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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11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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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2022년 8월 11일 (목)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스라엘이 유배를 당하여 끌려갈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로 삼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시며 빚을 탕감받은 악한 종의 비유를 드시고는,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1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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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복된 클라라를 자비로이 이끄시어 가난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8장 21-35절, 19장 1절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주지환 요한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8월 11일 (목)
주지환 요한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8월 11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최민순 역, 시편 129[130],3).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잊으십니다. 반면 우리는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신자의 삶에서 가장 중심 기둥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인 마태오 복음 18장은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회개의 명령으로 시작하여 오늘 복음처럼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서로 약간 다릅니다. 마태오 복음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6,12)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앞서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곧 용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 마태오 복음은 주님의 기도 다음에 곧바로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6,14-15). 마치 주님의 기도의 핵심이 형제들에 대한 용서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1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용서의 범위가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현재 시제를 통하여 용서의 행위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용서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본능에 맞서 언제나 용서를 실천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면 할수록 얻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점점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용서가, 용서받는 이가 아니라 용서하는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점점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용서는 용서가 될 때까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오늘 베드로는 나에게 죄 지은 형제에게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일곱 번 정도를 생각한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은 일흔일곱 번이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는 용서가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미워지지 않을 때까지입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한 형제가 또다시 미워지지 않고, 간신히 용서했는데 또 죄를 지어도 화가 나지 않을 때까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는다.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말하길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천식으로 잃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용은 두말하지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는데, 수술비가 1,800만 원이라는 말에 그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당시 열 평짜리 아파트값이 1,000만 원이었고, 이상용은 650만 원짜리 전세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전셋값 세 배에 해당하는 수술비를 대겠다고 했으니 기절할 뻔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 생사를 넘나들었기에 그 아이의 비극이 남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미지 관리상 야간업소 출연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를 위해 야간업소 세 군데를 다니고 바자를 하고 돈도 빌려 결국 수술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수술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감격해 방송에서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자기 아들을 무료로 수술해주었다는 것은 밝힌 것입니다. 그러자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 부모들이 우리 아이도 수술시켜 달라며 이상용의 집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아이를 돕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한국 어린이 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해주기로 합니다. 그렇게 그는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주었습니다. 

하지만 1996년 11월 4일 한 시사 프로에서 뽀빠이 이상용의 충격적인 사건이 폭로됩니다. 뽀빠이 이상용이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빌미로 국민의 성금을 가로채 벤츠를 타며 40억 호화주택에 산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어마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심장병 어린이를 돕던 의인에서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희대의 파렴치범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이미지가 좋았을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무조건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체질적으로 정치를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교황님과도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터였습니다. 교황님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사흘 동안 이상용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검은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정치인이 그에게 고향 대전에서 출마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상용은 단번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치인들이 이상용에게 보복한 것입니다. 어느 날 우정의 무대 녹화를 끝내고 돌아오니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사실 1996년 당시 이상용은 20년 된 지프차를 타고 사는 집은 융자금이 막 상환된 상태였고 당시까지 수술받은 567명의 수술비는 거의 이상용 씨의 돈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이상용은 집 밖을 못 나갔고 우정의 무대는 폐지되었으며 수술을 기다리던 어린이들은 수술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전역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사망하였고 이상용 씨는 왼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당시 권력 기관들이 총동원되어 ‘심장병 어린이 재단’을 탈탈 털었지만 이상용의 공금횡령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문제는 이 무혐의 처분에 대해 보도한 언론사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뽀빠이 이상용이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나왔기 때문에 활동을 못 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이후에 이상용 씨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언대로 수중에 남은 돈 20만 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관광 가이드를 하며 딸을 시집보내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당시 그의 일당 3만 원이었고 가장으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CD를 만들고는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직접 팔았으며 즉석 공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춘천 MBC 사장 유수열 씨가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안다”라며 ‘강원 매거진’을 통해 이상용은 방송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철처: ‘뽀빠이 이상용 거짓 인성 논란?’, 유튜브 채널, ‘트롯 뉴스’]

