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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19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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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

 

 

2022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뼈로 가득 찬 계곡으로 데리고 가시어 마른 뼈들을 살리시며,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예언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19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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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22장 34-40절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양지훈 F.살레시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19일 (금) 매일미사
양지훈 F.살레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8월 19일 (금)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어릴 적 캄캄한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던 별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십계명 가운데서 한 계명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십계명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법, 하느님께서 돌판 위에 직접 새겨 주신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십계명이 아닌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한 구절씩 선택하셨습니다. 

십계명은 부정형의 엄중한 명령문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계명,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놀라움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본래의 질문은 가장 큰 계명 하나를 뽑아 달라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에 이어 둘째 계명을 더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서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과 같다고 하십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그 두 계명을 다르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만 하고 살 수 없습니다. 

기도와 침묵, 피정과 묵상을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 내적이며 영적인 삶을 가꾸는 일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경향을 낳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가 사람들에 대한, 또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성경의 전통, 교회의 가르침에서 모두 동떨어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은 사랑의 원동력인 하느님 사랑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율법의 가장 중요한 두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가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묻고, 주님께서 첫째와 둘째가는 사랑을 말씀하셨지만 둘을 하나로 묶으면 사랑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구분하기도 하고, 사랑에 차등을 두거나 어떤 사랑에 더 집착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하고,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거나 말로는 하느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웃 사랑밖에 할 줄 모르고, 그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두 사랑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가르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같지 않겠지요.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보다 앞서든지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최 재우나 최 시형이 얘기하듯 사람이 곧 하늘임을 깨친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불교의 불이사상(不二思想)처럼 사람이 하느님과 둘이 아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친 사람에게는 사랑도 갈리거나 나눌 수 없는 하나이고 같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도 당신과 아버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시고, 당신과 우리도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시고 우리도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시며, 그럼에도 둘로 갈라지고 나뉘었으면 하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거나 나누지 않고 구별과 나뉨이 없는 사랑을 합니다. 

왜 하느님을 이웃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진짜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되기라도 하는가요? 

어쩌면 이웃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사랑을 변명하거나 하느님 사랑은 받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런 사랑을 감추려고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요? 돈 없는 사람이 그것을 감추려고 허세로 돈을 더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부모만 사랑하는 그런 사랑, 부모보다 형제를 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부모보다 더 그런 사랑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다만 모든 사랑의 원동력인 하느님 사랑 없이 이웃을 사랑할까 봐 하느님 사랑이 첫째간다고 말씀하시는 그 뜻을 우리는 오늘 알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탄이 방해하는 첫 번째 기도 : 식사 전 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의 첫째는 하느님 사랑이고 두 번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인간이 이 계명을 지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질투 나서 보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방해하는 기도가 무엇일까요? 이것만 하지 못하게 하면 인간이 계명을 지키게 하지 못하는 데 거의 다 한 것이 됩니다. 

