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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1.1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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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2026년 1월 1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1사무 1,1-8
    프닌나는 주님께서 태를 닫아 놓으신 한나를 괴롭혔다.
  • 복음
    마르 1,14-20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사무 1,1-8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프닌나는 주님께서 태를 닫아 놓으신 한나를 괴롭혔다.

1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였는데, 에프라임족 여로함의 아들이고 엘리후의 손자이며, 토후의 증손이고 춥의 현손이었다.

2 그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프닌나였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3 엘카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을 떠나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주님의 사제로 있었다.

4 제사를 드리는 날, 엘카나는 아내 프닌나와 그의 아들딸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6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7 이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프닌나가 이렇게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8 남편 엘카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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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르 1,14-20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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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2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4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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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철구 요셉 신부

평범한 하루에 찾아온 부르심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7). 이어서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십니다. 그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평범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17)라고 하시며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온 존재를 향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세상의 조건이나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닌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이렇게 드러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18).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1,20).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은 곧바로, 전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곧바로, 전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임을 기억하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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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때가 차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는 말은 마르코 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이고, 매우 짧은 표현이지만 풍성한 뜻이 담긴 표현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을 인격적이나 신앙적인 뜻에서 쓰지 않고, 물리적이고 시간적으로만 쓰면 더 기다리거나 미룰 이유가 사라진 때이며, 거사를 치를 때가 됐다고 하듯 중요한 또는 큰일을 벌일 바로 그때입니다.

그러나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찼다고 하는 때는 그런 뜻만 있지 않습니다. 물론 복음 선포라는 거창한 일이 시작되는 그 순간이 왔다는 뜻도 있지만 인격적인 뜻의 때일 것입니다. 첫째로 누구는 사라지고 누구는 등장할 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라지고 주님이 등장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하지만 실은 하느님의 때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이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자 세례자 요한은 퇴장하고 주님은 등장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아닌 역사가가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때란 세례자 요한이 퇴장할 때가 예수께서 등장하실 때이기에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이 붙잡힐 때를 노리고 있다가 나타나신 때이며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충분히 기다리다가 마침내 잡은 기회의 때일 겁니다. 흔히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하듯 큰 인물은 절대 서두르지 않고 자기 뜻을 천천히 이뤄간다는 뜻과 같은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때가 찼다는 말을 신앙적으로 이해하면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 세례자 요한은 사라지고 주님께서 오실 때가 됐다는 말이요, 주님의 오심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올 때가 가까워졌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오는 이 하느님의 때가 차고, 주님께서 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면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이때가 바로 회개해야 할 때이고 복음을 믿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게는 왜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을까? 이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흔히 우리 신학은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아직 내게는’일까요?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 나라가 우리 동네까지 이미 와있지만 아직 우리 집까지는 아니 온 것과 같은 뜻일 겁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가 마침내 내 집에도 오신다는 뜻일 겁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의 때가 차고 나의 구원의 때도 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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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다.

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히브리서>를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세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때”(카이로스)임을 밝혀줍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에서 “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온’ 나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온 나라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완료 시제는 과거에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거나 현재 존재하는 상태를 표시합니다. 곧 ‘이전에 이미 이루어져서 지금까지 완성된 상태로 머물러 있음’ 또는 ‘완성되어 있음’, ‘가까이 왔고 지금 가까이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은 “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이는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를 가져 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가 11,20). 결국,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요,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잘못된 것, 좋지 않는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러니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복음’을 따르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오늘 말씀 묵상 한눈에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예수님만이 평화의 길일까?

찬미 예수님.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통장을 채우고, 건강을 챙기고, 노후를 대비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존(Survival)'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물어봅시다. 내 생존이 완벽하게 보장되면, 그때는 정말 평화로울까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파흠'을 보십시오. 어느 날 그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옵니다.

"해가 뜨고 나서 해가 질 때까지, 네가 두 발로 걸어서 돌아온 만큼의 땅을 공짜로 주겠다."

파흠은 자신의 생존과 부를 늘리기 위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그는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달립니다.

"저기까지만 더, 요기까지만 더."

결국 해가 지기 직전, 그는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습니다. 평생 '생존'을 위해 달렸지만, 그가 얻은 것은 고작 그가 묻힐 3평 남짓한 무덤뿐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의 모든 땅은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비극입니다. 더 큰 비극은 그가 달리는 동안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평화는 땅을 얻으려는 이가 아닌 땅을 주려는 이의 것입니다.

평화는 오직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가 되어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의 일입니다. 구조대가 무너진 건물 잔해를 파헤치다가 기이한 모습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한 여성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양손으로 땅을 지탱한 채 굳어 있었습니다. 건물의 엄청난 무게를 등과 어깨로 버티며 죽어간 것입니다. 구조대원이 그녀의 몸 아래를 확인하자, 놀랍게도 갓난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기 옆에 놓인 휴대폰에는 이런 문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가야, 만약 네가 살아남는다면 엄마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해다오."

