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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1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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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

 

 

2022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어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 비길 수 있다시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18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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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22장 1-14절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오준혁 엘리야 신부 강론

 

 

2022년 8월 18일 (목)
오준혁 엘리야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8월 18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초대

 

예수님의 비유의 중심 주제는 늘 하느님 나라이고, 이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잔치로 비유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 속의 혼인 잔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저녁 식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언제나 문을 잠그지 않고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의 잔치는 기쁨과 무상성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잔치에서 이런 무상성의 특성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누가 잔치를 연다고 초대하면 벌써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무엇을 들고 가야 하나?’ ‘얼마쯤 넣어 가야 하나?’ 나아가 ‘꼭 가야 하나?’ 등의 별의별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요즘 세상에서 공짜는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공짜라고 해 놓고 실제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입니다. 무상의 초대가 사라져 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성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모두 불러오라는 비유 속 주인의 말은 속상할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이가 초대받아 풍부하게 나누고 먹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잔치는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복을 마련하는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하느님 나라의 삶의 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잔치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거기서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 욕심만 차리고 저만 위하여 사는 사람이 내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 아는 이들 속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옷과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 옷, 곧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양식으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 음식을 즐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체험의 여러 단계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 

간땡이가 붓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면, 망령이 단단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임금의 초대를 그리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진정 그들의 임금이었다면 그 신하나 백성이 임금이 초대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을 우습게 생각한 것이고 아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를 생각하며 우리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성찰했고,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우선 두려움의 하느님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시초라고 했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겸손으로 인해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였는데 큰 시련을 겪음으로 인해 그 교만이 깨어지고 자기의 한계를 체험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다음의 하느님 체험은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나는 너무도 미천하며,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나는 너무도 죄인이며, 하느님은 지극히 영광스러우시고 나는 너무도 초라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초대하심을 대단한 영광으로 삼는 겁니다. 

그다음의 하느님 체험은 사랑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크고 두려우시며, 높고 영광스러운 분이실 뿐 아니라 참으로 자애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심을 더 나아가 체험하는 겁니다. 아버지 같으신 하느님에 어머니 같으신 하느님 체험까지 하는 거지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사랑하는 우리는 하느님이 보고 싶어 달려가고, 그리워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그다음은 기쁨과 즐거움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이 어머니의 품처럼 그립고, 편할 뿐 아니라 세상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분이십니다. 

이때의 하느님은 아마 연인과 같은 하느님일 것이고 이때에는 하느님께 기쁘고 즐겁게 나아갈 터인데, 솔직히 저는 이 정도의 하느님 체험은 아직 못했고, 성인들이 그러한 것을 보고 짐작을 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예복을 입지 않음에 대해서도 그 뜻이 무엇일까 짐작을 해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것이고 그러니 혼인 잔치에 먼저 초대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이고, 나중에 고을 어귀 길거리에서 초대된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초대된 이스라엘 백성이건 나중에 초대된 이방인이건 하느님의 구원 잔치에 초대되었다면 그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 예복이란 것이 바로 우리의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란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이요, ‘황공무지로소이다!’라고 할 때의 그 마음이요, 어머니에게로 갈 때의 그 그리움과 편안한 마음이요, 연인에게 달려갈 때의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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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시키는 일과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차이; 일이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거나!

 

‘내일의 죠’(1980)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죠는 본래 길거리에서 주먹 쓰기를 좋아하는 건달이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코치가 그를 훌륭한 권투선수로 키워냅니다. 그런데 죠에게는 항상 내일을 향한 목표가 생깁니다. 일본 챔피언을 꺾는 것을 넘어서서 세계 챔피언이 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힘든 과정을 거칩니다. 자신의 라이벌과 경기하던 중 라이벌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큰 실의에 빠져서 사람의 얼굴을 때리면 구토합니다. 큰 노력으로 동양 챔피언이 되고 세계 챔피언과 시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손이 떨리는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챔피언전에 나서지 말라고 청합니다. 그렇지만 죠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꿈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접전을 펼치고는 숨을 거둡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후후…. 불태웠어…. 모두 새하얗게….”

