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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16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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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0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일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2022년 10월 16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 17,8-13)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였다.

  • 제2독서
    (2티모 3,14-17 / 4,1-2)
    하느님의 사람은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8,1-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16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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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복음
루카 18장 1-8절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황석모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16일 (일)
황석모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10월 16일 (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응답도 없는데 계속 기도해야 할까?

 

하느님께서 과연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계시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응답도 없는데 계속 기도해야 할까? 그냥 포기해 버릴까?’ 하는 유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망설이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할 이유를 비유를 들어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야말로 ‘불의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는 반전의 계기가 생깁니다. 그 고을에 사는 과부 한 사람이 재판관을 자주 찾아와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끈질기게 졸랐던 모양입니다. 

재판관은 결국 과부의 청을 들어주기로 결심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녀에 대한 동정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너무 귀찮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가 끝까지 찾아와 자신을 ‘괴롭힐’ 것이 뻔하였습니다. 

여기서 ‘괴롭히다’로 번역된 그리스 말 ‘휘포피아조’는 본래 ‘눈 아래를 치다’ 또는 ‘얼굴을 때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격투 용어입니다. 과부의 끈질긴 청이 마치 재판관의 눈을 시퍼렇게 만들 정도의 심한 괴롭힘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향하는 논증을 펼치십니다. 재판관은 ‘불의한’ 사람임에도 과부의 끈질긴 청에 결국 항복하고 들어줍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과연 어떠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기도를 허투루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들어주시리라는 강한 믿음과 함께, 주님을 계속 귀찮게 하고 괴롭혀 드려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바라기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들려주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을 드러내시는 말씀으로 가르침을 끝내시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의구심을 보이시는데 주님의 의구심은 우리의 의심 때문이겠지요. 그러니까 주님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의구심이 있으시고,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과연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근본적인 의심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계시는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는가? 

그런 하느님이 계시는지 알고 싶고 믿고 싶어서 한번 기도를 해봤는데 안 들어주시니 역시 안 계신다고 믿어버립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있다고 믿는 것과 하느님은 없다고 믿는 것. 

없다고 믿는 것은, 한번 기도해보고는 낙심한 결과이고, 있다고 믿는 것은, 한 번의 기도로 낙심치 않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계신다고는 믿지만,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또한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안 들어주신다고 믿는 경우, 하느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없지만, 다만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믿음이 아직 없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시지만, 나도 사랑하시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전에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의 믿음을 먼저 의심해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청할 것을 청하고 있나? 들어주실 수 없는 것을 청하는 것은 아닌지. 간절히 청하고 있나? ‘아니면 말고’ 식으로 청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때를 믿고 기다리는가? 나의 때를 고집하고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끈질기게 그리고 끊임없이 청하라는 말씀은 생떼를 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들어주실 수 없는 것과 들어주셔서는 안 되는 것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마치 부모에게 마약을 달라고 하고 청산가리를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엄마는 라면을 끓여달라고 졸라도 안 끓여 줍니다. 라면도 안 끓여주는데 마약과 청산가리를 계속 조르는 것은 엄마에겐 생떼지요. 

우리 인간은 아이와도 같이 당장 좋은 것을 원하고, 당장 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장에는 좋지만, 나중에 나쁜 것은 안 주시고 나쁘지 않고 좋을지라도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좋은 것은 당장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횟수나 때를 내가 정하지 말고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한두 번 해보고, 또 언제까지 해보고 그만두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떼를 쓰는 기도와 끈질긴 기도의 차이는 사랑에 대한 믿음의 차이입니다. 떼를 쓰는 기도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기도이고, 끈질긴 기도는 하느님 사랑을 믿는 기도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에 사랑의 하느님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 것, 외면치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 바라기를 계속하는 것, 그런 기도가 낙심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가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마지막 심판 때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으려면? 

 

다큐멘터리 작가 박지현의 『참 괜찮은 태도』에서 소개된 사연입니다.  

2008년 청주 여자교도소로 촬영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고.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어느 날 남편이 외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륜 상대자는 바로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남편을 죽이고 자수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온 그녀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통했고 몇 년 후 가석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첫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 상대였던 친구를 죽이고 다시 자수했습니다.  

