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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12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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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2022년 10월 12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갈라 5장 18-25절)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1장 42-46절)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12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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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복음
루카 11장 42-46절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우주 필립보 신부 강론

 

 

2022년 10월 12일 (수)
최우주 필립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10월 12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드러나지 않는 무덤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당대 유다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행복할 것 같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십일조의 세세한 규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에는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정작 그 규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구현해 내야 할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회당이나 잔치에서는 언제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즐기며 언제나 높은 사람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신을 봉분 없이 평평하게 매장하고서 어떤 표식도 해 놓지 않은 그런 무덤을 뜻하는데, 그것이 무덤인 줄 모르고 밟거나 접촉한 유다인들이 결국 부정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민수 19,16 참조). 성화의 직무자들이 오히려 자신의 더러움으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서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습니다. 지켜야 할 세부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서, 정작 사람들이 그 규정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도움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판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을 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갈구하며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구, 계명이나 규정의 본질을 망각한 채 형식적 준수만을 강조하는 태도, 겉과 속이 다른 모습, 경건함을 가장하는 태도,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의 고충과 힘겨움을 외면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만일 이런 모습들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예수님께서 불행하다고 선언하신 그들 못지않게 우리 또한 매우 불행한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다가 독서를 가지고 저를 성찰하고 여러분과 나눔을 할까, 복음을 가지고 저를 성찰하고 여러분과 나눔을 할까, 잠시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고민할 때면 저는 종종 고민에 머물지 않고 주님 앞에 잠시 그냥 머물곤 하는데 오늘도 그렇게 좌정하고 있었더니 즉시 실마리가 풀렸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불행하다고 선언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가 바로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육에 이끌리는 사람이라고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육이란 무엇이고, 육에 이끌리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가 관건인데 육에 이끌리는 사람이란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는 사람, 그 전에 당연히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지 않고 이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는 자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온갖 교만과 헛된 영광을 조심합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지혜와 육의 관심사에서 우리 자신을 지킵시다. 실상, 육의 영은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가 바로 이런 사람이고 제가 이러하지 않습니까? 이어서 프란치스코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겸손과 인내,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하며 참된 평화를 얻도록 힘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한 두려움과 신성한 지혜와 신성한 사람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성령의 열매가 이러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그런데 육에 이끌리는 사람과 영에 이끌리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저를 돌아보면 어떤 때의 저는 지극히 육적이고, 어떤 때의 저는 영적입니다. 

어떤 때의 저는 사랑과 선의와 호의를 가지고 있고, 어떤 때의 저는 미움과 분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에 항구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육의 영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이끌리기도 하고, 육의 영에 이끌리기도 하는 건데. 아마 여러분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영이 꺼지면 우리의 지향은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향할 것이며, 헌신의 영이 꺼지면 우리의 사랑은 이웃을 향하지 않고, 자신을 향할 것이며,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육의 행실,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이 우리의 행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을 잃는다면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는 것이고, 우리가 정신을 차린다면 기도와 헌신의 영을 다시 불붙이는 것임을 다시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은 우리를 낮추시는가?

 

‘가을동화’(2000)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린 준서가 태어난 동생을 보기 위해 신생아실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후 신생아실 침대에 누워 있는 자기 동생과 다른 아이의 이름표를 바꿔 놓습니다. 다른 아이가 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 후 14년, 은서는 중학교 1년생 준서는 3학년이다. 윤 교수 부부의 사랑을 받으며 두 아이는 남매로서 행복하게 생활합니다. 둘은 정말 행복한 남매입니다. 그러나 서툰 자전거 솜씨로 준서를 쫓아가던 은서가 차에 치이면서 준서와 은서의 행복은 깨지고 맙니다. 부모와 혈액형이 둘 다 O형인데 은서는 B형인 것입니다. 추적해 본 결과 은서는 작은 식당을 하는 순임네 딸이었습니다. 

은서는 그동안 순임네 딸인 줄로만 알았던 신애와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신애는 14년 동안 가난하게 산 것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은서를 따돌립니다. 은서는 생일에 외톨이가 되어 홀로 바닷가에 갑니다. 그런데 오빠는 신애의 생일에 있지 않고 홀로 있을 은서를 찾으러 바닷가에 온 것입니다. 

