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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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7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사무 26,2.7-9.12-13.22-23)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 주셨지만, 저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 제 2독서
(1코린 15,45-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6,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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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무 26,2.7-9.12-13.22-23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 주셨지만, 저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2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지프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아 그곳으로 내려갔다.
7
다윗은 아비사이를 데리고 밤을 타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사울은 진지 안에서 머리맡 땅바닥에 창을 꽂아 놓고 잠들어 있었다. 아브네르와 그의 군사들도 사울을 둘러싸고 잠들어 있었다.
8
아비사이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오늘 원수를 장군님 손에 넘기셨으니, 이 창으로 그를 단번에 땅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9
그러나 다윗이 아비사이를 타일렀다.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12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들었기 때문에, 다윗을 본 사람도 알아채거나 잠을 깬 사람도 없었다.
13
다윗은 맞은쪽으로 건너가 상대와 거리를 멀리 두고 산꼭대기에 서서,
22
응답하였다. “여기 임금님의 창이 있습니다. 젊은이 하나가 건너와 가져가게 하십시오.
23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1코린 15,45-49
오늘 제2독서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45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루카 6,27-38
오늘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23일
이상향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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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용서와 자비의 은총 청하기
“기름부음받은이”(1사무 26,9)는 축성된 이를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왕, 사제, 예언자가 물질적인 기름부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임금으로 기름부음받아 성별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충정은 영웅적입니다. 이는 사울을 존경해서라기보다는 그를 임금으로 축성하신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충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면 단연 탁월하게 축성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리적인 기름이 아니라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고 축성되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구약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예표되던 것들은 이제 신약에서 영적인 것으로 실현되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시고’(그리스 말로 ‘크리스토스’는 ‘기름발린 이’라는 뜻) 우주의 임금이 되십니다.
다윗이 물질적인 기름으로 축성된 사울 임금에게 보인 존경이 그러하다면 성부에게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시어 축성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은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 방식은 인간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는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루카 6,35)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던 사울을 살려 줌으로써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원수 사랑의 탁월한 본보기를 보여 주는 다윗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러하였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용서와 자비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6,36) 자비로울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베푸는 용서와 자비는 더 높은 수준으로 돌려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제 생각에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여러 질입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것도 있고, 미운 짓을 해서 밉지만 내게 아무 해가 없기에 감정적으로만 미울 수 있고, 너무 사랑하기에 그가 훌륭하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아 미운 것도 있으며, 너무 사랑하기에 그도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는데 그렇지 않아 밉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미움으로는 관계가 원수 관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치명적으로 파괴되고 행복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깨지고, 그래서 그도 파괴되고 불행해지기를 바랄 정도가 되어야 원수 관계가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그가 원수 짓을 했어도 내가 파괴되지 않고 행복하면 그는 원수 짓을 했어도 원수가 아니고, 그의 원수 짓으로 인해 내가 파괴되고 불행해졌을지라도 지금은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성장하고 행복해졌다면 역시 원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버지처럼 자비로우면 가능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되어라."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자비로운 분이시라고,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가 그분 자녀라면 자비로운 자녀가 되라고. 우리말에 ‘못난 놈’과 ‘못된 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못난 놈’은 태어나길 잘못 태어난 놈이라는 뜻이 있고, ‘못된 놈’은 되어야 할 사람이 아직 되지 못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아비는 우리를 잘못 낳았을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잘못 낳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비로운데 우리가 자비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를 잘못 낳은 분으로 만들거나 하느님이 잘못 낳은 놈은 아니지만 내가 못된 놈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처럼 될 수 없다고요?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처럼 될 수는 없는 거라고요? 하느님 아버지는 원수까지 사랑할 정도로 자비로운 분이지만 우리 인간이 원수를 사랑할 정도로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다고요?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되려고 한 것처럼 능력이나 완전성에서 하느님처럼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에서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수를 보고 원수만 보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보고 원수를 보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본 것처럼 그러니까,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로 사울을 본 것처럼 보면, 원수를 아버지의 또 다른 자녀로 우리가 보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프란치스코가 본 것처럼 보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속화된 사제를 보면서 사제의 죄를 보지 않고 그에게서 주님만 봤습니다. 그는 원수를 벗이라고 부르신 주님을 보면서 원수를 벗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형제들이여,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발자취를 따라야 할 주님께서 당신을 넘겨준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시고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당하게 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받은 자비를 내어줘라.
