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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24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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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8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2022년 8월 24일 (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은 천사에게 이끌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봅니다. 도성 성벽의 열두 초석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끌려 온 나타나엘에게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시며,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그들이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24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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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복된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오롯한 믿음으로 성자를 따르게 하셨으니 저희에게도 굳센 믿음을 주시어 그의 전구로 주님의 교회가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장 45-51절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그때에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송준회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8월 24일 (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송준회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24일 (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에게 현실이 되는 야곱의 꿈

 

성서학자들은 나타나엘과 바르톨로메오를 같은 사람으로 봅니다. 나타나엘은 그의 고유한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고, 바르톨로메오는 부친의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톨마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나타나엘은 동료 필립보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납니다. 많은 이가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처음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성경에서 예언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라고 예수님을 소개하자 나타나엘은 의심합니다. 나타나엘은 성경을 아는 사람이었고, 메시아는 자신의 고향인 카나나 나자렛과 같은 갈릴래아의 작은 고을이 아니라 유다 지방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 7,41-42) 

나타나엘이 그 아래에 앉아 있었다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미카 4,4; 즈카 3,10 참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집 앞마당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서 성경을 읽는 것을 아름다운 이상으로 간직하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올바르고 참된 이스라엘 사람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자신의 생각을 접고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메시아에 대한 나름의 생각과 기대가 있었던 나타나엘도 예수님을 뵙고 마음을 바꿉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사람의 생각이나 기대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입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시작일 뿐,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통교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먼 옛날 야곱의 꿈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에게 현실이 됩니다(창세 28,10-22 참조).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동료들 안에서 만나고 체험하며, 그분과 살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 앞에 진실하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타나엘에 대해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위선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이방인의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우리가 어떤 수도자에 대해 참으로 수도자답다고 할 때, 거기에는 껍데기만 수도자가 아니고 그 됨됨이가 속속들이 진짜 수도자라는 뜻이 있고 거기에는 또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 성별된, 오로지 하느님께 바쳐진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에는 마찬가지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이방인처럼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율법 학자들처럼 위선자가 아니라는 뜻에서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보다 사람 눈에 더 들려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려드는 사람이 아니고 겉으로는 거룩하지만 속에는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짓이 없고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말과 행위, 안과 밖, 행위와 존재가 다르지 않고 일치한다는 인간적 자기완성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한다는 인간관계적 성숙 차원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이고 하느님 앞에서 거짓이 없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어제는 한 수도자를 면담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고 전에도 몇 번 면담을 했던 분입니다. 

어렸을 때 가정 폭력을 경험한 분이고 그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아서 공동체 생활에서 다시 그 상처가 건드려져 그 상처가 계속되는 분입니다. 

그래서 치유를 받으려고 심리 상담을 받고 했는데 심리 상담도 필요하지만 그 상처를 가지고 주님께 가라고 조언했고 그분도 그러려고 했으며 그래서 정말로 자주 성당을 찾곤 했습니다. 

그래서 점차 좋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제 와서는 우울증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더 악화된 것이고 자살 충동까지 일 정도인데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제 비로소 제대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도가 이렇게 심해지기 전까지는 상담을 하고 성당에 갔어도 그저 계속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지 절실하지 않았고 진실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진심으로 자신을 상담자와 하느님께 내놓지 않았었는데 정말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해지자 이제 내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성당에 자주 간 것은 기도 행위를 한 것이지 기도한 것이 아니었고 이제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실’이 ‘진실’을 견인한 것이고 이제 비로소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나아가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것이며 자신의 상처 치유를 하느님 은총과 사랑에 이제 온전히 내맡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앞에 자기 상처를 내보이지 않고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것은 치유는 받지 않고 나는 상처받았다며 계속 징징대며 우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약 바르지 않고 자기 상처를 자기 입으로 ‘호’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나타나엘은 자신을 환히 보시는 주님 앞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는데 우리도 주님 앞에 나갈 때 몸뚱이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천국의 시작 : 내가 벗으면 다른 이도 벗는다.

 

저도 솔직하게 다 드러내놓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함이 없이 자신을 감추는 사람들과 만날 때는 숨이 막힙니다. 관계이기는 하지만 관계가 아닌 느낌입니다. 위선적인 관계 안에서 머물려고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입니다. 가까울수록 더 솔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정말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 리즈에 사는 닐 브로드벤트 씨는 하나의 동영상을 올려서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 스텔라에게 청혼하는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이것만 봐서는 특이할 필요가 없습니다. 촛불을 깔아놓고 하트 모양의 카드에 “당신에게 하는 중요한 질문 하나!”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 속엔 분명 “나와 결혼해 줄래?”라는 글이 쓰여 있어야 당연할 것입니다.
 
스텔라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카드를 열어봅니다. 그런데 그 카드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도대체 토마스 루라는 놈은 누구야?”

