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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1/15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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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사람은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으리라.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친구를 해치지 않으며,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악인을 업신여기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존중한다네.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 않으며,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 받지 않는다네. 이 모든 것 행하는 그 사람, 영원토록 흔들림 없으리라.

 

2022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묵시 3,1-6.14-22)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을 것이다.

  • 오늘 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15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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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복음
루카 19장 1-10절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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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유재현 다니엘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5일 (화)
유재현 다니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5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회개를 받아들일 준비

 

오늘 복음 내용은 루카 복음서에만 등장하는 일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여정 가운데 예리코에서 일어납니다. 

등장인물은 예수님, 자캐오, 군중입니다. 자캐오는 로마 제국의 위임을 받아 국경 도시인 예리코의 세관 업무를 담당하던 세관장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캐오를 ‘민족의 반역자’,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자캐오는 예수님을 직접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키가 작아 군중에 가려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위를 쳐다보시고,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시기로 하십니다. 자캐오는 기쁨에 넘쳐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군중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며 투덜거립니다. 유다교 전통에 따르면,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행위는 방문자도 부정하게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캐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이의 재산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네 곱절’은 구약의 율법이 명하는 것 이상의 배상일 뿐 아니라, 로마법도 명백한 절도 행위에만 ‘네 곱절’의 배상을 적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캐오는 동족의 편견과 단죄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캐오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자캐오의 회개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라는 루카 복음서의 중심 주제가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죄인’이라고 단정한 이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죄인의 회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구원, 열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어제, 오늘 우리는 예리고에서 일어난 구원사건을 듣습니다. 눈먼 이가 보게 되면서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얘기를 어제 들었고, 오늘은 자캐오가 구원을 받는 얘기들 듣는데 자캐오의 경우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집안이 구원받는 얘깁니다. 헌데 구원받은 집이라면 구원받기 전에는 어떤 비구원 상태일까요? 

추측컨대 세 가지로 비 구원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가족 간의 불통이 그 하나이고, 이웃과의 불통이 그 두 번째이며, 하느님과의 불통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안의 불통과 비구원과 불행의 진원지는 자캐오였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가정에서 가장의 비중은 절대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자캐오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소설을 쓴다면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는 것과 세관장이었다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을 겁니다. 

작은 키의 열등감을 그는 세속적인 성공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키 작은 자기를 무시할 수 없도록 그는 돈을 많이 벌기로 작정했을 겁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어떤 때는 더러워도 참아야 하고 심지어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만 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도 해야 하고, 사기도 쳐야 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걷어들이기 위해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직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자기가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쳐 집에 들어오면 그는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고,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짜증을 부리고 막 화를 냈습니다. 그럴수록 아내와는 자주 다투고, 아이들은 무서워서 슬슬 피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은 친하게 지내는데 자기만 점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돈만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족들만이 유일한 사랑이고 의미였기에 거기서 위안을 받으려 했는데, 그래서 남을 짓밟고, 하느님마저 모르는 체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가족이 이것을 몰라주니 너무 야속하고 삶의 회의가 왔습니다. 

이 인생 최대의 위기에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예수님께서 예리고에 오셨고 풍문으로 들은 것이 정말인지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키 작은 그가 군중에 가려 주님을 볼 수 없으매 주님이 지나가실 길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그의 키 작음이 나무를 오르게 하고,.나무에 오르는 열망과 열성이 그를 주님 눈에 띄게 하였습니다. 작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산 것, 어쩌면 이것이 그가 일생 살아온 거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는 역시 무시하지 않고 올려다보실 뿐 아니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고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허용치 않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문이 열립니다. 

이렇게 한 번 문이 열리자 마음이 열리고, 곳간 문도 열립니다. 하늘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 이웃으로 향하는 문도 열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렇게 꽝꽝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따라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이 마음에서 메아리칩니다. 

“성문들아 너희의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오늘은 모 수녀원 창립 축일 미사를 봉헌해야 하기에 다시 말해서 그 축일 강론 준비해야 하기에 부득이 전의 강론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누가 희망이 되는 사람인가?

 

오늘 복음은 자캐오에 관한 내용입니다. 자캐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사람을 표현할 때 키가 작고 크고의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키가 작다는 표현은 분명 열등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키가 작은 콤플렉스를 땅을 정복하며 풀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콤플렉스라고도 합니다. 자캐오는 아마도 돈으로 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마음이 행복이 아니라 고통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빠진 집착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영재 발굴단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강요로 고통받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부모는 희망을 준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절망만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겐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줄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분명 돈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인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캐오는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 여긴 인물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무 위에까지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집에 들어가 묵으십니다. 자캐오는 예수님 덕분으로 재산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만약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우리를 찾는 이들은 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잘 안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돈을 좋아하지 않고 절제를 즐기고 겸손하면서도 행복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그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책으로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찾고 있었습니다. 자캐오가 추구하던 것을 똑같이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당 성물방엔 많은 책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제자처럼 사는 삶이 더 행복할 것이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시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속-육신-마귀를 끊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예수님이 보이고 그분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처음엔 하느님을 받아들였다가 차차 하느님을 멀리하게 된 세 명의 왕들이 나옵니다. 사울은 키가 크고 잘 생겼습니다. 하지만 열등감이 있었고 그것이 권력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언자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혼자 결정하여 제사를 지냅니다. 더 인기가 좋은 다윗을 시기합니다. 그러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잃고 더 길 수도 있었던 짧은 왕의 생을 마감합니다. 

