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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15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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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

 

 

2022년 9월 15일 (목)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에도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시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곁에 계시는 어머니를 보시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그분을 맡기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15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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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19장 25-27절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영훈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15일 (목)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김영훈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9월 15일 (목)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곁에서 지킨 유일한 제자입니다. 십자가 아래 성모님께서 함께 계셨음을 증언하는 유일한 이 또한 요한 복음사가입니다. 

군사들이 당신 속옷을 놓고 제비를 뽑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계셨고, 그 절박한 순간 그분의 마음은 어머니에게로 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카나에서처럼 어머니에게 한 번 더 “여인이시여”(요한 2,4) 하고 부르셨습니다. 

이렇듯 카나의 그날과 예수님의 마지막 날은 맞닿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셨던 당신의 ‘때’가 충만하게 된 이때,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그리고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요한 2,4),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하고 어머니께 하신 말씀이 냉정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십자가 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온전히 드러내시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예언자 시메온이 말한 대로, ‘영혼이 칼에 꿰찔리신’(루카 2,35 참조)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성부께 부르짖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셨고, 숱한 고난을 겪으시면서 성부에 대한 순종을 배우셨던 예수님을(제1독서 참조) 닮으시어, 성모님께서는 고난으로 가득하였던 삶 가운데서,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도 아드님과 함께 성부께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세워 주신 성모님을 모시고 십자가 아래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삶에 우리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상련의 고통 

 

어제 주님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으니 오늘은 어머니의 고통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라는 성가처럼 아드님의 Passio에 어머니의 Compassio입니다. 아드님의 십자가 고통에 어머니의 동병상련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저는 오늘 상련의 고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좀 더 의미를 곱씹어보고 싶었습니다. 

한가위 명절 때도 얘기했지만 지난 태풍에 아들을 잃은 엄마의 고통과 겹쳐져서 말입니다. 전엔 세월호 엄마들의 고통과 연결해 묵상한 적도 있었지요. 

아무튼, 마리아의 고통은 어떤 고통이었을까요? 아들의 죽음이 너무 괴로워 따라 죽고 싶은 고통이었을까요? 살아있을 때 잘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고통일까요? 너무 일찍 죽은 것이 너무 불쌍해서 마음 아픈 그런 걸까요? 아니면 당신보다 먼저 죽은 것이 평생 한이 되는 그런 걸까요? 

이런 인간적인 아픔과 괴로움이 없지 않았겠지만 이런 고통이 당신 고통의 전부라면 주님의 어머니답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주님의 어머니다운 고통이었을 겁니다. 

내 아들은 잘 죽었다! 

내 아들의 죽음은 죽음을 이긴 죽음이다! 

내 아들의 죽음은 사랑의 승리다! 

내 아들의 죽음은 성부께 대한 순종의 완성이다! 

내 아들의 죽음은 성부의 뜻을 완수한 죽음이다! 

그러니 내 아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나도 아들과 같은 죽음을 죽어야겠다! 

뭐 이런 고통일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고통에 보상을 주는 대상을 정하는 법.

 

영화 ‘아문센’(2019)은 남극점에 세계 최초로 도달하게 된 아문센의 남극 탐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탐험 정신이 뛰어났던 그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북극 탐험에 대한 꿈을 꿉니다. 

한창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을 즈음 북극에 처음으로 도달한 사람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는 자포자기할 수 없었습니다. 꿈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을 속이고 남극으로 향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들은 선원들은 놀랍니다. 아문센은 “남극점이 아니면 죽음을….”이란 정신으로 타인의 희생을 모른척합니다.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동료를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하고 유럽인들이 혐오하는 일인 개를 잡아먹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스콧이 이끄는 탐험대보다 먼저 남극에 깃발을 꽂습니다. 영국은 그들의 비인간적인 탐험 과정을 대서특필하며 아문센의 업적을 깎아내렸지만 아문센은 자신의 나라 노르웨이에서는 영웅이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아문센만 고통을 감내하며 목적지로 나아가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문센만이 아닐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여정입니다. 한 명도 이 여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하든 원하진 않든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다. 인생은 그래서 고통의 바다라고 불립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보상 없이 당하는 고통은 없습니다. 다만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을 누구에게 받느냐를 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아문센은 역사에 길이 남는 탐험가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의도로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파견된 어느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밀림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포위당해서 그 병사만 살고 전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6개월 뒤 그 병사는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쳐나와 구조되었습니다. 그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지도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그는 밀림의 지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난 거야!”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종이에는 밀림의 지도가 아닌 영국의 지하철 지도였습니다. 그는 런던의 지하철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게 받는 고통에 대한 보상은 다시 런던으로 가서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상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작은 고통도 감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미카제 특공대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의 고통은 나라로부터 주어지는 명예였습니다. 나라는 명예를 줄 테니 목숨을 바치는 고통을 감내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생명을 바친 고통에 대해 보상해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라는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대한 보상은 결국 “우리가 누구를 위해 고통을 당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 자신을 위해 고통을 당하면 그 보상은 나 자신이 주어야 합니다. 힘든 일이 끝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자신에게 돌려주고 또 그 일을 끝냈다는 만족감에 미소 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줄 수 있는 보상은 거기까지입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결국엔 내가 하는 고통에 비해 충분한 보상이 오지 않는다고 여길 때는 그 보상이 걷잡을 수 없는 중독으로 빠집니다.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 등의 모든 중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결국엔 겪게 되는 입니다. 
 
