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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3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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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

 

 

2022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가 아모스를 비난하자, 아모스는 자신이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사람으로 주님께 붙잡혀 예언자가 되었다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거듭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30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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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9장 1-8절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김한솔 도미니코 신부 강론

 

 

2022년 6월 30일 (목)
김한솔 도미니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6월 30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믿음을 보시고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몸소 행하시면서 하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시고 ‘메시아’로서 당신의 정체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늘 나라의 구원과 기쁨을 이 땅에 실현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질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졌고(레위 26,16; 신명 28,22.35 참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었기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마음속으로 단죄합니다. 

이에 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와 치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운지 물으십니다. 사실 가치론적으로 본다면 육체의 치유가 죄의 용서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신 다음,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시니, 그가 치유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를 본 군중은 몹시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이 같은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신 기적 사건으로 우리는 죄와 질병, 고통과 죽음까지도 모두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며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진정 치유되기를 바라야 할 것은?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주님에 대해 분노하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며 당신 사랑의 행위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어떤 태클에도 당신 사랑이 막힐 수 없다는 듯이 행위를 이어가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멈추지 않는 주님의 사랑도 고맙지만 육신의 병을 넘어 영혼의 병까지 고쳐주시는 사랑이 더 고맙습니다. 

중풍 병자가 당신께 왔을 때 주님께서는 육신의 병만 가엾이 보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병까지 가엾이 보셨습니다. 아니,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 곧 죄를 더 가엾이 보셨습니다.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 육신의 병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까지 병들었을 수도 있는데 오늘 중풍 병자도 어쩌면 이런 사람일 수 있을 겁니다. 

육신의 병으로 인해 오히려 성덕에로 더 나아간 영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의 경우 육신의 병이 마음도 병들게 하거나 육신의 병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 수도 있으며 그런데도 그저 육신의 병만 고치려고 들 수도 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더 가여운 사람입니까? 육신이 병든 사람이 더 가엾습니까? 영혼이 병든 사람이 더 가엾습니까? 

영혼이 죄에 억눌려 있고,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을지라도 정신이 육의 정신으로 가득하며, 존재가 미움과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런 사람이 더 가여운 사람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시 또 묻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 가엾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암에 걸렸을 때 의사를 찾아가는 사람과 주님을 찾아가는 사람 중에 누가? 병을 낫기 위해 약이나 음식을 챙겨 먹는 사람과 성체를 영하는 사람 중에 누가? 

물론 우리는 둘 다 해야겠지만, 꼭 하나만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냐 그 말입니다. 

사실 저는 환자에게 성체를 영해주면서 주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듯 이 환자의 병을 이 성체로 치유해주소서 하는 마음으로 영해줍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체를 영하기 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지금 이런 생각을 그저 관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수도자로서 삶을 마칠 때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병이 들거나 죽게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충실히 따르는 수도자로 죽어갈 수 있도록 오늘 중풍 병자처럼 저도 영혼의 죄까지 고쳐주시길 청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앓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고 나는 앓는 형제에게 부탁합니다. 모든 일에 대해서 창조주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건강하든 병약하든 건강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나 만일 누가 하느님이나 형제들에게 흥분하거나 화를 내고 곧 죽을 육신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너무 갈망한 나머지 조바심에서 지나치게 약을 요구한다면 이는 악에서 나오는 것이며 육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혼보다 육신을 더 많이 사랑하기에 형제다운 사람이 못 됩니다." 

오늘과 내일 상반기 공동체 피정을 하러 갑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리지 못함을 양해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고해성사를 부정하는 것이 어째서 “악한 생각”일까?