다윗도 하느님을 받아들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색에 빠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까지 죽이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그의 집안엔 풍파가 잔잔할 날이 없었습니다. 아들에게서까지 도망치고 아들에게 아내들까지 욕을 보이는 수치를 당합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웠고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봉헌하기까지 했지만,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정략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까지 섬기게 되어 죄를 짓습니다. 돈은 결국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렇게 나라는 둘로 쪼개지게 됩니다. 

이러한 예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며 투덜거리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세속-육신-마귀에게서 전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가는 것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변할 마음이 전혀 없어서 예수님을 몰아내며 동시에 자신들에게 오시지 않는다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세 살 때 최혜연 아이는 어머니가 잠깐 가게 일을 하는 사이 사고를 당해 팔꿈치 아래의 팔을 잃습니다. 부모도 지켜주지 못해 고통스럽고 아이도 자신을 팔을 감추려고만 하였습니다. 열두 살이 된 지금은 다릅니다. 피아노를 아주 잘 칩니다. 물론 한쪽 팔은 손가락이 아니라 팔꿈치로 칩니다. 건반을 겹쳐 누르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쟁이가 되었습니다. 

혜연이의 삶을 바꾸어 준 것은 책 한 권이었습니다. 바로 손가락, 네 개로 피아노를 치는 이희아 씨의 『네손가락의 피아니스트』라는 책입니다. 이희아 씨는 심한 선천성 사지기형 장애인으로 태어나 양손에 손가락 두 개씩뿐이었습니다. 손가락 힘을 키우기 위해 어머니의 추천으로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연습하는 부단한 노력 끝에 1993년 전국 장애인예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습니다. 

2018년 1월 2일에는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된 각계 인사 240명 앞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한 뒤 아파서 참석 못한 가수 강산에를 대신해 ‘넌 할 수 있어’를 불렀습니다. 이희아 씨의 세례명은 히야친타입니다. 필요한 사람이 되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진 것이 없어도 몸이 고통스러워도 자랑할 것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무 위에 올라와서 나를 찾을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말하고 배가 고파 힘들다고 말하고 사람들이 무시해서 짜증 난다고 하는 사람은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가난하고 절제하고 낮은 자리를 차지합시다. 그리고 행복합시다. 이때 나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가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좋아한다’라고, ‘사귀자’라고 고백했지.

 

남학생에게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와 학교에 있을 때, 계속해서 이 여학생이 생각났고, ‘연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너무 부족한 것입니다. 이 여학생은 학교에서 퀸카로 통했고, 자신은 보통 남자아이보다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못생기고 뚱뚱했습니다. 
 
얼마 뒤, 이렇게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던 이 남학생은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자기와 제일 친한 친구와 여학생이 서로 사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와 자신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자기보다도 못한 것 같았습니다.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고, 외모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한다’라고, ‘사귀자’라고 고백했지.” 
 
생각만으로는 자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정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몇 마디를 못 해서 후회만 남기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아직은 아니다.’, ‘내 체면에….’ 등의 말을 하면서 용기 내지 못합니다. 큰 후회를 남길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리코 세관의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이러한 지위와 재산 상태는 구원받고 못 받는데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구원의 시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 뵈옵기를 원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세관장이며 부자인 그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십시오. 채신머리없다는 말을 듣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뵈옵기를 바라는 마음에 체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체면을 모두 내려놓고 용기 있게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자캐오는 주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로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약속합니다. 
 
회개의 표시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하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훨씬 더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규정은 자선은 재산의 20%, 부당하게 얻은 재산은 5분의 1일을 배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진심으로 회개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진심에 구원받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진심으로 주님을 뵈려고 노력하고 있을까요? 용기 없이 주님을 뵙지 못하는 이유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모험은 당신이 꿈꾸던 삶을 사는 것이다.

- 오프라 윈프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단풍잎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습니다. 내려오는 행복 내려오는 기쁨입니다. 부여잡고 있는 것 그것마저 내려놓아야 주님께 내려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래에 계시고 우리는 아래보다 높은 위에 늘 집착합니다. 순수한 오늘 순수한 행복은 주님께로 내려오는 행복입니다. 

행복의 시작은 존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있는 자캐오를 올려다 보십니다. 낮은 자존감의 자캐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냅니다. 자캐오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참된 회개는 이와 같이 존중에서 비롯됩니다.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시며 얼른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려오니 새로운 오늘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오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기쁘게 나눌 수 있는 자캐오의 기쁜 오늘이 됩니다. 회개는 존중의 삶으로 자캐오를 바꾸어 놓습니다. 

변화의 삶이란 나와 너를 존중하는 회개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기쁜 존중 기쁜 회개 기쁜 오늘 기쁜 만남이 됩니다. 존중의 잔치에서 얼른 내려와 예수님의 옆에 앉은 자캐오를 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좋으신 예수님을 향하듯 부여잡고 있는 욕심과 미움을 내려놓습니다. 내려오는 길이 우리가 사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존중하시는 것같이 존중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오늘로 기쁘게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기쁜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존중은 내려오신 주님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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