결국엔 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살 것인지,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혹은 하느님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내가 누구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느냐에 따라 그 보상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을 위해 살며 하느님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를 결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커다란 문제에 직면합니다. 진짜 하느님이 계신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는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아닌지를 믿는 것은 그냥 ‘선택’입니다. 어차피 믿음은 모험입니다. 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든, 가족이나 나라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살든 나의 결정이고 하나의 투자입니다. 다만 누군가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입니다. 그러니 더 큰 보상을 기대하려면 더 큰 보상을 주실 수 있는 대상, 곧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편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차 사고로 몸 55%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살아난 이지선 씨가 있습니다. 이지선 씨는 대학교 4학년 때 오빠와 차를 타고 신호대기를 하던 중 뒤에서 음주운전 뺑소니 차량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40번의 수술을 해야 했으며,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몇 시간 동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살이 오그라들어 눈과 입을 몇 달 동안 깜빡이거나 다물 수 없었습니다. 목의 살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서 목과 척추까지 휘어져야 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정해야 합니다. 이 고통을 누구를 위한 것으로 만들지. 그리고 하느님을 위한 고통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녀에게 “자매님은 반드시 살게 될 것이고, 또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믿으니 자신이 당하는 지금의 고통이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루도록 허락한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손가락이 곪아 8개를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울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지?”

이지선 씨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으려고 했다.”라고 말합니다. 사고를 낸 사람의 차가 보험에 들어 있어서 감사했고, 몇 달 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사했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에 감사했으며, 환자복의 단추를 혼자 힘으로 끼울 수 있어서 감사했고, 문을 열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무엇 보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매우 행복해서, ‘진심으로’ 과거의 예뻤던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나의 고통에 대한 보상을 주는 대상을 선택하는 방법은 결국 ‘감사’입니다. 나 자신에게 감사하면 나 자신이 보상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는 중독자가 됩니다. 혹은 가족이나 나라에 감사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큰 보상을 위해 나아가거나, “이게 다야?” 하며 스스로 보상을 주려 할 것입니다. 결국 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투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이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감내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모 마리아께서 어떠한 보상을 받으셨는지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더라도 아문센이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보다 덜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나 그때도 그녀는 밝은 면을 보려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라고 말해 준 것입니다. 이지선씨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들리는 음성처럼 느껴져 힘을 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의 자세입니다. 복음을 지녔다면 절망이 그 사람을 짓누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그렇게 쉽게 자신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요? 잉태했다면 그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잘 보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참으로 두려운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모든 고난을 이길 힘을 줍니다. 이지선 씨는 그 울퉁불퉁한 얼굴로 찬송가를 부르고, 짧아진 손을 들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연예인과 자신이 10가지나 닮은 것이 있다고 하며, 지금 자기 모습에 매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지선 씨는 자신의 이런 마음이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다 잃고 그렇게 가난해졌을 때도 자신에게 빛이 되는 복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진 것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피조물에게 전할 복음이 꼭 있어야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내가 이런 고통을 받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대상은 모든 것을 그렇게 일어나게 해 주신 존재, 곧 하느님. 나의 고통의 보상을 주님께 받으려면 해야 하는 일.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상처를 준 사람일까요? 아니면 상처받은 사람일까요? 이런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형제님이 계십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해서 술자리를 자주 가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아내를 집에서 때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좋은 사람인데, 집에서는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술 마셔서 실수한 것뿐인데, 이 정도도 이해해주지 못하냐면서 화를 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 큰 문제가 있을까요? 그리고 상담을 청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원래 문제 있는 사람이 상담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내가 상담받으러 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아내가 찾아와서 눈물을 흘립니다. 
 
상담받으러 온 분이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본인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자존감이 심각하게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랑받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모든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배척하고, 무엇이든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고통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걷는 죽음의 길을 함께 걷는 어머니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을까요?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지키셨던 성모님의 삶 안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힘든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에게는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이 이긴 것처럼 착각에 빠져있었고, 아무런 잘못이 없었던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큰 죄를 지은 듯이 숨어 있습니다. 그만큼 자존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숨어 있는 삶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높여주시기 위해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삼아 주신 것이 아닐까요? 구원을 위해 계속 숨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성모님을 받아들이고, 성모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용기 있게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이다. 남을 이기는 것이 힘이라면 자기를 이기는 것은 진정한 강함이다.

- 노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 27)

 

나의 어머니께 아무 것도 해드린 것이 없어 많이 아프다. 받고만 살아왔다. 어머니는 자녀를 통해 가장 좋은 환희와 고통을 만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의 고통까지 함께 하는 사랑이 된다. 

고통도 믿으면 은총이 된다. 고통도 닫지 않고 열어두면 신비가 된다. 고통을 통해 배우게 되는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도 보호자 없이는 끝까지 지고 갈 수 없다. 뒤따라 오시는 성모 마리아의 십자가이다. 

무겁고 아픈 십자가가 뜨거운 눈물과 숨결을 만난다. 받아들이기에 십자가는 삶의 열매가 된다. 어머니는 도망치지 않으신다. 어머니를 통해 믿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끝까지 하느님을 믿으시는 어머니의 삶이시다. 

우리가 돌아갈 곳이 고통이 아니라 사랑임을 보여주신다. 고통과 사랑은 어머니 안에서 하나가 된다. 삶을 바꾸어 놓는 고통을 우리는 신비라 부른다. 고통의 신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추어있던 신비는 십자가로 드러나고 있다. 십자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보여주시는 어머니의 삶이시다. 십자가를 받고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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