오늘은 연중 제 7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찾아 헤매는 사울 왕을 원수 갚을 기회가 생겼음에도 살려줍니다. 모든 결정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오직 자비와 용서를 베풉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흙에서 나서 썩어 흙으로 돌아갈 첫 인간과 하늘에서 나서 하늘로 돌아갈 새로운 생명을 구별하여 그들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1코린 15,49)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화답송>은 주님께서 자비롭고 너그러우심을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후, 이어서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고 말씀하시고, 그 이유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곧 우리는 자비를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내어줄 수가 있으며, 또한 받은 그 자비를 내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백성을 가리켜 “자비의 그릇”(로마 9,23)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지난 2015년에 제2차 바티간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여,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시면서 모토를 “아버지처럼 자비로워라”(misericordes sicut Pater)로 정하시고, 칙서인 [자비의 얼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1항)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시며, 또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의 본질이며 활동이심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바로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납니다.”(6항)
또한, 교종께서도 이 [칙서]에서 자비를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25항)이요, “복음의 뛰는 심장”(12항)으로 말씀하시면서, 교회는 이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음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커다란 희망과 심각한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교회의 첫째 직무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든 이를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교회는 자비의 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인 그 자비를 찬양하고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소극적인 행동지침으로서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좀도 적극적인 행동지침으로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일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로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의 “자비를 비는 기도”를 바치면서 마칩니다.
저는 당신의 살아있는 모상이 되기 위해 온전히 당신의 자비로 변하고 싶습니다. 주님,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인 무한하신 자비가 제 마음과 영혼을 통해 제 이웃들에게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두 눈이 자비롭게 바라보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절대로 이웃을 겉모습으로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시고, 이웃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고 도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 제 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의 어려움을 듣게 하시고,이웃의 고통과 한탄에 제 귀가 무뎌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절대로 이웃을 험담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용서의 말을 건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두 손이 자비로워져서 선행을 많이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들에게 좋은 일만 하고, 어렵고 힘든 일을 제가 떠맡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제 두 발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지치거나 피로해 하지 않고 항상 달려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의 진정한 휴식은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해 주시고, 어떠한 경우에도 제 마음의 문을 닫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제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도 신실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 자신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성심 안에서 머무를 것입니다. 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주님, 당신이 자비가 제 안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저의 예수님, 당신은 전능하시니 저를 당신으로 변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 자녀의 자격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원수도 하느님의 자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미움은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형제가 형제의 생명을 죽이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자녀라고 계속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한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핵심은 무엇일까요? 헌법에 따르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국민이 아버지라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측이 주장하는 바대로라면 이 계엄은 ‘계몽’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몽을 위해 형제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에 대해 국민들이 ‘아, 이것은 형제의 잘못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해야 당연할까요? 그것을 당하는 측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는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인간 존엄을 무시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주신 이에게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는 아버지에게 합당한 자녀로 인정받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카인의 예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하느님은 형제의 생명에 위협을 가한 자녀를 계속 자녀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핵소 고지(Hacksaw Ridg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75명을 구한 실제 인물인 데스몬드 도스(Desmond Doss)의 삶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데스몬드 도스는 종교적·도덕적 신념 때문에 총을 들지 않는, 이른바 ‘양심적 병역 거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우의 생명을 구해냈습니다.
