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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1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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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2022년 8월 17일 (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17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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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20장 1-16절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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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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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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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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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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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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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양지훈 F.살레시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17일 (수)
양지훈 F.살레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17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는 일꾼들의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세상의 통념과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대부분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남들이 일하는 동안 빈둥거리며 놀다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가 품값으로 지급되는 일을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 말씀에 나오는 주인의 생각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일꾼들을 부르러 광장에 나갑니다. 수확에 매진하였던 그는 일꾼들을 더 불러 모으기 위하여 적어도 네 번이나 더 집을 나섭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이고, 일꾼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포도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낮’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저녁’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주고자 줄을 세웁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들이 가장 먼저 불려 나가 품삯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생각과 주인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맨 먼저 나와 열두 시간씩 일한 일꾼들은 겨우 한 시간 남짓 일한 일꾼들이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맨 처음 나와 일한 이들에게도 나중에 온 이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주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에는 ‘공로’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은 공로가 아니라 일꾼들의 필요에 따라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행하시는 놀라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공로’의 종교, ‘보상’의 종교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선행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 두고 평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보상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공로에 따라 지불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워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은 수고하며 땀도 많이 흘렸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먼저 부름을 받고 응답한 이들은 맨 나중에 와서 품삯을 받은 이들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간 인생이 최고의 보상이고 감사한 인생이 아닌가?’

비유 속 포도밭 일꾼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 앞에서 의아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밭을 일구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은 꼭 공정하지 않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은 꼭 공정하지는 않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묵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님의 다른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은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늦게 한 시간밖에 안 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사랑이 악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너그럽고 넓은 하느님 사랑이라고 칭송할 만하지만 선인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오늘 비유에서 일찍부터 일한 일꾼들의 입장에서는 너그러운 사랑이 아니라 불공정한 사랑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그것은 불공정하다고 하는 사람을 선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참으로 선인 또는 성인이라면 악인에게도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을 찬양할 겁니다. 

우리는 공정한 것을 중요시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특히 공정을 제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매우 보수적으로 되어 가난한 사람이나 힘없고 능력 없는 사람도 모두 같이 잘 사는 평등 세상은 별 관심 없고 그저 세상이 공정하기만을 원합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인천 국제공항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화했을 때 많은 젊은이가 이러한 정부의 처사를 잘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시험 봐서 능력에 따라 들어가는 그런 공정과 어긋난다고 그리고 자기들이 그렇게 고생, 고생하여 들어갈 일자리를 뺏는 것이라며 반대했지요. 

그리고 상류층 자녀들이 부모 덕분에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 때문에 분노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상류층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의 능력도 능력인데 대부분 젊은이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공정하지 않고 억울하다고 하니 모순이지요. 

제 생각에 똑같이 일했는데도 정규직은 더 받고 비정규직은 덜 받는 것이, 그리고 똑같이 일하는데도 사내 하청 노동자는 덜 받고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눈에서 볼 때는 더 공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불의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오늘 얘기는 자본주의의 정의와 복음의 정의 사이에 그리고 능력주의의 공정과 사랑의 공정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그래서 오늘 일꾼들이 불평하듯 두 기준 사이에는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다른 자식보다 능력이 부족한 못난이라도 똑같이 굶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같고, 다른 자식들보다 늦게 일터에 나오는 게으름뱅이라도 늦게라도 일하러 나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비유는 구원의 막차를 타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일찍 세례를 받고 일찍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도 있지만 죽기 전에야 세례를 받고, 실컷 잘 놀다가 나이가 꽉 차서 수도원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늦게라도 세례받고, 늦게라도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시기하거나 억울하게 생각지 말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세속의 쾌락이나 행복을 기준으로 하면 일찍 세례받고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이 늦게 세례받고 수도원 들어오는 것보다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기준으로 보면 일찍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이 그렇게 고역입니까? 일찍부터 복음을 사는 것이 불행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렇게 고역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이 시키는 일과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차이; 일이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거나!

 

‘내일의 죠’(1980)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죠는 본래 길거리에서 주먹 쓰기를 좋아하는 건달이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코치가 그를 훌륭한 권투선수로 키워냅니다. 그런데 죠에게는 항상 내일을 향한 목표가 생깁니다. 일본 챔피언을 꺾는 것을 넘어서서 세계 챔피언이 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힘든 과정을 거칩니다. 자신의 라이벌과 경기하던 중 라이벌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큰 실의에 빠져서 사람의 얼굴을 때리면 구토합니다. 큰 노력으로 동양 챔피언이 되고 세계 챔피언과 시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손이 떨리는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챔피언전에 나서지 말라고 청합니다. 그렇지만 죠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꿈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접전을 펼치고는 숨을 거둡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후후…. 불태웠어…. 모두 새하얗게….”

