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짓눌리나이다.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나약한 탓에 저지른 죄의 사슬에서 저희를 인자로이 풀어 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11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 20,10-13)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예레 20,10-13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요한 10,31-42
오늘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11일
유경선 첼레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6:49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믿는 이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유다인들에게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요한 10,32)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좋은 일’이란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2,1-12), 세 차례의 치유(4,43-54; 5,1-18; 9,1-41),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6,1-15), 물 위를 걸으신 기적(6,16-21)과 같이 하느님께서 이루시려는 구원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일들입니다.
유다인들은 이 일들을 좋은 일로 인정하면서도 그 일들이 참으로 전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이시라는 증언은 철저히 거부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82[81],6)라는 시편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말씀 그 자체이신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것이 틀리지 않음을 가르치십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내세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어느 것 하나 이스라엘의 율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요한 10,26)에, 예수님을 따르는 대신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입맛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증언하는 사실들에 마음을 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이의 자세입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새로운 모습이자 우리에게 ‘좋은’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려면 관행과 마음 안에 ‘늘 그렇게 해 왔던’ 생각들을 비워 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인 말이 안되는 사람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오늘 주제를 말장난처럼 하면 ‘자처하다가 자초했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의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다가 죽음을 자초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신 것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유대인들이 말하지만 자처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는 과정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나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은 신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에 대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만 신이 아니라는 말씀이고, 우리 인간도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은 당신의 신성을 밝힌 것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위상도 격상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격상시키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에는 그저 ‘받은’이라고 나와 있지만 ‘받은’은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영어에 Receive가, 주니 단순히 받은 것이라면 Accept는, 선택하여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말씀을 우리에게 내리셔도 그 말씀을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처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즈카르야처럼 의심하여 벙어리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영적 벙어리, 하느님과 대화 상대가 못 되는 영적 벙어리라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대화 상대로 격상하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영어와 하느님 말씀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영어가 지구 이쪽 말과 저쪽 말의 차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의 말과 땅의 말의 차이잖습니까?
이것이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라고 며칠 전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처럼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로 격상하셔도 바리사이들처럼 ‘나는 그런 말 모르겠고 아무튼 당신은 신성모독 하는 것’이라고 우기는 자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영적인 말이 안 되는 사람, 그래서 주님께서 아무리 신분을 격상시켜 줘도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봉헌축제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뒷부분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앎과 깨달음의 능력이요 사랑의 힘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능력입니다.’(요한 10,38 참조).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야다, יָדַע)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의 앎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신화, θεοσισ). 이는 예수님께서 증언하신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진정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0,34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으로 자처하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인가?
발레 ‘백조의 호수’는 주인공인 오딜리아(주로 오디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짐)라는 공주가 마법에 의해 백조로 변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마법에 의해 백조의 모습으로 변하고,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적인 제약을 받습니다.
오딜리아는 아름답고 착한 성격을 가진 공주지만, 사악한 마법사 로트바르트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는 오딜리아와 그녀의 백조 친구들이 계속해서 백조의 모습으로 살도록 강요합니다.
하지만 오딜리아는 저주를 풀고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마법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진정한 사랑, 즉 프린스 시겔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겔 왕자는 오딜리아를 사랑하고,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며 그녀를 구하려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로트바르트는 시겔 왕자가 오딜리아 대신 오딜리아의 마법에 걸린 형상인 자기 딸인 오디트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왕자는 그녀를 오딜리아라고 착각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저주는 영원히 풀릴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왕자는 자신이 마법사에게 속았음을 깨닫지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딜리아는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자신은 죽겠다고 말합니다. 왕자도 그러면 함께 죽자고 합니다. 그렇게 둘이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 사랑으로 마법사는 힘을 잃고 죽게 됩니다. 그런데 둘이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오딜리아는 마법에 걸려 자기 본성을 부정하고 낮추며 삽니다. 그러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시도했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둘은 인간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오딜리아가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복음 내용을 그대로 비유로 옮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원도 오로지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이뤄집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이시지만 인간이 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먼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당신이 하느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이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예수님은 사람이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이 하도 자신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성이 아니라 위격(Persona)입니다. 본성은 하나인데 바로 “신성”입니다. 하느님은 이 신성으로 하나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위격으로는 셋이지만, 한 신성으로 하나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본성은 어떻게 나올까요?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인간은 인간이라고 믿을 때, 부모처럼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인간의 본성이 나옵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인간의 본성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던 유다인들과 같습니다. 그것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돌을 맞더라도 하느님이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일까요? 성체를 영하면서도 자신을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입니다. 호랑이 새끼가 어미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요 죄입니다. 우리는 진짜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의 고통도 자신이 백조임을 깨달을 때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본성은 양식을 통해 오는데, 양식은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냥 모기 본성에 머무릅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아무 피나 빨아먹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그 부모의 본성을 물려받습니다. 모기가 사람의 살과 피를 먹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도 될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가 신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거부할까요? 죄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원죄의 성향에 그대로 머물며 계속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교만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됩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게 행복입니다. 그러려면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한데, 그 정체성이 성체성사로 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짜 죄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에만 머물려 하지 말고 본성을 하느님께 참여시켜야 합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살과 피를 쓸모없게 만드는 것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한번 우리도 하느님이 된다고 생각해보고,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해봅시다. 하느님으로 자처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느님으로 믿게 하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든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집무실 문이 열리면서 선배 신부님께서 “뭐 하냐?”라며 말하며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조금 있다가 올까?” 하며 다시 나가시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부님께서 문을 열 당시에 저는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도 울어서 눈이 뻘겋게 변했고, 콧물까지 질질 흘리고 있을 때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실 집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 내용이 너무 슬픈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그래서 눈물 콧물 쏟고 있을 때 선배 신부님께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충분히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휴지로 닦고 책 읽다가 슬퍼서 그랬다고 하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데?”
이 세상 삶 안에서 오해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오해가 너무나 많은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대화를 통해 잘 풀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오해가 굳어져 아예 담을 쌓고 지내는 경우도 많아 보입니다.
하긴 예수님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당신 신원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만 유다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화라는 것도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대하는 유다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집어 들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 나름의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요한 10,33)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느님의 일만 보더라도 오해를 충분히 풀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요한 10,3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만 합니다. 오해를 풀고자 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완고한 마음으로 오해를 더 키우고만 있습니다.
오해도 받아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하였듯이, 힘을 이용해 상대방을 눌러 버리려는 마음으로는 절대로 오해를 없앨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함께하는 겸손한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예수님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자존심은 어리석은 자의 소유물이다
- 헤로도토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예수님의 아프신 안타까움을 만나는 만남의 사순입니다. 이렇듯 부질없는 교만의 한계를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시끄러운 우리들 삶입니다.
제자리를 맴도는 우리들 삶입니다. 무엇인가를 잡으려 할수록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잡는 것이 아니라 품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미지에 우리가 얽매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방해하는 우리들의 집착이며 혐오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만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때를 우리는 놓치고 삽니다.
길이 아닌 길을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아름다워야 할 사랑의 길을 가장 슬프게 만들었어는 안됩니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 회개의 때입니다. 건네주어야 할 것은 교만이 아니라 교만에서 벗어나는 믿음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요한 10, 42)
요한복음 10장 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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