문득 그녀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한참 후인 2020년 장동익을 인터뷰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는 부산 낙동강 변사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22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은 1990년 1월 부산 낙동강 근처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특진에 눈이 먼 경찰은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용의자로 추정해 무자비한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받아냅니다. 두 명은 사건 당일 현장에 없었지만 계속되는 고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허위자백을 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들은 복역하던 중에 모범수로 감형되어 21년 5개월을 살고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2019년 뒤늦게 사건이 주목받으며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고문으로 범인이 조작되었다고 인정했고 부산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장동익입니다.  

살인 누명을 쓰고 20년 넘게 감옥살이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은 어느덧 커서 어른이 되었고 멋진 아빠가 되기를 꿈꾸었던 서른셋의 그는 어느덧 50세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가 무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라는 생각을 수천 번도 더 했다는 그는 재심이 결정되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용서해야겠다. 마음속에 품고 있어 봐야 나 자신이 힘드니까 놔야겠다.’ 

박 작가가 처음 그를 봤을 때 몇 분 동안 말을 잊지 못했던 것은 그의 평온한 표정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억울하다고 내 과거를 망가뜨린 사람들을 원망해봐야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괴롭힌 사람을 위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짓에 면죄부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장동익의 말처럼 마음속에 품고 있어 봐야 나 자신이 힘드니까, 나를 위해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박지현 작가가 처음 만났던 남편과 친구를 살해한 여성은 자신이 심판관이었습니다. 자신이 심판관이 되면 판사는 의미 없어집니다.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 때 그 사람을 역시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장동익 씨는 심판을 심판관에게 넘겼습니다. 심판관이 그의 피해를 다 보상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심판관의 지위에 서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도 판사와 하늘이 올바른 심판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가 끊임없이 올바르게 판결해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치지 않고 청하면 불의한 재판관도 올바르게 판결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칫 믿음이 어떤 것을 들어줄 때까지 청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심판’에 관한 내용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는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과 같은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무언가를 얻을 때까지 꾸준히 청하면 믿음이 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나의 심판을 심판관에게 맡겨야만 믿음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이미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 심판해 놓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의미 없는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세리는 자기 심판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는 사람은 세리가 되는 것입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강형욱 조련사가 역대급 분노를 표출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반려견끼리 싸우는데 말리지 않고 보고만 있는 보호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호자는 개들끼리 싸워서 서열을 정리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개들끼리 서로 판사가 되라는 의미이고 이는 자기가 판사의 권위를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개가 주인 앞에서 서로 싸우면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심판하면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될 때 종말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만 있을 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렸을 때 성당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일을 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자주 하는 이 말을 멈춰야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서 더 하는 것은 욕심이야.’, ‘남들 정도만 하면 되지.’ 등의 말은 우리가 할 일을 더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돈을 많이 벌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또 높은 지위에 오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중요한 것은 많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봉사, 희생,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계속해야 합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소홀히 한다면, 분명히 직무 유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일을 더 우선시하면서 우리는 이 직무 유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느님에 관해 관심도 없고 인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이 자기만 생각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요구하는 보잘것없는 과부는 재산관리에 있어서 억울한 상황에 있습니다. 물론 고약한 재판관이 일 처리를 피합니다. 이 과부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또 재판관이 왜 자기 임무를 유기했는지, 그 과부를 억울하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러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약한 재판관도 끊임없이 성가시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가시게 구는 과부의 요청은 난관을 극복하는 신앙생활의 집요한 노력으로 상징합니다. 
 
기도는 늘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요청에 굴복한다면 진실되고 의로우신 하느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하는 기도는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나중으로 미뤄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포기하고 미루다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 역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선한 일이란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반대로 악한 일이란 인간의 존재 의미의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다.

- 빅터 프랭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흔들림을 잡아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무너져내리는 답답함과 아픔 뒤에 맛보게 되는 감사입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이 기도의 소재입니다. 

현실적 어려움을 들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진실로 바라십니다. 차별받으며 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건전한 상식으로 서로 소통하길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로 우리의 삶과 공동체는 더욱 건강하여 질 것입니다. 판결은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닌 한 부분일 뿐입니다. 

자비와 용서의 체험이 우리 삶의 전부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궁극적 목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삶을 살아야 할 장본인은 언제나 우리들 자신입니다.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오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모순과 대립을 사랑으로 변화시키시는 사랑의 하느님 이십니다. 사랑의 그물로 우리를 끌어올려 주십니다. 구원은 올바른 정의를 요구하고 정의는 사랑과 용서 없이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깨닫는 주일 아침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위해 기도하는 용서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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