다 타버린 연탄재가 연상됩니다. 뜨겁게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왔던 죠. 하지만 죠에게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다 타버린 연탄재에게 고마워합니까? 치워야 하는 골칫덩이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죠”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오늘 권투경기를 하는 것을 즐기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에 목적이 부여되면 그 일을 하며 자신을 소진합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이 그렇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직장인들이 그렇습니다. 일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면 지치고 소진되고 결국 꼴찌가 되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첫째였던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였던 사람이 첫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첫째이고 어떤 사람이 꼴찌인지 말씀해주십니다. 한 데나리온씩 자기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일당으로 내어주었을 때 고마워하는 사람이 첫째고 그것밖에 안 주냐고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꼴찌입니다. 그 이유는 일 자체에서 행복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실 때는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제가 유학을 나가서 공부할 때 목적은 학위가 됩니다. 학위가 목적이 되면 공부가 재미없습니다. 자신을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공부가 목적이 됩니다. 학위는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가며 학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그러면 공부하는 동안 자신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허태균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고의 착각’에 빠져있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시험을 보면 엄마도 같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귀의하여 잠도 자지 않고 치성을 드립니다. 왠지 그래야 자녀가 잘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힘이 들어서 아이들 시험이 끝나면 더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군 생활을 할 때 틈틈이 열심히 영어단어를 외웠습니다. 잠꼬대를 영어로 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로 사고를 내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었다면 그 자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즐기지 못하고 군 생활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꼴찌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임 씨는 두 아이를 하나는 서울대에, 하나는 카이스트에 보냈습니다. 유 씨는 아이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다가 미끄럼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었습니다. 도서관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온 적도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도서관에 가는 일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재미있게 읽게 하고 공부도 재미있게 하게 하였습니다. 공부하였으면 ‘폐인 데이’라는 것을 만들어 폐인처럼 게임도 하고 TV도 보는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공부한 시간보다 두 배를 놀게 했습니다. 공부가 목적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도 좋게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탕에 때 밀러 갑니다. 그런데 때는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떨어져 나갑니다. 굳이 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밉니다. 이런 사람은 목욕탕에 오래 못 있습니다. 목적만 달성하면 바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목욕탕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오래 즐깁니다.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고 사우나도 하며 잠도 잡니다. 그렇게 피로를 풉니다. 누가 목욕을 즐기는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하신다면 그분은 인간과 똑같이 우리를 이용하시는 분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더라도 그 일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 큰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떤 봉사를 하든 행복해야 합니다. 사제로 살면 사제로 사는 하루하루가 목적입니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 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열매가 맺힙니다. 결혼생활도 그렇게 자녀를 키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 하지 말고 그것 자체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게 지내라고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 정의와 세상의 정의

 

매달 마감에 시달립니다. 바로 이 책, ‘쓰담쓰담’ 묵상집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 다시 온 뒤에 후원회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매달 발행하는 묵상집입니다. 2016년 9월에 시작했으니,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묵상집의 모든 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 혼자 쓰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이미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을 써왔기에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감’이라는 단어에 힘듦을 매달 느끼고 있습니다. 
 
마감을 지키지 않으면 제때 묵상집을 발행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초조해지고 몸과 마음의 피곤함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지난 6월처럼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받고 회복하는 시간까지 길어지면 몸과 마음으로 더 힘들어집니다. 
 
솔직히 마감이 없는 경우, 글이 잘 써지지 않습니다. 편안한 상태가 아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자극받아서 글을 쓰게 됩니다. 또 마감이 있어야 그 날짜를 염두에 두고 계획성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삶도 마감이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이 죽음에 자극받아 더 발전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내 삶의 마감인 죽음을 바라보면서 더욱더 지금을 계획성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지금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바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눈으로 볼 때, 포도밭 주인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 모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 부분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는 그런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이른 아침에 장터의 인력시장에서 일할 일꾼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낮 기온이 너무 높아서, 이른 아침을 제외하고는 인력시장을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포도밭 주인이 찾아갔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선택받을 수 있었고, 그 희망으로 인해 후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세상의 정의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처사에 대해 우리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고마운 마음은 그냥 품고만 있는 게 아니라 꺼내어 놓아야 빛을 발한다.

- 변종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 20, 15)

 

적어도 하느님의 후하신 처사를 우리가 악용해서는 안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다는 엄청난 이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두루 살피시고 가장 좋은 시간에 우리를 초대하신다. 

언제나 어느 때나 후하신 하느님의 사랑법이다. 사랑 앞에 꼴찌도 첫째도 모두가 동등한 사람들이다. 포도밭의 한 가족들이다. 우리 삶의 가장 큰 행복은 후하신 하느님을 우리가 알게되었다는 행복이다. 행복의 한 데나리온을 갉아먹는 우리의 시기와 질투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연민은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신다. 사랑 앞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들 욕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내놓으시고 우리는 욕심을 내놓는다. 우리를 맞아들이시고 거두어들이는 분 또한 하느님이시다. 

모두가 가장 알맞은 때에 이루어지는 한 데나리온의 회개이다. 때에 맞게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참된 구원이다. 하느님께서는 욕심이 아닌 구원으로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신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하느님 중심이며 회개를 통한 행복이다.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의 오늘이다. 오늘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지금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알맞은 은총의 때이다. 후하신 은총 속에 너와 내가 있다. 가장 좋은 사랑을 주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포도밭을 구원으로 물들이시는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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