이 어머니에게 죽음이 두려웠을까요? 물론 무서웠겠지요. 하지만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창조의 본능이 죽음의 공포를 삼켜버렸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 아이의 생명을 창조하는 길을 택했기에, 무너지는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도 가장 숭고한 평화 속에 잠들 수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 감옥의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살려고 발버둥 칠 때, 그는 타인을 대신해 죽겠다고 나섰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한 가장을 살리는 순간, 지옥 같은 아사 감방은 찬미가가 울려 퍼지는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은, "이제 너를 위해 사는 사냥꾼의 삶을 멈추고, 남을 위해 죽어서 그를 살리는 어머니와 같은 창조자의 삶으로 건너오라"는 초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신부님, 예수님을 안 믿어도 훌륭하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우리 힘으로도 창조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심리학과 역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는 원숭이를 대상으로 아주 잔인하지만 중요한 실험을 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두 개의 가짜 어미가 있는 우리에 넣었습니다. 하나는 우유(생존)를 주지만 차가운 철사로 만든 엄마였고, 다른 하나는 우유는 안 주지만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엄마였습니다.

아기 원숭이는 배가 고플 때만 철사 엄마에게 갔고, 나머지 시간은 헝겊 엄마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이 원숭이들이 자라서 새끼를 낳았을 때, 그들은 새끼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젖을 물리지 않고, 때리거나 심지어 바닥에 패대기쳐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생존(우유)만으로는 부모(창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1970년 미국에서 발견된 13세 소녀 '지니(Genie)'의 사례는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13년 동안 작은 방에 감금되어 부모와의 대화도, 따뜻한 스킨십도 없이 짐승처럼 길러진 지니는 구조된 후에도 끝내 언어를 온전히 배우지 못했고, 타인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데 실패했습니다.

사랑은 입력 없이는 출력이 불가능합니다. 사랑받지 못한 존재는 결코 사랑을 창조해 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오직 창조자만이 피조물에게 "너는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사랑을 창조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를 보십시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10살에 욕조에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생존'의 관점에서 그는 실패작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에게 희망을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신이 실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창조된 '걸작'임을 깨달았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전 세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창조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왜 예수님만이 평화의 길일까요? 창조자를 만들 수 있는 분은 창조자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떤 위인도 우리를 다른 생명을 살리는 존재, 영혼을 구원하는 존재로 만들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창조자로서, 마치 어머니처럼 자녀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며 그 모범을 몸소 보인 신(神)은 예수님 외에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감히 아이에게 "너도 나중에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어. 내가 꼭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울 거야."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아니면, 창조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이 말씀은 빈말이 아닙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창조적인 사랑을 우리에게도 심어주어, 우리 또한 누군가를 살리는 '작은 창조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창조주의 보증수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면에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초대하시는 그분만이 유일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널 훌륭한 엄마가 되게 할게”라고 아기에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어머니뿐인 것처럼, “‘너를 창조자로 만들겠다.’라는 말은 오직 창조자만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물을 버리고 생명을 구하는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바로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분만이 우리를 생존의 허무에서 건져내어, 영원히 사는 창조의 기쁨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모든 말씀 묵상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2026년을 맞이하면서 바벨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유산소 운동은 많이 하지만, 근육 운동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들은 바벨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바쁘기도 했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이 예전과 달리 더 무겁게 느껴진 것입니다. 한참 바벨 운동을 할 때는 지금보다 더 무거운 무게도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단번에 무거운 바벨을 들 수 없습니다. 힘이 좋아서 거뜬하게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꾸준히 해야 힘들지 않습니다. 운동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비롯한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단번에 잘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힘들까요? 꾸준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이 바쁘다고, 할 일이 많다고,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주님과의 만남을 뒤로만 미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어렵고 힘들 때, 하느님 탓을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과의 만남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매 순간 당신께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가면서 주님 곁에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야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여기서 말하는 ‘때’는 단순히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결정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구원의 시간’이 충만히 찼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도덕적 반성을 넘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근원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회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에 전인격적으로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장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한 종교적 수련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삶의 현장(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에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곤 했는데, 여기서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를 지명합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이 철저하게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제자들은 계산하지 않고 곧바로 따랐다고 전해 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물(안정, 익숙함)을 버릴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나요? 혹시 주님을 따르기 위해 지금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나만의 그물’은 무엇일까요? 이제는 그분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해서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매 순간을 소중히 하면 어느새 결과가 바뀐다(앨런 랭어).

 

다른 말씀 묵상도 함께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때는 우리의 실패를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으로 바꾸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하느님께서 역사와 삶 안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결정적 순간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한 인격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의미 있는 삶은 머뭇거림 속에서 완성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선택 안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나 우리는 종종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나라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우리의 현실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코 성급하게 강요하지 않으며, 사람의 길 속에 스며들어 옵니다. 하느님과의 거리는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삶을 기꺼이 맡길 때 비로소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때는 인간의 시간을 멈추게 하지 않고, 그 시간을 새롭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때의 가치는 결단을 요구하는 지금이며,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그 지금을 사랑과 정의로 변화시키는 삶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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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1장 18절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르코복음 1장 18절 피어나네 오늘 말씀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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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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