데스몬드와 어떻게 생명에 대해 소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는 형제에게 치명상을 입힐 뻔했던 사건과 아버지에게 총을 들이댄 일을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이의 생명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옳고 그름도 생명을 위협하는 일을 합리화 할 수는 없습니다.
데스몬드 도스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전쟁 후유증과 알코올 의존으로 인해 폭력적으로 변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가족에게 거친 언행을 일삼았고, 때때로 총기를 꺼내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심하게 술에 취해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려 들자, 이를 본 도스가 아버지의 총을 빼앗아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순간 도스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아버지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사실에 전율을 느낍니다. 그는 어린 시절 형에게 가한 폭력의 기억까지 겹치면서, “가족 간에조차, 아니 누구에게라도 총을 겨누는 순간 인간의 자격을 잃게 된다.”라는 걸 절감하게 됩니다.
용서는 결국 용서받는 대상은 물론이요 더 많은 이의 생명을 구하는 길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자라면서 당신을 학대하는 어른들에게 지쳐 그들도 죽이고 당신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촌으로 들어가시며 “저들도 사는데, 넌 왜 못 사니?”라고 하시는 것을 듣고는 당신 생각을 접습니다. 만약 그 생각을 접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많은 이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느님께 가셨을 때는 하느님께 용서받은 자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지옥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았으니 가능합니다. 만약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마다 못했다고 때린다고 하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는 자기 부모에게 사랑받았으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부모의 자녀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용서해도 그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장 발장과 자비르 경감의 예처럼 장 발장은 용서받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자비르 경감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계속 용서하지 않는 자로 남아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합니다. 심판은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자녀의 모습만 보이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하와이 군도 북쪽에 있는 ‘키우아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지금은 1959년 미국의 오십 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살기 좋은 곳이 되었지만, 그전에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주민 상당수가 범죄, 알코올 중독, 정신 장애 등으로 고통받는 곳이었습니다. 교육 수준도 낮고 청소년 비행 문제도 아주 심각했습니다.
1955년에 태어난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종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들 중 빈곤 정도, 가정 파탄 수준, 부모 정신 장애 등 세 가지 조건이 심각한 201명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가 잘못된 길로 빠졌을까요?
실제로 범죄, 정신 장애, 미혼모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약 28%에 해당했고, 나머지 72%는 큰 문제 없이 성장했고 그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은 무엇일까요?
성장 과정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 인물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바른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한 명이 부모이기도 했고, 친척 혹은 주변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즉,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누군가가 있었기에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타락하고 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의 역할을 내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선’이 가득한 세상을 위해 ‘나’를 보내셨는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를 ‘직무 유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나로부터 잘 사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사랑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남’에게 맞춰 있습니다. 나에게 잘하고 친절한 사람을 위한 사랑이 아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워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심판하지 말아야 심판받지 않을 것이고, 단죄하지 말아야 단죄받지 않을 것이며, 용서해야 우리도 하느님께 용서받게 됩니다. 모두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이 잘못되었다고, 환경이 어렵다고, 힘이 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사랑을 실천하는 역할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하느님 자녀가 되는 길에서 멀어집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
- 달라이 라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자비가 정말 자비다우려면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악에 반응하지 않으며 꾸준히 하느님의 선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하나되는 자비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우리 마음 속의 미움과 분노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마음과 행위를 온전한 사랑으로 바꾸어줍니다. 하느님의 참다운 모습은 자비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라는 진실을 건네십니다.
자비라는 진실은 겸손을 낳고 미움을 정화하는 용서를 낳습니다. 인간상실을 치유하는 우리 삶에 절박하고 간절한 자비입니다. 간절한 자비는 간절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남을 심판하거나 남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비가 이루어내는 수많은 역할 가운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가지는 우리가 미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 역사와 우리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자비이며 우리 존재의 변화와 관계성의 따뜻한 통찰이 자비입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삶을 직시하는 기도와 미움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자비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만나게 되는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으로 빼닮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는 겸손이기에 연민과 사랑으로 안타까워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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