토마스 루는 스텔라의 내연남이었습니다. 닐은 청원하는 척하고 기분을 돋워놓은 다음에 여자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신은 통쾌할 수는 있지만 역시나 같은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신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정말 지옥은 거짓말부터 시작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과는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행복한 관계도 끝났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관계는 벌거벗고 만나야 합니다. 가리는 것이 없을 때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라도 숨기는 것이 많을 때는 행복한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이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처음에 필립보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솔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여기서 이스라엘은 한 나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 곧 에덴동산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화과 잎을 뜯어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

바르톨로메오도 자신이 거짓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우리 각자도 어쩌면 지금까지 무화과 잎을 달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이것을 뜯어내야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건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무화과 잎이 달린 이상 에덴동산에 머물기 어렵습니다. 

이북에서 생긴 일입니다. 어느 마을에 몰래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들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공산 사상에 짙게 염색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를 당에 고발하였습니다. 온 동네에서 아들이 친아버지를 고발한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산당은 온 마을 주민에게 교육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공개재판하기로 하였습니다. 사형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벙거지를 씌우고 손을 뒤로하여 꽁꽁 묶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 그 앞에서 아들이 고발장을 큰 소리를 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이들은 공산당을 배반하고 아침마다 미신 같은 신에게 기도한 배반자입니다.”

사람들은 억지로 끌려 나와 공개재판을 구경하면서 숙연하여 졌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여 죽이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심정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습니다. 공산당들은 이 아이를 영웅으로 치켜세웠습니다. 그리고 상을 주고 대단히 환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편, 이 아이는 영웅이 되었지만 고아가 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이 아이가 공산 사상이 투철하다는 이유로 공부시키고 길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결혼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싱긋이 웃는 데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사형당하신 아버지 웃는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자기는 부모님에게 얼마나 죄를 지은 것인지를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이것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지옥 같았습니다. 이런 번민 속에 김 요석 목사를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펑펑 울면서 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도 용서하시나요?” 

김 목사는 무슨 의미인지 알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보다 더한 죄도 용서하십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위의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자기도 아침마다 기도하고 있고 아들이 자기를 고발할까 봐 조심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고백해야 다시 천국으로 돌아옵니다. 감추고 사는 건 지옥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 선배 신부님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위계질서가 강한 사회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배가 이렇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힘든 선배가 있다면 무조건 그 선배에게 고해성사를 봐, 그러면 잘 대해줄 수밖에 없어!”

과연 그 조언은 적중했습니다. 제가 먼저 벌거벗으니 선배 신부님도 벌거벗었습니다. 자신에게 고해성사하는 저를 고마워했습니다. 우리 관계를 천국으로 만드는 쉬운 방법은 먼저 나에게 붙어있는 무화과 잎을 떼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이 천국으로 변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어떤 분이 “신부님, 이 영화 보셨어요? 정말로 재미있어요.”라며 영화 한 편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솔직히 밀폐된 공간에서 가만히 있으면 거의 100% 잠들기 때문에, 극장에 가지 않은 지 꽤 되었습니다. 불편하게 잠을 자러 극장에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추천해주신 영화는 인터넷 유튜브에서 사서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특히 재미있다면서 극찬하셨거든요. 재미있다는 말에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쏙 빼놓는 슬픈 로맨스 영화였습니다. 전혀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의미 있다’가 맞는 표현이 아닐 것 같은데, 우리는 이때에도 ‘재미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재미라는 용어가 참 다양하게 쓰입니다. 
 
“너 재미없을 줄 알아.”(협박하는 말) 
 
“사업하는 재미가 어때?”(먹고 살기 위한 일인데) 
 
“신혼 재미가 어때?”(재미와 생활이 동의어가 됩니다) 
 
이 밖에도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말이 있습니다. 
 
“나 머리 자르러 간다.”(단두대가 아닌 이발하러 간다는 것) 
 
“화장이 잘 먹었네.”(화장품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이해하기 힘든 말과 글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주님을 만나 메시아이심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인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성경 지식에 박식한 사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지명인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는 것은 당시의 라삐들이 성경 공부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나타나엘이 성경에 전념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찾고 있다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예수님께 그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요? 나타나엘이 주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만나기 전에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역경 속에서도 계속 의욕을 가져라. 최선의 결과는 곤경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 마틴 브라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요한 1, 47)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시간이다.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픈 만남도 있었고 우리자신을 성장시키는 만남도 있었다. 만남의 소중함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다. 바르톨로메오가 예수님을 드디어 만난다. 

만남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 믿음의 진실한 사람이다. 주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진리의 참맛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길을 찾아주시는 따뜻한 사랑의 주님이시다. 

삶의 기쁨을 참된 만남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이시다. 만남은 신앙으로 더 아름다워진다. 모든 아픔과 한계를 넘어서는 진실한 신앙이다. 진실한 신앙은 참된 우리의 모습을 보게한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길을 만나게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내면의 길은 신비롭고 거짓이 없으며 아름답다. 

오늘 우리의 만남이 소중한 신앙으로 내면의 참기쁨을 체험하는 은총과 진리의 시간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소중한 하늘 소중한 내면 소중한 신앙 소중한 만남이다. 만남을 통하여 알게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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