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1월 1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13.
반응형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러 주님이 오신다.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소리쳐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강들은 손뼉 치고, 산들도 함께 환호하여라.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

 

2022년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말라 3,19-20ㄴ)
    너희에게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르리라.

  • 제2독서
    (2테살 3,7-12)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 오늘 복음
    (루카 21,5-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13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복음
루카 21장 5-19절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3일 (일)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3일 (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팬데믹), 기후 위기, 세대 간 갈등, 성 평등, 빈부 격차, 물가 상승 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다양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성경 말씀은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줍니까?

제1독서에서는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와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같이 대조적인 내용의 예언을 듣습니다. 악인에게는 종말의 대심판이 내려지겠지만, 선인에게는 메시아를 통하여 치유와 구원이 실현되리라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잘못 이해하던 이들을 경계하고자 쓰인 편지입니다. 종말에 관하여 그릇되게 이끄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일상 속 노동의 가치를 거듭 강조합니다. 

한편 복음은 성전 파괴 예고와 종말에 닥칠 재난과 표징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입니다. 특별히 거짓 메시아와 종말에 대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닥쳐올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인류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 업적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선포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종말을 희망 속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에게 저마다 맡겨진 일상 속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지어진 자연 생태계와 화해하고, 나와 다른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물질로 환산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과 인내로 얻는 생명

 

오늘 주님께서는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하는 것을 보시고, 그것들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얘기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그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표징이 있는지 묻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허물어질 때는 정해져 있을까? 

그때는 누가 정하고 누가 허물까? 

그때를 정하시고 허무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때를 정하고 허무는 것이 실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리신 것은 하느님이시지만 실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파멸을 불러온 것이지요. 스스로 자기 몸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전쟁의 파괴가 있을 거라고 얘기하는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핵폭탄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니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대자연도 인간이 파괴하지, 하느님은 파괴하지 않으시며 술, 담배를 먹고 마약을 하는 것도, 우리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니며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도 우리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에 따라 우리와 세상을 창조하시고,정의 따라 심판하시는데 그것이 그분의 진리입니다. 

이 사랑과 정의와 진리를 따를 때 창조된 모든 것은 유지되지만, 인간이 이것을 따르지 않을 때 모든 파괴가 일어납니다. 곧 인간뿐 아니라 모든 것의 파괴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우리의 공동체가 언제 허물어지고, 우리의 지구가 언제 파괴되는지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희망을 놓지 않고 자신과 공동체를 구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흥정을 합니다. 의인 몇 명이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실지. 

이것은 의인 몇이라도 있으면 하느님이 전체를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의인 몇이 프란치스코처럼 허물어져 가는 공동체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와 우리가 사는 지구에 지금 프란치스코와 같은 의인 몇이 필요한데 그것이 너 아닌 나이고 우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나와 우리가 나서지 않고 누군가 나 아닌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할 때,그때 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나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고 자기를 따르라고 할 것이고, 그때 믿음이 약한 사람은 그 가짜 그리스도를 따랄 갈 것입니다. 

이것은 몸에 병이 들고 마음과 정신까지 약해진 사람이 의사의 말을 믿지 않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이 돌팔이 저 돌팔이를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믿고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나와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너 아닌 나이며 하느님임을 믿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모든 어려움과 혼란 가운데서도 인내로서 생명을 얻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법 : 그리스도의 말을 하라.

 

영화 ‘게임 플랜’(2007)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조 킹맨은 영화 내에서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입니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이기는 하지만 다른 선수들을 믿지 않고 독립적인 플레이를 계속해 우승 트로피는 따내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파티를 즐기며 솔로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딸이라며 한 아이가 찾아옵니다. 예전에 이혼했던 아내는 딸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조는 크게 당황합니다. 

딸 매디슨 페티스는 어머니가 갑자기 아프리카에 봉사하러 가서 어머니가 아빠 집에 있으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조 킹맨의 메니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조는 인기 절정의 미식축구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조 킹맨도 갑자기 나타난 딸의 존재로 생활에 균열이 생기게 되어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페티스는 아빠 조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끊임없이 묻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또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이고 당장인 인기와 돈과 명예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페티스는 언론 앞에서 아빠를 옹호하는 말을 해주기도 하고 그러는 가운데 조도 페티스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자 조금씩 더 솔직해집니다. 페티스 때문에 애인과 헤어질 위기에 처하자 조는 페티스가 엄마와 똑같다고 말합니다. 항상 불평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페티스는 엄마의 말을 전합니다. 아빠는 언제나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였다고. 페티스가 울자 조는 기타를 쳐 주며 페티스를 위로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다”를 외우며 이상한 복장을 하고 딸이 원하는 발레도 같이 해 줍니다. 

