이 쳇바퀴 도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연옥의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 지상에서의 상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백곰 효과

 

‘백곰 효과’라고 있습니다.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라고도 불리는 이 심리학 현상은 하버드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가 진행한 실험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라고 하고, 두 번째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다음 백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했습니다. 어느 그룹에서 종을 더 많이 쳤을까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던 두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이처럼 불편한 느낌이나 생각은 더 많이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뇌는 느낌이나 생각을 잘 지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해하고 걱정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불편한 느낌이나 생각의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이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 해.”라면서 계속해서 부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피하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그 강도가 약해지며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죽음도 ‘생각하지 말아야 해.’라면 곧바로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죽음을 오히려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죽은 모든 이, 그들 가운데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죽음’을 떠올리고 또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십자가 죽음을 직접 몸으로 받아들이셨지요. 그러나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긴 유일한 분이 되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힘센 분이 하늘 나라의 주인으로 계십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주시는 말씀을 이렇게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큰 힘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이 존재한다는 경이로움 앞에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 테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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