지금의 멕시코에서 번성하였던 아스테카 문명이 있습니다. 이 문명은 상당히 발달한 지식을 가졌었습니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사람을 죽여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인육을 자기 백성들에게 먹이는 일도 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조사에 따르면 황의 생일 때 500만에 가까운 백성을 먹이기 위해 20~30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남자 한 명당 가격이 5천만 원이나 했다고 하니 백성들은 임금에게 감사해야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임금이 주는 음식에 감사하면서 왕이 하는 행위 또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도 자녀들에게 타인을 해치며 그로부터 얻은 획득물을 주어 먹여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먹는 것을 주는 대상에 감사하면 그 대상이 하는 일을 긍정하는 것이 되고 그러면 그가 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그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족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사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이런 시스템을 허물어뜨리고 다른 존재에게 양식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당시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Cortes)가 멕시코에 도착하였습니다. 군인은 600명 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600명으로 사냥에 최적화된 500만의 아스테카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말린체(Malinche)입니다. 말린체는 귀족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새엄마가 유산을 자기 아들에게만 물려주려 했기에 말린체를 몰래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말린체는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나서 결국 코르테스의 통역관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스텍어, 마야어는 물론이요 스페인어까지 능통하였습니다. 그녀는 코르테스에게 자신이 협조하면 나중에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는 그런 문화를 없애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코르테스는 그녀에게 그것뿐만이 아니라 스페인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말린체는 아스테카의 제물 사육장으로 사용되는 수많은 부족에게 스페인에 협력하면 더는 사냥당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렇게 많은 부족들이 코르테스와 연합하게 되었고 덕분에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문명을 허물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말린체는 원주민으로서 공식적으로 첫 번째 세례를 받고 첫 번째 메스티소(원주민과 스페인계 혼혈)를 낳았으며 첫 번째 스페인 귀족이 됩니다. 자신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사람을 잡아 바치고 그것을 먹는 문화를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주시는 하느님의 체제로 변화시키려 했던 인물입니다. 이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를 통해 그렇게 내어주시는 양식이 당신의 살과 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식사할 때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사랑이 곧 자신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사탄은 “이건 네 부모님이 고생해서 주신 거야!”, 혹은 “네가 번 것으로 네가 먹는 거야!”라고 자신과 인간에게 감사하게 만듭니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자아에 감사하는 것이고 뱀의 시스템을 긍정하게 됩니다. 부모에게 감사하는 사람도 부모의 부족한 면까지도 그 음식에 감사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은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밥을 주는 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밥이 자신의 살과 피일 수 있다면 그 밥을 주는 이은 창조자입니다. 창조자만이 자신 안에서 양식이 솟아납니다. 피조물은 타인을 죽여서 그것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에 감사하면 그 시스템을 긍정하고 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체성혈을 믿고 영해야 하는 이유이고 식사 전 기도 때, 마치 작은 미사를 거행하는 것처럼 주님께 감사하며 먹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식사 전 기도를 마치 성체를 영할 때의 그 마음으로 하고 식사한다면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은 그리스도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꼰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돈만 내고 사라지면 된다.

 

단정 짓는 태도를 보이고, ‘요즘 젊은 애들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을 어떻게 부를까요? 듣자마자 답이 나올 것입니다. ‘꼰대’라고 말입니다. 이 ‘꼰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젊은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또 상대에게 의견을 묻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했는데도, 아들에게 “아빠는 꼰대 같아.”라는 말에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꼰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돈만 내고 사라지면 된다.’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자신이 이제까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한 것뿐인데, 이런 말을 했다고 ‘꼰대’ 취급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하십니다. 또 너무 화가 나서 ‘요즘 젊은것들’이라고 했다가, “그러니 꼰대지.”라는 말을 들었다며 세상 살기 힘들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존경받는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단정 짓는 말을 하고, 요즘 세대를 비판해도 꼰대 소리를 듣지 않는 어른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키워나가면서 자기만의 영역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역이 없으면 쉽게 ‘꼰대’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영역이 있습니까?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영역은 자기만의 소중한 영역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에 동참하며 만드는 영역은 ‘꼰대’보다는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존경받는 어른이 되도록 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따르는 것을 몹시 어렵게 만들었지요.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었지만, 613개의 조항을 지키느라 다른 것들을 도저히 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율법 학자가 한 것입니다. 당시 종교 생활의 고민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큰 계명을 뒤로 하고 자질구레한 외부 생활 규율에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면서 이 사랑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잘 실천하는 이는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진정한 이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을 안겨 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봉사다.

-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 37)

 

사랑이 한참 부족한 우리들 관계이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할 사랑의 시간임에도 우리에겐 사랑이 없다. 사랑으로 사람이 되어간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사랑에 목말라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참된 사랑은 외적인 욕망의 충족에서 벗어나 내적인 사랑의 기쁨을 알게한다. 이와같이 진정한 삶의 의미는 참된 사랑의 관계에 있다. 

다시 사랑으로 우리를 정신차리게 하신다. 비뚤어진 우리의 사랑을 바로잡아 주신다. 하느님 사랑이라는 첫째 계명은 예수님 사랑을 일깨워 주시며 그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어 주신다. 

사랑의 정신 사랑의 실천이 살아야 이 모든 것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사랑의 계명은 모든 관계의 모순을 극복하게 하는 참된 정신이다. 정신이 살아야 삶도 건강하다. 사랑이 생명이고 실천이 정신이다. 

첫째 계명은 우리가 가야 할 생명의 길이다. 이 생명의 길 안에 영원한 사랑이 있고 아름답고 착한 기도가 있고 맑은 마음이 있으며 굳센 실천이 있다. 모든 사랑의 중심에는 하느님 사랑이 있으며 이 중심을 지켜가는 사랑의 정신이 있다. 다시 하느님 사랑을 향하는 사랑의 새날이다. 사랑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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