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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12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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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2022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라고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내를 버려도 되냐는 바리사이의 질문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1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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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9장 3-12절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8월 12일 (금)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8월 12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혼인은 믿음의 영역이다.

 

이미 이혼하였거나 혼인 생활의 위기로 고통을 겪는 신자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듣기 힘겨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생활이 파경에 이르게 되는 이유들을 이해하지 못하시나?’ 

그런데 이런 의문은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실패한 이들에 대한 단죄나 심판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부부의 결합이 깨지는 고통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율법적인 바리사이들과 논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옭아맬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처럼, 또 기회만 되면 언제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을 거슬러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말한 “이혼장”이라는 것은 ‘단절 증서’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혼인의 유대가 깨진 여인이 나중에 다른 남자를 만날 수도 없고, 만일 남자를 만나더라도 죽음의 형벌이 내려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을 보호하고 해방시켜 주려는 조항을 만들어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말씀의 핵심은 혼인과 이혼에 대한 법적인 다툼이 아니라 남녀의 성소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상기시키는 데에 있습니다(창세 1,27; 2,24 참조). 사람은 아무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서로 자기 몸처럼 대하고 돕고 협력하면서 사랑을 이루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고 혼인을 통하여 당신께 부르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혼인이 법적 문제로 귀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혼인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온갖 시련과 위기와 갈등 속에서 모든 부부가 매순간 다시 출발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면서 “한 몸”의 과업을 아름답게 이루어 가기를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에로의 부르심.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은지 묻는 것으로 시작하여 혼인 성소와 다른 성소에 대한 것까지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얘기의 전개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남편의 처지가 그렇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라고 하시는데 바리사이나 제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인간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옛날 결혼의 경우 어른 또는 집안이 결혼 상대를 결정한 것에 비해 요즘은 당사자들이 서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진정 어떤 것입니까? 결혼이나 수도 생활이 하느님의 부르심입니까? 나의 선택입니까? 아무리 하느님의 부르심일지라도 내가 싫으면 걷어찰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결혼이나 수도 생활 모두 부르심이지만, 그 부르심을 내가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나의 몫이고, 그렇기에 아무리 하느님 뜻이어도 내가 싫다고 걷어차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부르심보다 먼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보다 먼저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은총보다 먼저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거나 걷어차는 것은 자유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로 사랑하게도 하시고 싫어하고 미워하게도 하셨으며, 그 자유로 당신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신앙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부르시는 뜻을 사랑이라고 믿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신앙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치 않기에 걷어차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결혼이건 

비혼이건 

이혼이건 

졸혼이건 

또 수도 생활이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데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랄까 사랑은 행복이어야 하고, 신앙인이라면 그것을 사랑의 부르심이라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모든 관계엔 ‘압도적인 뜻’이 필요하다.

 

요즘 상영 중인 ‘한산-용의출현’을 보면 정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 수군의 56척 학익진 공격으로 왜군의 73척을 공격하여 왜선 47척을 격파, 왜군 1만 명을 전사시킨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이순신 장군은 육지에서만 사용하던 학익진 전법을 바다에서 쓸 생각을 했을까요? 

이순신 장군이 싸워야 했던 상대는 일본군만이 아닙니다.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원균이 그런 역할을 맡습니다. 원균은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이순신 장군을 믿지 못하고 그런 식이면 자신은 빠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우세한 일본에 원균까지 빠지면 이기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느 날 꿈을 꿉니다. 적군을 말을 타고 쫓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군이 사라지더니 커다란 성이 자신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익진은 이처럼 상대의 배를 성처럼 둘러싸는 전술입니다. 

하지만 조총과 월선을 통해 전쟁하는 빠른 일본 배의 추격을 따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학익진을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면 일본 배들이 조총으로 쏘고 배에 달라붙어 월선하게 됩니다. 그러면 활로 싸우는 조선군이 이길 가망이 없습니다. 이때 거북선이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대포가 있기에 멀찍이서 포격을 가하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이것저것을 다 따졌을 때 학익진만큼 좋은 전술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이순신에게 질투가 나고 반기를 들고 싶어도 전술에 대해 확신하고 있으니 원균도 이것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일치시키는 일은 서로의 이견조율이 아닙니다. 모든 의견을 압도하는 뜻입니다. 모든 이견을 압도하는 뜻이 그 공동체에 존재한다면 공동체는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그 뜻이 없다면 공동체는 분열로 무너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모세는 이유만 있으면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도 된다고 말했다고 따집니다. 예수님은 부부 사이에 사람의 이유가 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부부를 머리와 몸, 곧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하나가 되었다면 더는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 부부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 사람의 뜻을 압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자녀들이 서로 싸운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자녀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부모의 뜻이 필요합니다. 자녀들끼리의 이견조율로는 평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뜻이 자녀들을 지배할 때 자녀들은 사이좋은 사이가 됩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한 지붕 일곱 마리의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개들이 등장했습니다. 사실 주인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질투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싸우지 말라는 뜻을 압도적으로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개들에게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개들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강 훈련사는 주인이 압도적인 법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애정도 좋지만, 우선은 기계적으로 개들을 대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먼저 보여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규칙을 정확하게 강조하면서 따르는 느낌이 있죠?”

개들에겐 인간의 명령이 압도적인 뜻입니다. 개들끼리는 조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법이 되어주어야 개들에게 평화가 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부부에게도 형제간에도 교회 공동체에도 당신의 뜻이 스며들게 하십니다. 

부부는 관계의 완성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혼인 서약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셨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서약을 목숨을 걸고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 뜻을 찾읍시다. 그리면 그 사람이 맺는 관계에서 분열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품에 대한 설명이 없는 미술관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에 가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설명을 보면서 분명히 지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설명의 틀에 갇히면서 작품의 깊은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나만의 느낌과 감정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보는 작가의 의도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명 안에 갇히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구나.”라면서 생각의 지평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미술관 ‘인젤 홈브로이히’에는 어떤 설명도 붙어있지 않다고 합니다. 작품 자체를 경험하게 하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설립자 칼 뮐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 인생, 당신의 아이들은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인간관계는 절대로 설명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러나 설명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자기 틀에 그 설명을 맞추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설명되지 않아도 괜찮은, 그래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우리를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에 관해 묻습니다. 사실 이혼에 관한 율법은 십계명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신명기(24,1-4)에 이유만 닿기만 하면 여자를 내몰 수 있었고 그때 이혼장을 써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유배 생활을 거치면서 결혼을 일종의 매매 계약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되었고, 여자는 재산 소유권과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혼인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남녀 결합의 근본이념에도 어긋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혼인법을 없애고 하느님의 원래 뜻으로 되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신이 이해할 설명을 상대방이 해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상대방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부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의 말은 아무리 반복될지라도 이전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언제나 새로운 말.

- 윤경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 6)

 

혼인의 집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믿음도 하나이다. 군더더기를 버리니 하느님만이 남는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공동체의 사람이다. 공동체의 사람은 공동체를 통하여 성장한다. 맺어 주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의 관계를 이끌어 가신다. 

뼈와 살의 만남이며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태어난다.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 관계의 영역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 난간(難艱)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혼인은 일기예보 보다도 더 다채롭고 더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러기에 인내와 기도 대화와 소통 기다림이라는 용서가 필요한 여정이 혼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기에 내것이 아니다. 

재빠른 결론이 아닌 함께 성장하는 여정이다. 손님이 아닌 성숙해가는 주인공들의 결합이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혼인이 있고 출산이 있고 공동체가 있다. 

하느님 안에서 혼인의 길은 더욱 풍요롭다. 은총 가득한 혼인의 여정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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