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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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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8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

 

 

2022년 8월 9일 (화)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꿀처럼 단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이스라엘 집안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이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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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8장 1-5절, 10절, 12-14절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지환 요한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8월 9일 (화)
주지환 요한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8월 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곧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썼다고 알려진 마태오 복음사가는, 구약의 모세 오경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 설교(5,1─7,29 참조)를 필두로, 선교에 관한 말씀(10,1-42 참조), 비유로 전하신 말씀(13,1-52 참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18,1-35 참조),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미래에 관한 말씀(24,1─25,46 참조)으로, 이렇게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대응하려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 말씀의 첫 부분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맨 먼저 다룹니다. 

말씀의 첫 부분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에는 세상에서와 같이 교회에서도 큰 사람,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제자들의 본능적인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 자리를 탐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은 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의 연결성을 생각해 보면 모든 회개의 종착점은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마치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갓난아기처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믿는 이들의 겸손한 마음과 태도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이 우리를 참된 신자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비결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온갖 유혹을 떨쳐 내시며 하느님을 신뢰하신 원동력입니다. 이른바 ‘어른들’과 ‘주인들’만 가득한 공동체는 미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묵상하며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양 한 마리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오늘 비유에서 양 한 마리가 주인공입니다. 물론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시는 주님께서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인 주님께서 찾아 헤매시는 양이니 양이 주인공입니다.그것도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까지 찾는 양이니 진정 주인공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주인공 삼으시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중자애(自重自愛)하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진정 자중자애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하찮은 것에는 나를 내주지 말고 중요한 일에만 자신을 허용해야 합니다. 아무나 따라감으로써 길 잃은 양 되지 말고 오직 주님만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 사랑하시지만, 도매금으로 사랑치 않으시고 하나하나를 따로 사랑하시고 소매금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웃을 참으로 사랑치 않습니다. 이 말은 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아무도 제대로 사랑치 않고, 저 사람도 사랑한다면서 이 사람을 최선으로 사랑치 않고 이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저 사람은 사랑치 않고는 합니다. 

이는 마치 자기 아내를 사랑하면서 딴 여자에게도 눈길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을 피우는 것이고, 정결하지 않은 것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치 않는 핑계와 구실을 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흔아홉을 남겨 두고 한 마리를 찾으신다는 것은 아흔아홉을 버려둔다거나 내버리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사랑하시겠다는 말씀이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실하시고 정결한 사랑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를 사랑하되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할 것이며, 모두를 사랑하되 사랑할 때는 그 사람 하나만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고,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되 모두를 염두에 두고 사랑할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랑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랑은 포기한 사랑이 아니라 남겨 둔 사랑입니다. 남겨 둔 사랑은 남겨뒀다가 꼭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 : 길을 잃기 때문!

 

영화 ‘트렌센던스’(2014)는 한 인간에게 신적인 능력이 주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은 해소해줍니다. 

윌과 애블린은 과학자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절친인 맥스와 함께 인간의 뇌와 의식을 컴퓨터에 옮기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투자금을 받기 위해 연설하던 도중 윌은 신의 능력에 도달하려는 인간을 반대하는 세력에 총상을 입습니다. 총상은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총알에 독이 묻어있어서 과학의 힘으로는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블린은 남편을 보낼 수 없다며 맥스와 함께 윌의 의식을 컴퓨터에 저장해보자고 합니다. 죽어가는 남편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 저장했을 즈음 남편은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컴퓨터 속에서 말하는 남편을 만납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윌은 컴퓨터 안에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많은 지식과 힘을 원합니다. 은행 계좌까지도 다 뒤져서 자신들에게 돈을 쏟아부으려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자신이 접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맥스는 반대했지만 애블린은 찬성합니다. 그래서 윌은 인터넷에 접속하여 세상 모든 지식을 다 갖게 됩니다. 

윌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앉은뱅이도 걷게 하고 태생 소경도 다시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 사람도 고칩니다. 그런데 윌은 육체를 가지고 아내를 다시 안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뇌를 다친 사람의 의식 안으로 들어가서 아내를 만져봐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점점 윌이 낯설어집니다. 

그래서 윌은 이번엔 작은 입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예전의 모습을 복원하여 애블린에게 다가갑니다. 애블린은 망설입니다. 그러던 중 포탄이 떨어져 애블린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윌은 자신들을 향해 포를 쏘는 이들을 다 죽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애블린을 안고 자신도 잠이 듭니다.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생각해볼 만한 것이 많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신의 능력이 주어지면 그 능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인간이 되려면 인간의 능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을 늑대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인간의 능력을 주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의 생존을 위해 인간을 죽이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능력은 그 능력을 주는 이의 순종하는 자녀에게만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능력을 주는 부모가 그 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 길이 되어줍니다. 만약 늑대에게 자라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와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아이가 있다면 이 둘 중에 누구를 학교에 보내고 싶습니까? 당연히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아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적인 능력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쓸 줄 아셔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인간으라고 믿으며 능력을 달라고 하면 절대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을 조절할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어린이임을 고백해야만 하느님의 능력이 주어져서 이웃도 구원하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2)

그리고 잃어버린 어린 양의 비유 말씀해주시며 그 하느님의 능력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우영우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양들을 많이도 구합니다. 그 이유는 고래에게 영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래는 여기서 신을 상징하고 우영우는 그 신의 자녀입니다. 고래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인간의 능력 이상의 아이디어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우영우에게만 선물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종하는 마음이 없다면 능력이 주어질 수 없음을 잊지 맙시다. 그런데 그 어린이란 같은 본성의 자녀가 되었음을 전제합니다. 하느님 자녀의 능력을 지니고 살다가 하느님 나라에 가려면 내가 그리스도라 믿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로 믿기 위해서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린아이의 순수함

 

제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손자가 있습니다. 조카의 큰아들입니다. 이 손주 생일이라서 장난감을 사서, 선물이라며 주니 너무나 좋아합니다. 밥도 먹지 않고 장난감 가지고 놀 생각만 합니다. 솔직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데도 너무나도 재미있어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것뿐인데 뭐가 재미있을까요? 이 장난감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집중하는 것에는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집중하지 못할 때, 지루하게 생각하면서 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가 기도를 지루해하고 또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중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기도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집중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에 몰입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자신에 관한 불평불만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서열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고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취급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긴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어른들의 말참견을 할 수 없었고, “조그만 게 까불어”라는 말을 듣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이가 보여주는 순수한 집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 순수한 집중이 성 이냐시오의 해석대로 순진, 순박, 겸손의 모형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을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실천에 집중해서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너무나도 좋아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우리의 행동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지난 일을 진정으로 잊는다는 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지난 일과 화해하는 것이다.

- 한유석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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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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