다 타버린 연탄재가 연상됩니다. 뜨겁게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왔던 죠. 하지만 죠에게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다 타버린 연탄재에게 고마워합니까? 치워야 하는 골칫덩이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죠”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오늘 권투경기를 하는 것을 즐기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에 목적이 부여되면 그 일을 하며 자신을 소진합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이 그렇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직장인들이 그렇습니다. 일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면 지치고 소진되고 결국 꼴찌가 되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첫째였던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였던 사람이 첫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첫째이고 어떤 사람이 꼴찌인지 말씀해주십니다. 한 데나리온씩 자기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일당으로 내어주었을 때 고마워하는 사람이 첫째고 그것밖에 안 주냐고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꼴찌입니다. 그 이유는 일 자체에서 행복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실 때는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제가 유학을 나가서 공부할 때 목적은 학위가 됩니다. 학위가 목적이 되면 공부가 재미없습니다. 자신을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공부가 목적이 됩니다. 학위는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가며 학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그러면 공부하는 동안 자신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허태균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고의 착각’에 빠져있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시험을 보면 엄마도 같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귀의하여 잠도 자지 않고 치성을 드립니다. 왠지 그래야 자녀가 잘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힘이 들어서 아이들 시험이 끝나면 더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군 생활을 할 때 틈틈이 열심히 영어단어를 외웠습니다. 잠꼬대를 영어로 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로 사고를 내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었다면 그 자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즐기지 못하고 군 생활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꼴찌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임 씨는 두 아이를 하나는 서울대에, 하나는 카이스트에 보냈습니다. 유 씨는 아이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다가 미끄럼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었습니다. 도서관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온 적도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도서관에 가는 일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재미있게 읽게 하고 공부도 재미있게 하게 하였습니다. 공부하였으면 ‘폐인 데이’라는 것을 만들어 폐인처럼 게임도 하고 TV도 보는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공부한 시간보다 두 배를 놀게 했습니다. 공부가 목적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도 좋게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탕에 때 밀러 갑니다. 그런데 때는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떨어져 나갑니다. 굳이 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밉니다. 이런 사람은 목욕탕에 오래 못 있습니다. 목적만 달성하면 바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목욕탕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오래 즐깁니다.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고 사우나도 하며 잠도 잡니다. 그렇게 피로를 풉니다. 누가 목욕을 즐기는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하신다면 그분은 인간과 똑같이 우리를 이용하시는 분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더라도 그 일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 큰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떤 봉사를 하든 행복해야 합니다. 사제로 살면 사제로 사는 하루하루가 목적입니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 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열매가 맺힙니다. 결혼생활도 그렇게 자녀를 키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 하지 말고 그것 자체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게 지내라고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너무 잘살고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행복한 집이 있습니다. 남편은 좋은 직장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자녀들은 모두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재테크를 잘해서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정은 행복한 가정일까요? 
 
아내가 보기에 남편은 회사 일 때문에 늘 바빠서 가정일에 소홀히 하고, 남편이 보기에 아내는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생각하고, 부모는 자녀가 전혀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 간에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행복한 가정일까요? 만약 이 가정이 행복한 가정으로 보였다면, 멀리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우울하고 답답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약간의 거리를 두어야 더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유럽에 가면 엄청나게 큰 성당들을 봅니다. 이 성당 전체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당과의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즉, 성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전체 모습을 사진기에 담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앞의 문제만을 바라보면서 정작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우리가 될 때가 많습니다. 바빠서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고 말하고, 여유가 될 때 열심히 하겠다는 공수표를 날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에만 집중하게 되면 결국 하느님을 보지 못해서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우선 유다인의 상류 사회에서는 잔치를 베풀고 친지들을 초청할 때 두 번에 걸쳐 초청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먼저 잔치 준비과정에서 일정한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준비가 다 된 후에 승낙한 사람에게 또다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잔치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절하면 커다란 실례가 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거절하는 사람에 대해 임금이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핑계는 모두 세속생활에 관한 사연이었습니다. 즉, 눈앞에 놓인 물질의 소유나 세상사에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이어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라고 해놓고서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혼인 예복은 바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비유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비록 자격 없음에도 구원의 잔치에 불렸지만, 그 잔치에서 즐기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생활이라는 예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떨어져서 하느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예복도 챙겨 입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지금까지 나를 살아오게 한 힘은 어떤 대상이 아니었다. 가장 힘든 때에도 내 인생의 희열은 가슴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순간의 ‘과정’이었다.

- 권영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실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 14)

 

부르심이라는 핵심에 도달하는 길은 우리가 부르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부르심의 본질이 곧 선택이다. 부르심은 막을 수 없고 선택 또한 막을 수 없다. 선택된 이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이와같이 부르심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실천의 예복이 중요한 여정이다. 무엇보다도 실천이 따라야 한다. 

실천의 선택이란 반성하며 희망하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선택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르심의 시간이다. 부르심이 부르심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선택 또한 아픈 것으로 드러난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부르심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선택이다. 같은 공간 다른 마음을 품고서는 부르심은 완성될 수 없다.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 비유의 이야기는 부르심에 충실한 이들의 나라이다. 아무리 좋은 초대도 우리자신이 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남의 잔치가 아니라 우리자신의 잔치이다. 삶의 전부를 걸어야 만나게 되는 부르심의 핵심, 단 하나의 사랑이다. 단 하나의 사랑이 선택의 잔치에 들어오고 있다. 

부르심 뒤에는 선택이 있고 선택 뒤에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이 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이 오늘 우리를 살게한다. 부르심에 감사하는 기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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