그러다 일이 발생합니다. 아이가 분명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는데도 디저트에 땅콩이 들어간 것을 모르게 페티스가 그것을 먹고 알레르기 발작을 일으킵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다행히 딸이 안정을 되찾자 페티스의 이모가 찾아옵니다. 사실 엄마는 6개월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뒤였고 아프리카에 단 것은 이모였습니다. 이모는 페티스를 미식축구에 미친 아빠에게 맡길 수 없다며 아빠의 양육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페티스도 아빠의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아 이모의 집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조는 점점 진지해집니다. 딸의 양육권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제 딸보다 사랑하는 건 없습니다. 축구를 포기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슈퍼볼 경기가 열리는 당일 매니저는 만약 경기에서 이기면 기자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할 때 “전 이제 패니 버거를 먹으러 가겠어요”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패니 버거가 스폰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페티스 생각에 좀처럼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던 조는 결국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이번 경기를 포기하려고 할 때 페티스가 나타나 아빠에게 힘을 줍니다. 아빠는 솔직하게 말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딸 페티스를 만난 것이라고. 그리고 경기에 나가 우승합니다. 기자의 질문에 “우리 딸을 데리고 집으로 갈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조 킹맨의 삶은 그 자체로 거짓이었습니다. 그가 솔직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딸을 받아들여 아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더는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때에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까요? 프랑스 속담에 험담꾼은 듣는 이들이 만든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기에 재림예수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교리를 몰라서 사이비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뱀의 거짓말에 넘어갔을까요? 그들이 거짓말쟁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왜 재산의 절반을 교회에 바쳤음에도 죽었을까요?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나에게 속삭이는 말을 받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아는 사탄의 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 뜻대로는 예, 아니요, 말고는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는 것 외에는 다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조 킹맨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진실할 수 없었고 남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진실 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임에도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지 못하면 인간으로 하는 모든 말은 거짓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45)

우리의 말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변한 나의 정체성으로 나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는 말이 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더욱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4-1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진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진리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요한 8,26)

마지막 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면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됩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이 되면 그들의 말은 거북해서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되는 길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내가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사라질 때 세상은 거짓 예언자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지금 사이비를 공부할 때가 아닙니다. 성체성사로 내 가 진리에 참여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를 버리고 그분의 말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좋은 공부는 없습니다. 내가 말하며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조금씩 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경험해야 할 세 가지

 

사전에서 어른을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다 자랐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그렇다면 만 19세가 넘으면 어른일까요? 여기에 자기 일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 외형적으로는 어른인데, 하는 모습은 철부지 애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른이 훨씬 넘었음에도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것을 힘들겠다고 부모가 대신해 줬기 때문입니다. 
 
정신 분석가 제임스 홀리스는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고통을 겪는 일. 
 
2) 자신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깨닫는 일. 
 
3)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 
 

이를 경험하지 못하면 자기중심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무조건 피하고 볼 것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더 큰 힘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어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어른답게 살고 있나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종말론적 훈계를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의 민족적인 자부심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모두 허물어진다는 것이지요. 성전의 멸망은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조국의 멸망을 뜻합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두려워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은 성전의 파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정신적인 혼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큰 혼란에 빠집니다. 또 이와 같은 혼란 뒤, 민족적인 혼란으로 전쟁과 반란이 온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큰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과 전염병이 생긴다고 하십니다. 고통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정신 차려야 한다면서 “무서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계기가 됩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려면 산고를 겪어야 하는 이치처럼, 제자들의 박해는 새 나라인 하느님 나라가 태어나는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라는 말씀을 새기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인내로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고, 매일 사랑하는 일을 한다.

- 김지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한 해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사랑입니다. 종말은 사랑입니다. 삶의 마지막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사랑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소중한 구원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은 인내가 필요하고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가장 소중한 기쁨입니다. 

생명은 기다림과 인내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여정의 끝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삶의 방향을 알게하시는 하느님의 인내와 사랑입니다. 인내는 우리를 자기중심과 자기만족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는 것이 탄생이라면 종말은 가장 좋으신 생명의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이 거듭 우리를 새롭게 하는 은총입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창조이며 종말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길입니다. 인격의 반성으로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사랑은 실천의 기쁨이며 성장의 변화입니다. 결코 정지된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새로운 삶의 뜨거운 시작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