 

오늘 복음은 죄의 용서에 대한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라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치는 힘도 성령이시고 죄를 용서하는 힘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러니 병에 대한 치유가 일어난다면 또한 죄 용서의 권한도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실 때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만 싹 빼고 주셨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모든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자기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믿으면 엄마는 아이를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실수하며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74회에 약한 엄마에게는 화를 내고 싫어하며 강한 아빠에게는 순종하는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아빠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당연히 아빠 편이기 때문에 금쪽이는 가족에서 왕따인 엄마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존 욕구보다 더 컸던 것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릴 때 할머니와 아빠가 너무 무서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엄마는 금쪽이와 함께 있어 주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쪽이는 원망스러운 엄마를 뒤로하고 살기 위해 두려운 아빠와 할머니 편에 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건 아빠가 엄마에게 자기 권한을 다 주지 않으면 아이는 비뚤어지게 됩니다. 순종할 수 없고 질서도 모르는 아이로 자라는 것입니다. 아빠에게 순종한다고 엄마를 막 대하는 이 아이가 커서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일단 자녀를 낳았으면 아내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남편은 빠져주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를 무시하고 계속 아빠에게만 갈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이것 자체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고해성사의 목적은 ‘순종’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순종할 줄 알면 성장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 모든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그 권한을 ‘성령’을 통해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만 싹 빼고 성령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런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빠의 파견자입니다. 파견할 때는 자신의 권한도 함께 줍니다. 엄마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어서 아빠에게 직접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라 아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자녀에 대한 자신의 모든 권한을 다 내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는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아버지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마태 9,4)라고 말씀하십니다. 

‘개훌륭’에서 주인에게 입질하고 현관문까지 물어뜯는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보호자보다 자신이 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인제 와서 보호자가 영구를 길들이려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먼저 자신이 영구를 제압합니다. 그리고 주인 옆에서 영구를 제압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영구도 조금씩 주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누군가를 순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강 훈련사에게 있습니다. 강 훈련사는 자신의 이 권한을 주인들에게 줍니다. 주인들은 그 권한으로 개를 훈련시킵니다. 그렇게 영구는 순종하는 개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이양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시기에 당신께 순종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는 순종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할 때 진정으로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이를 위한 하나의 권한입니다. 가르칠 때 한 번 정도 물렸을 때 그 개를 몰아붙일 수 있겠지만 또 용서하며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개가 성장합니다. 강 훈련사의 권위를 등에 업어야 순종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등에 업고 신자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며 순종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부인 교회에게 다 내어주지 않는 비정한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녀가 진정한 순종을 배울 수 없게 됩니다. 권한이 이양된 이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진정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아빠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부정하는 우리 안의 나쁜 생각을 빼어버립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긍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과 부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

 

한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이 실험했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서 첫 번째 그룹은 ‘일을 좋아한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의 긍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허풍이 심하다.’, ‘거만하다’ 등의 부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문장들을 다 외웠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만 들어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시하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평가하게 했습니다. 
 
긍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긍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가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를 손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는 신부 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아마 늘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신부를 대부분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쳐 달라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다른 것을 보십니다. 바로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중풍 병자이지만, 예수님만은 고쳐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뿐인데도 이를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긍정적으로 보시고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병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과 정반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이 자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이지요.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을 가지고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확대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가져왔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믿음 없는 자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지요. 그래서 이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확실한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계속하면, 주님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계속된 의심과 불평불만만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관심이란 곧, 나 아닌 타인에게 마음 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내 시간을 내어 주고, 내 삶을 조금 나눠주는 일입니다.

- 송정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 2)

 

용서가 우리 삶을 지켜주고 있다.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용서이다. 뜨겁게 삶의 용서를 주시는 주님이시다. 용서로 닫힌 삶의 문을 우리들에게 열어주신다. 모든 생활의 길에는 용서가 있다. 참된 용서는 죄의 용서와 일어나 다시 걸어가는 것의 구분이 없다.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마음 속의 악한 생각을 봉헌하는 시간이다. 용서에는 아파하고 다시 시작하는 인격이 있다. 따뜻한 삶이 되는 순간 용서는 우리 일상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을 닮은 용서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자신을 보게하는 용서이다. 용서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실천할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 생활이 마비되어 있는 것은 용서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용서로 나아가게 하는 용기이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생활이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서를 받아들이는 용서와 붙어있는 우리들 삶이다. 용서의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쁜 날이다. 용서로 우리의 생활을 건져 올리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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