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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9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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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일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2022년 10월 9일 일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열왕 5,14-17)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 고백을 하였다.

  • 제2독서
    (2티모 2,8-13)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 오늘 복음
    (루카 17,11-19)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9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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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복음
루카 17장 11-19절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윤상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2년 10월 9일 (일)
김윤상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10월 9일 (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입니까?

 

오늘 복음 이야기는 치유자이신 예수님보다 그분께 은혜를 입은 나병 환자 열 사람의 행동을 더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기에, 다른 이들과 교류 없이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였습니다(민수 5,2-3; 레위 13,45-46 참조). 

오늘 복음 속 나병 환자 열 사람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그저 자비를 청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와 다르게 그들을 바로 치유하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병이 다 나았음을 사제에게 공식적으로 확인받는 절차와 관련됩니다. 그들이 그분 말씀대로 떠났다는 것은 그분께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며, 사제에게 가는 동안 열 명 모두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치유의 수혜자는 열 명이었지만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이는 단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머지 아홉 명의 유다인 가운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명령을 잘 따랐을 뿐이라고 이해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셨고, 그들은 사제들에게 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이유일까요? 그들은 병이 나아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빨리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에 합류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치유되었을 때, 그들에게 예수님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입니까? 

사실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자비로 가득합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느 것 하나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에 인색한 듯합니다. 크든 작든,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치유의 단계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오늘 연중 제28주일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중요한 말은 나병환자, 치유, 감사, 찬미입니다. 그런데 치유를 받은 사람이 감사와 찬미를 드린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감사와 찬미를 드린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난 것에 비해 치유만 받은 이스라엘 사람 아홉은 예수님을 의사로만 만난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가장 쉽게 이해되는 것은,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임을 감안할 때 엄마에게 도움을 받은 것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때 더 고마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종종 부모의 사랑은 마땅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모는 자기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사랑에 감사하기는커녕, 많은 경우, 그 사랑이 못마땅하다고 오히려 불평불만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불평불만을 하는 딸에게 엄마는 불평불만을 하지 않습니다. 감사하기는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도 못마땅해하지 않으십니다. 엄마의 압도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상심하지 않습니다. 

상심(傷心)이란 무엇입니까? 

상처 입은 마음이란 뜻이니 상심한다는 것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감사합니다.’대신 불평불만이 나오는 것은, 주님께 상처가 되지 않고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가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유만 받은 이스라엘 사람과 구원을 받는 이방인을 보며 다시 한번 깊은 성찰과 반성을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건강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다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치유도 네 가지 차원이 있겠지요. 


1. 육신 건강과 육신의 치유. 

2. 마음 건강과 마음의 치유. 

3. 정신 건강과 정신의 치유. 

4. 영적 건강과 영적인 치유.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신만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더 치유 받았어도 기껏해야 마음의 치유를 받았겠지요. 혹 더 나아가 정신의 치유까지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봤자 그는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다가 죽을 뿐 저세상에서까지 구원받은 사람은 못됩니다. 주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의사로만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치유해주심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 바라고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이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라고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신의 치유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주님을 구원자로 만나고 있습니까? 나는 주님처럼 사람들에게 구원자를 만나게 하고 있습니까? 나 자신이 아직 구원자를 만나지 못했기에 병자들을 구원자께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미사의 지향은 오로지 ‘이것’뿐이어야 합니다.

 

김성제 선교사는 악마의 섬이라 불리는 뿔로라는 필리핀 극빈자 촌에서 아이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마약을 한다는 이곳, 살인과 강간이 판을 치고 평균 열네 살이면 아이를 낳게 된다는 이곳에서 김 선교사는 천국의 예배를 아이들과 만들고 있습니다. 

150여 명의 아이와 드리는 예배는 그야말로 눈물과 감사의 예배입니다. 헌금통이 없어서 탬버린에 동전을 넣지만, 아이들은 그 헌금이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이들에게 쓰이기를 바랍니다. 

한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저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또 다른 아이는 말합니다. 

“저는 오늘 생일인데 집에 먹을 음식이 없어요. 그래도 교회에 나올 수 있어 하느님께 감사해요.”

