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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1월 1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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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2022년 11월 1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묵시록7,2-4.9-14)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 제2독서
    (요한 1서 3,1-3)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서 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1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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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성대한 축제로 모든 성인의 공덕을 기리게 하셨으니 성인들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바라던 하느님의 자비를 풍성히 베풀어 주소서.

 

 

복음
마태 5장 1-12ㄴ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임경수 알로이시오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일 (화)
임경수 알로이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이 행복한 이유

 

우리는 주일 미사 때 사도 신경으로 ‘모든 성인의 통공’을 고백합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보내는 신앙인에게 ‘모든 성인의 통공’은 어떤 의미를 전해 줍니까?

제1독서에서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라는 내용을 듣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선발한 총합입니다. 여기서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제2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내용을 두 번에 걸쳐 듣습니다. 이어서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라는 증언이 덧붙습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행복하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현재’, 곧 ‘지금 여기’에서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러 유사 종교와 달리, 가톨릭에서 고백하는 구원은 보편적이며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통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 구원을 부정한 채 하늘만 바라보는 것은 올바른 가톨릭 신앙도 아닐뿐더러, ‘모든 성인의 통공’과도 맞닿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앙에서 모범으로 삼는 성인들은 우리처럼 두려움과 고통을 겪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고통의 현실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 가운데 이미 하늘 나라가 펼쳐지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안에 숨은 성인들, 밀양의 삶

 

모든 성인의 날은 시성 되지 않은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인데 올해 저는 이 모든 성인이 바로 숨은 성인들이라는 묵상을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을 한 성인들이고, 사람들에게는 그 성성이 드러나지 않은 성인들입니다.그런데 모든 성인은 왜 숨은 성인들이고, 왜 이런 묵상을 제가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늘 독서 묵시록을 읽다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고, 저나 여러분이나 숨은 성인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 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과 어린양 앞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들은 먼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뽑혀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고, 다른 모든 민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와 그 수를 다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순교자들을 보면 성인품에 올라 그 이름과 수를 알 수 있는 103위 성인이나 순교자보다 무명 순교자들이 더 많고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순교하지 않았어도 박해 때 신앙을 간직하며 숨어 산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무명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른 순교자들보다 성덕이 부족하지 않다고. 그리고 박해를 피해 숨어 산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안에 숨은 성인들이라고. 

지난 여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할 때 ‘공근’이라는 지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그 마을의 형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박해를 피해 홍성에서 온 가족이 거기에 눌러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매우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가족이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곳에 온 거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오직 하느님 안에 숨은 분들입니다. 

사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분들이 많고, 우리 재속 프란치스코회만 봐도 이사를 했으니 다른 형제회로 가라고 해도 거기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다니던 곳에 계속 머물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하고 다른 모든 관계를 끊은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은 그래서 현실 도피의 삶이 아니라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의 삶이고 그래서 성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회개의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재의 수요일에 듣는 복음이 있지요.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이런 묵상을 하고 나니, 숨은 성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아파트가 아닌 옛날 우리 시골집 안 마당에 내가 있습니다. 문을 닫아건 고요한 우리 집 안마당에 햇빛이 들어오는데 내가 그 나만의 볕을 쬐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밀양(密陽)을 쬐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숨은 성인들의 삶은 밀양의 삶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인이 되는 길 :
그분을 입고 그분을 보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광해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광대를 왕으로 앉힙니다. 광해는 양귀비에 중독되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천민 하선은 오랜 시간 왕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자신이 정말 왕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점점 이전 왕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이 되어갑니다. 마지막에 그가 가짜인 줄 알고 반역을 일으킨 무리는 그가 진짜 광해임을 알고는 망하게 됩니다. 이렇듯 점점 자신이 입은 옷에 충실해지다 보니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제1 독서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성인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어린양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 겉옷을 빨았다는 말은 그분의 가죽을 입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털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하선이 왕의 옷을 입으려면 왕은 죽어야 합니다. 왕이 살아있으면 왕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신이 되도록 자리를 비워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림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죽음으로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마치 왕의 옷을 입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제 깨끗해지기 위해 내가 그리스도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처럼 되어갑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는 그분을 입는 것을 넘어서서 그분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만약 왕의 옷을 입고 못 된 왕의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요? 폭군이 될 것입니다. 왕의 옷을 입었다면 자신에게 옷을 벗어준 그 대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처럼 됩니다. 한 번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말과 행동과 눈빛까지도 그분을 닮아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분을 향한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더 웨이’는 안과 의사이고 일만 아는 톰이라는 미국인이 아들이 걸으려다 끝내 걷지 못한 산티아고 길을 걷는 내용입니다. 아들 다니엘은 달려오던 길을 잠시 내려놓고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고 나섭니다. 그를 공항에 태워주는 아버지 톰은 아들이 하는 일이 시간 낭비요 남는 것이 없는 삶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들은 삶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가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골프를 치고 있던 톰에게 전화가 한 통 옵니다. 생장에서 피레네산맥을 넘다가 아들이 실족사했다는 소식입니다. 아내를 잃었던 아버지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바쁜 일정을 접어놓고 프랑스 생장으로 날아갑니다. 