남매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이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어쨌거나 한 명은 그 집에서 나가야 합니다. 가을동화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사랑 이야기가 되기 위해 은서는 몹시 가난하고 험한 곳으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은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루카 11,45)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욕’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라는 신랑 앞에서 그들이 신부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신부가 될 수 없다면 창조자의 본성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창조자만 영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아드님을 지옥까지 낮추셨습니다.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으려면 하느님께서 한 분은 남자가 한 분은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의 역할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여자의 역할은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 낮아짐이 없이는 창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창조는 양과 음, 하늘과 땅이 만나 역동적인 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를 임신하기 위한 부부의 관계와 같습니다. 여기서 여성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녀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왜 아드님을 지옥의 고통까지 떨어뜨려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과 극이 만나지 않으면 창조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앞에서 낮아지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당연하다 여겨야 합니다. 그분이 진리이시면 우리는 거짓이고 그분이 빛이시면 우리는 어둠입니다. 그분이 선이시면 우리는 악입니다. 이것이 거북하면 그분과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창조자의 신부가 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루르드의 샘물은 수많은 병자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기적의 물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샘물이 어떻게 솟아나게 되었는지 알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욕당하는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성모님께서 베르나데트에게 아홉 번째 발현하셨을 때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딸아, 지금 샘으로 가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 그 가까이에서 자라는 풀을 먹도록 해라.”

베르나데트는 성모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시체를 태우기까지 하는 매우 더러운 곳이었습니다. 그 흙탕물을 먹고 거기에 난 풀을 먹고 그 물로 자기 얼굴과 손을 씻는 일은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아이가 되는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순종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지만, 그 자라에서 샘물이 솟았습니다. 지금도 하루에 120,000만 톤이 솟습니다. 그 물을 마시고 베르나데트는 천식이 치유됩니다. 이후에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멸시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당신 창조자의 본성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고통과 멸시와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 앞에서 고통과 낮아짐은 창조와 구원의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할까요? 부정적인 생각을 할까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할까?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을 할까요? 많은 학자의 의견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로 생존 능력 때문입니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하늘 위로 날 수도 없고,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수도 없었습니다. 또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서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날카로운 이빨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덩치도 초식동물보다도 작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앞에 사나운 맹수가 다가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긍정적인 생각으로, ‘저 맹수는 나와 친구가 될 거야.’하며 다가갔을까요? 아닙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힘차게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부정 편향성이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잘 보이고, 상대방이 잘해준 것보다 못 해준 것이 더 생각나는 것입니다. 칭찬의 말보다 비난의 말이 더 오래 기억나는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존의 문제로 부정 편향성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적들을 만들어 피곤해지고, 혼자 살기에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전히 부정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진화가 덜 된 것이 아닐까요? 진화가 잘 된 사람은 현대에 맞게 긍정 편향성을 더 많이 지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 편향성을 이제는 긍정 편향성으로 바꿔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나를 지켜주시는 함께해주신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세상을 더 쉽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를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왜 불행하여라 라고 선언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긍정 편향성이 아닌, 부정 편향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까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 좋아하는 허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율법 교사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를 자세히 규정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이 규정을 면밀하게 지켜야 했고, 그것을 지키려면 몹시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규정을 제정한 율법 교사는 그 규정들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켰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규정들을 만들어 일반 백성에게 강요하곤 했지요. 진정한 사랑의 모범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이웃을 부정 편향으로 이끈다면 우리에게도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이제는 긍정 편향으로 이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무언가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면 바라보는 대상이 바뀔 것이다.

- 웨인 다이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무덤이 아니라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어두워지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불행하다는 사실도 모른 체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불행의 씨앗이 우리자신의 거짓으로부터 시작됨을 깨닫습니다. 대체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무덤같이 우리자신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과 아집의 모순덩어리만 키울 뿐입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멋진 시작입니다. 사랑은 삶의 모순을 멈추고 새로워지는 실천의 기쁨입니다. 행복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느님과 우리의 정직한 관계입니다. 참된 종교는 정직한 관계와 올바른 실천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신앙인이 올바른 실천을 잃어버리면 이기적이 되고 아집에 빠지게 됩니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입니다. 건강한 일치는 무덤같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정되어 있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모순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임없이 바로잡아 가는 여정입니다. 

이 섬과 저 섬을 이어주는 다리를 볼 때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삶으로 다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결심합니다. 누군가에게 불행의 무덤이 아닌 행복의 다리가 되는 행복한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바로잡아야 할 대상은 언제나 먼저 제자신이며 바람직한 길은 교만과 아집이 아닌 사랑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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