미움은 죽은 놈이 산 사람을 때리며 자신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려는 행위입니다.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습니다. 이상용 씨가 그렇게 맞은 것은 살았기 때문입니다. 산 사람을 때려서 자신도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기에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라면 용서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상용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은 20명,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용서받았다는 믿음으로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것인지 용서하지 않을 것인지는 내 힘으로 살 건지 다른 누군가의 덕으로 살 것인지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려고 하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준 임금 덕분으로 산다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그러니 임금도 더는 그 사람에게 자신 덕분으로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느님 덕분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강론하다가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순간 성당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한 원로 신자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신부님은 “여러분, 저분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라고 하며 박수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이를 용서하실 수 있으셨죠?”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어, 원래 미운 인간들이 있었는데 먼저 다 죽었어….”

죽음이란 것을 통해 이 신자분은 미운 인간을 묻어버리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어떤 신자분이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미워 죽겠어요. 시집올 때부터 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셨어요.”

사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용서하시겠지?’라는 생각으로 그 자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 자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 두 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분은 미운 사람을 죽음이라는 것으로 묻어버렸고, 한 사람은 죽음으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산다면 이미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덕분으로 부활합니다. 이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탕감해 준 1만 탈렌트입니다. 이 1만 탈렌트에 100데나리온을 묻어버릴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1만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말은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1만 탈렌트로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습니다. 1만 탈렌트는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산 사람이 되게 합니다. 

같이 구원받은 사람은 나에게 잘못하지 않을 것이니 미워할 이유가 없고,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죽은 개에 불과하니 굳이 걷어찰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말은 아직 1만 탈렌트를 탕감받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아주 인상적인 글을 쓰셨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다.” 
 
이 문장에서 커다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에서 계속 감탄하는 사랑은 행복의 시간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커다란 행복만을 꿈꾸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하며, 이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하고, 내 가족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남부끄럽지 않게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쫓아가는 사람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전부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빈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행복을 자주 느끼고, 또 행복감을 길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엄청난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엄청난 성취는 순간의 만족에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상도 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귀한 시간입니다. 행복의 빈도를 높이는 것은 일상의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크고 대단한 일회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동태복수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즉,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가 아닌 용서하라는 새로운 윤리적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유다인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여 남을 용서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는 4번을 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새 나라의 새 법에서 몇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는지를 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을 생각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기대와 달리,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용서에는 한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빚진 것을 처리하는 한 왕의 처사를 하늘 나라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과 비교 설명하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커다란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용서에는 한도가 없기에, 계속된 용서를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용서 역시 계속해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인 것처럼, 우리가 용서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행복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위안은 극도로 힘들고 추한 순간, 서로에 대해 아름다운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다.

- 데이비드 화이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 22)

 

용서가 필요한 우리들 관계이며 우리들 세상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분명 용서이다. 용서는 가장 힘든 사랑의 실천이다. 용서는 사람이라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아프게 서로 물어뜯는 미움을 내가 먼저 만나는 것이다. 

반성으로 시작되는 용서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만나는 은총의 여정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힘이다. 믿음이 자라는 만큼 용서도 자라난다. 용서의 하느님을 다시 만난다. 용서를 모르기에 하느님도 몰랐다. 

마음으로 죽인 모든 미움들께 용서를 청한다. 미움에 갇힌 우리를 끌어올리시는 용서의 하느님이시다. 살아있는 이 시간이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행할 사랑의 순간들이다. 알량한 용서의 손익계산을 멈추고 뜨거운 하느님의 심장을 만나는 축복이다. 

용서의 강물에 너와 내가 있다. 나를 보지 않고선 너를 제대로 볼 순 없다. 용서의 하느님께서 용서의 새날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느님을 알게하는 용서이며 삶을 사랑하게 하는 용서이다. 하느님의 용서 안에서 용서를 모르는 우리들이다. 

어리석고 부족한 이 사람입니다. 저를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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