그곳에는 아들이 그 길을 걸으려고 준비한 배낭과 옷, 신발, 그리고 생장에서 한 개의 스탬프만 찍힌 종이와 지도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왜 그 길을 걸으려고 했는지 궁금했고 아들 대신 그 길을 걸어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동안 자신이 없으면 안 될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은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섞일 줄 알게 됩니다. 처음 만난 사람은 밤에도 남 잠 못 자게 괴롭히며 부스럭거리며 무엇을 먹는 네덜란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목적은 살을 빼는 것입니다. 또 담배를 입에 물고 자신보다 까칠한 한 여자를 만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낙태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동료가 되는 사람은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하나도 유명하지 않은 작가입니다. 작품의 소재를 찾기 위해 이 길을 떠난 것입니다. 처음엔 좀 이상하게 보이던 이 사람들과 조금씩 친해지게 됩니다. 그 길에선 도움을 받을 때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동무도 되어주고 싸움도 말려주고 잃어버린 가방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톰은 인생을 걷는 길이 무언가 성취를 이루는 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이는 능력을 배우는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들의 모습을 비로소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처럼 된 것입니다. 나중에 증명서를 받을 때는 아들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결국 아들이 걸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옷만 입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을 보아야 합니다. 매 순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들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진정 아들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시며 아버지와 당신을 대등하게 여기셨습니다(요한 5,18). 이것이 은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이 되는 과정은 이 두 개가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 것은 은총을 받는 과정이고 그리스도를 보는 과정은 진리를 습득하는 과정입니다. 이 두 과정을 통해서만 오늘 복음에서 “행복하여라!”라는 축복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성인이 되는 길, 그것은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라 믿으며 그리스도를 매 순간 보고 따라서 하려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동차경주 선수가 승부를 거는 구간은 직선 구간일까요? 곡선 구간일까요?

 

사실 차들의 성능은 거의 비슷해서 직선 구간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아 추월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앞차를 추월할 수 있는 구간은 곡선 구간 뿐입니다. 이 구간에서만 자동차경주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삶도 직선과 곡선 구간이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직선 구간만 계속 있으면 좋겠지만 곡선 구간도 계속해서 우리 앞길에 놓여있습니다. 자기 개인의 문제, 가족 문제, 직장 문제,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 등등 너무 많은 곡선 구간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자동차경주처럼 이때가 나의 실력이 진정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자동차경주에서 승리를 위해 곡선 구간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곡선 구간에서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속도를 내야 앞차를 앞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가져다주는 많은 문제를 담은 곡선 구간과 같은 순간에 속도를 내서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자리에 멈춰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직선 구간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차이는 곡선 구간에서 결정됩니다. 고통과 시련 등의 문제는 내가 다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가치를 알리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에 대해 말해줍니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많은 돈을 갖게 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직 세상의 재화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이가 엄청난 유산을 갑작스럽게 물려받았습니다. 과연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어린이는 돈보다, 자기를 보호해 주는 부모와 따뜻한 가정, 그리고 신나게 놀 수 있는 놀이터와 친구가 행복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드디어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는데 이제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때 높은 지위는 행복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건강해지는 것이 행복이겠지요. 
 
우리는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성인은 이 세상에서의 상이 아닌, 하늘에서 받을 상만 바라보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 자아에 국한된 세계를 벗어나는 것.

- 허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기뻐하고 줄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삶과 죽음 이 모든 것의 전부가 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죽은 모든 이의 영혼을 위해 기억하고 기도하는 위령 성월의 첫날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우리보다 먼저 살다 떠난 성인(聖人)들이 계십니다. 죽어야 하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어떻게 살다 떠나갈 것인지를 묵상하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은 언제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이란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사람의 길이 곧 하늘의 길이 됩니다. 죽음은 늘 우리들 삶 앞에 있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구원의 삶을 살았던 성인들의 삶을 기억합니다. 절망도 희망도 하느님을 향했던 기도였습니다. 성인들의 몸부림과 성인들의 삶에서 건지려했던 사랑의 기쁨을 기억합니다. 성인들의 전환점과 자신들의 약함을 끌어안는 사랑의 방식을 배웁니다. 

사랑의 방식은 기억하고 기도하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살아가는 방식이 또한 기억하고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성인들의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삶의 이유가 사랑임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최초도 최후도 하느님 사랑이 있었기에 모든 성인은 찬미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기쁘게 사랑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든 성인들의 마지막 봉헌을 기억하는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입니다. 모든 성인들의 따뜻한 삶에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성인들의 통공(通功)처럼 기억과 기도는 서로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진실로 믿고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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