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2022년 12월 5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 35,1-10)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오늘 복음
(루카 5,17-26)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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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주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귀여겨들으시고 성자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위대한 신비를 저희가 깨끗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경축하게 하소서.
복음
루카 5장 17-26절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5일 (월)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5일 (월)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5일 (월)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 병자의 치유에 관한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알려 주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4─9,50 참조)에 속합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 기적(5,12-16 참조)에 이어 소개되는 이 중풍 병자의 치유 기적은, 루카 복음에서 적대자들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논쟁은 평상에 누워 있는 중풍 병자의 죄를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일로 시작됩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말씀에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부여받으신 권한으로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을 지켜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한을 침범하셨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규정에 따르면,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는 사형을 받는 중대한 범죄입니다(레위 24,10-16 참조). 적대자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였던 것입니다(마태 26,65; 마르 14,64 참조).
대림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다린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관상 타령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관상’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상 타령을 할까 합니다.
관상은 하느님 관상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하느님뿐 아니라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다른 자연도 보는 것이라고 저는 자주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주장합니다.
나를 보더라도 나의 고통을, 욕망을, 갈망을, 보고, 나의 고통을 보면서도 고통만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도 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도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고, 나의 고통만 보지 않고 이웃의 고통까지 사랑으로 보는 것, 뭐 이런 것이, 관상이고 진정한 관상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관상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는 것이 관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 고통에 나의 시선을 빼앗긴 것이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실은 관상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관상도 하느님을 보는 것이지만 하느님만 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사로잡힘이지 진정한 관상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 완전히 하느님께 몰입되고 성인들이 탈혼 상태에 있듯이 하느님께 사로잡힐 수는 있어도 계속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런 관상을 진정한 관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느님 관상은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오늘 관상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Say to those whose hearts are frightened : Be strong, fear not! Here is your God."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보면/관상하면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와 동료들은 바로 이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마음에 들어오셨을 때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어쩌시나 보려고 왔지만, 이들은 치유를 받기 위해 옵니다.
중풍 병에 맥없이 주저앉아있지 않고 어떻게서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왜? 물론 치유 받기 위해서지만 그 이전에 주님의 능력을 보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이들이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그런 주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치유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관상이 치유와 구원에까지 이르는 것을 본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향기를 품고 있나요?
성지 안에 모과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에서 가을이면 많은 모과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익어 떨어지면 검게 썩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썩으면서도 방향제로 써도 충분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이런 모과를 소재로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바로 정호승 시인의 ‘모과’라는 시입니다.
가을 창가에 노란 모과를 두고 바라는 일이
내 인생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자 시커멓게 썩어가는 모과를 보며
내 인생도 차차 썩어가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모과의 고요한 침묵을 보며
나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모과의 인내를 보며
나도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생각했다.
모과는 썩어가면서도 침묵의 향기가 더 향기로웠다
나는 썩어갈수록 더 더러운 분노의 냄새가 났다.
가을이 끝나고 창가에 첫눈이 올 무렵
모과 향기가 가장 향기로울 때
내 인생에서는 악취가 났다.
나이 듦이 어쩌면 썩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내게는 썩어가면서 어떤 냄새를 낼까요? 향기로움일까요? 아니면 악취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향기인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향기가 풍겨야 우리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 향기는 믿음, 사랑, 희망을 통해 세상 끝까지 뻗어갑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향기를 가리는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남자 몇이 중풍 걸린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지붕의 기와를 벗겨내서 예수님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닌, 병자를 내린 남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을 무효화시키려고 방해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을 모독한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향기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저주의 악취로 가리고 있습니다.
좋은 향기는 어떤 악취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좋음이 진하면 진할수록 향기로움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병자를 당당하게 고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향기를 품고 있나요? 세상의 어떤 악을 물리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강한 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노력하면 결국 가장 행복해지는 건 나 자신이다.
- 박성덕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지를 성찰합니다. 사방이 꽉 막혀 있으면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중풍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내면 됩니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참되고 건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믿음을 통해 죄를 용서받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힘들어하는 중풍 환자와 중풍 환자를 내려보낸 이웃들의 마음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믿음은 마음과 실천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천을 판단하는 마음의 죄에서 먼저 벗어나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더 근원적인 용서가 덜 근원적인 생각에 갇혀 있을 수 않습니다. 언제나 더 근원적인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쉽습니다.
더 어려운 것을 선택하고 더 힘든 것을 요구하는 비뚤어진 우리들 신앙입니다. 남들이 잘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중풍환자는 일어나 집으로 걸어갑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권한은 구체적인 변화로 드러납니다.
용서는 우리모두의 변화이며 가장 아픈 이들의 즉각적인 치유입니다. 치유는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믿음과 치유로 이어지는 신기한 오늘입니다.
믿음과 치유를 떠날 수 없는 주님의 오늘입니다. 크게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많은 일을 체험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 믿음입니다. 평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듯 믿음으로 돌아가야 할 믿음과 치유의 대림시기입니다. 믿음을 보고 치유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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