이런 눈물의 예배는 세 시간 정도가 드려지는데 천막을 치려면 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시간이 짧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그 부족한 환경에서도 어째서 이런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또 우리의 미사는 진정한 감사의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왜 감사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까요? 이런 아이들처럼 감사하는 신자들과 미사를 하는 사제는 또 얼마나 행복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믿음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구원에 이를 믿음에 도달하지는 않았다고 하십니다. 다만 돌아와 당신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사실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하나의 ‘미끼’입니다. 미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잡히는 물고기가 되려면 바늘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가 찔려서 피가 납니다. 그 피가 감사입니다. 우리가 미끼만 원하고 낚싯바늘엔 찔리기는 원치 않으니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서 나온 이야기 중 현수라는 청년이 수진이라는 아이를 유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빠 친구라고 하여 유괴했던 수진이는 사실 아버지 친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현수를 쫓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빠도 현수처럼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수는 일용 노동자였는데 손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되자 이런 일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수진이는 현수를 위해 대일밴드를 사 왔습니다. 이런 착한 아이를 유괴하려고 했던 자기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크게 뉘우치고 감사해합니다. 

수진이의 부모가 가진 재산은 하나의 미끼입니다. 현수는 이 미끼를 덥석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독이 있음을 몰랐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에 심장이 찔립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처지는 바뀐 게 없는데 그 사랑이 자신과 같은 가슴에도 와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때 자신의 처지는 낮아지고 사랑은 커집니다. 이때 나오는 감사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사랑을 믿은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합니다. 이는 나병이 낫는 것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나병이 나아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체는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는 그분이 나를 낚는 낚싯바늘임을 알게 됩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못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때 솟아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때 가지게 된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미사의 지향은 감사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을 치유해 주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이 인간을 찾아온 하느님임을 알면 그분께 치유되지 않았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사 때 감사만 나와야 구원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감사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성체는 악마의 섬과 같은 우리 마음에 찾아오신 하느님이십니다. 나에게 다가오신 분이 하느님이신 것 하나만으로 우리는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머지 아홉은 왜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을까요?

 

어느 단체로부터 강의 청탁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그날 오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이 단체 책임자 되시는 분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른 신부님께 강의를 부탁했는데, 제가 강의하는 시간에만 가능하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 강의 시간을 바꿔 달라는 부탁이었지요. 하지만 저 역시 그 시간만 가능했기에, 그 신부님이 강의하시고 저는 다음에 강의하겠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곧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신부님 화나셨어요? 그러면 그냥 원래대로 해주세요.” 
 
강의하러 가기 바로 전날 그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제가 아닌, 다른 신부님께서 강의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황해서 그 단체장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의사 전달에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라는 답장이 오더군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강의 준비도 열심히 했고, 강의에 필요한 준비물까지도 모두 사놓은 상태였는데, 이 모든 일들이 헛일이 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힘이 들어갔는지, 안경 닦다가 안경테가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또 문턱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계속해서 실수 연발입니다. 
 
안 좋은 생각을 하니, 안 좋은 일만 계속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좋은 것도 많습니다. 강의하지 않아도 되니,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말 교통 체증에 시달릴 일도 없습니다. 또 할 일이 많았는데 여유 있게 주말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강의하지 못하게 된 것,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이르시지요.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해서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르면 성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예루살렘 성전에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어서 예수님을 보고서도 멀찍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나병이라는 병으로부터 깨끗해진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나머지 아홉은 왜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영광이 이루어졌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깨끗해진 것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부정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만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순간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사랑하듯이, 용서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용서한다.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용서받은 기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하느님의 영광은 소중한 생명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생명의 영광입니다. 생명의 길은 치유의 시간으로 다시 빛납니다. 치유는 치유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더 큰 감사와 더 깊은 영광으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적극적인 삶으로 하느님을 향합니다. 당연하게 여길 것 하나없는 우리들 여정이며 우리들 생명입니다.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남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감사뿐입니다. 감사를 모르면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참된 감사는 안과 밖의 구분 없는 생명에서 시작합니다. 생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한 생명은 믿음이라는 정직한 집중 안에서 자기성찰이라는 기도가 됩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참된 치유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요. 감사와 영광의 편에 서 있는 구원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먼저 우리자신을 깨끗이 하고 우리 공동체를 구원의 공동체 영광의 공동체로 바꾸어 주십니다. 

일어나 다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좋으신 하느님을 향하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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