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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2/05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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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님이 영화롭게 내려오시리라.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

주님,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저희를 죄의 위험에서 지켜 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하여 주소서. 아멘.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2월 5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29,17-24)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 오늘 복음
    (마태 9,27-31)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이사 29,17-24
오늘 제1독서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9,27-31
오늘 복음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5일
전병권 보나벤투라 신부

 

✚ 교황님 12월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41

✚ 강론시작 07:24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믿음으로 바치는 모든 기도는 이미 응답이다.

복음서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받고 얻고 열릴 것이라는 말씀이나(마태 7,7-8 참조)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끈질기게 먹을 것을 청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루카 11,5-8 참조) 불의한 재판관에게 졸라 대는 과부의 비유는(18,1-8 참조)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지요. 이러한 말씀을 읽고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를 시작하였다가,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지쳐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한 적은 없나요? 

주님께서는 얼마 동안 기도하라고 기간을 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심지어 정의 때문이 아니라 다만 성가셔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이나, 우정 때문이 아니라 귀찮아서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이에게까지 하느님을 비유하시면서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을 좀 성가시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귀찮음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졸라 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끈질기게 들이미는 이들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온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기도는 우리에게 이미 자비와 은총의 열매이고 하느님께는 기쁨이 됩니다. 

주님께서 노리치의 율리아나 신비가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기도가 너에게 아무런 맛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기도하여라. 네가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기도는 유익하기 때문이다. …… 무미건조하고 병들고 나약한 기도라 하더라도, 전혀 의미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너의 기도는 나에게 기쁘다. 믿음으로 바치는 너의 모든 기도가 그렇다”(『사랑의 계시』, 173-174면).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보지 못하는 나를 보는

오늘 독서는 오실 주님께서 보지 못하던 이들을 보게 하시리라고 예언하고, 복음은 오신 주님께서는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보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날에는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그런데 우리의 전례가 이 말씀을 들려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눈이 멀어서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이제는 봐야 하고 주님 덕분에 보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볼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봐야 한다는 말입니까? 볼 것 못 볼 것 다 봤는데 뭘 더 봐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은 비록 눈이 침침해도 보고 싶은 것 다 봤는데 뭘 더 봐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다 봤다고 생각하고 봐야 할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처럼 보지 못하는 나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뭘 보지 못하는지 성찰해보니 이런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만 보는 죄책감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만 보는 어두움 때문에 하느님의 선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지은 나에 대한 미움과 분노 때문에 하느님 자비가 있을 자리가 없는 나를, 그래서 무자비한 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 자비가 없기에 악한 세상에 대한 연민도 없고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란 인간은 하느님 자비가 내 안에 없는 무자비한 나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도 자비가 없는 무자비한 나입니다. 이제 이렇게 무자비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청하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처럼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당신 은총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조명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게 해 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며 깨어나고, 눈을 감으며 잠에 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뜨고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있고, 눈을 감고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눈 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7)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

그리고 <복음>은 ‘눈 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비록 눈은 멀었어도 믿음으로 이미 ‘눈 뜬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눈 먼 이가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보게 된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이 믿음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대시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믿고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눈 먼 이들은 건강하게 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했던 것입니다,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믿음으로 걸어가지만, 그날이 오면 그분의 집안에서 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 27,1, 화답송 후렴).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9,27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장애 극복은 청하며, 자아 극복엔 무관심하다면?

[도입] 다리 없는 영웅의 추락
"블레이드 러너"라고 불리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종아리뼈가 없어 생후 11개월 만에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탄소 섬유로 만든 의족을 끼고 비장애인들과 겨루어 올림픽에 출전하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가 그를 "인간 승리의 아이콘"이라며 칭송했고, 그는 "하느님께 불가능은 없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분명 육체의 장애를 극복하는 기적의 주인공이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 발렌타인데이, 전 세계는 경악했습니다. 그 영웅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총으로 쏴 죽인 살인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법정에서 "도둑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지만, 평소 그의 불같은 성격과 통제되지 않는 분노가 원인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다리가 없는 육체의 장애는 기적처럼 극복했지만, 자기 내면의 분노라는 자아는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기적은 끌어왔지만, 그 기적을 지탱할 '성품'이라는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에, 영웅은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전개] 준비 없는 축복은 저주다
우리는 종종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기적을 바랍니다. 복권을 사는 행위 자체는 "혹시나" 하는 일종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그 거액을 감당할 그릇 없이 당첨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2002년, 미국 역대 최고액인 3,700억 원의 복권에 당첨된 잭 휘태커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는 독실한 척하며 십일조도 냈고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돈벼락은 재앙이었습니다. 그는 도박과 술에 빠졌고, 그가 준 돈 때문에 손녀딸은 마약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쓸쓸히 죽어가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그 티켓을 찢어버렸어야 했어요.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믿음은 하늘의 기적을 땅으로 부르는 힘입니다. 그러나 순종(절제와 하느님 뜻에 따름)은 그 기적을 안전하게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이 깨져 있는데 기적만 부어달라고 조르는 것은, 내 집에 홍수가 나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 믿었지만,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두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예, 주님!"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진짜였고, 그 믿음대로 눈이 뜨이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마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온 지방에 퍼뜨렸습니다. 그들은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선한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백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치유)은 얻었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침묵과 메시아의 비밀)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치유받은 몸으로 불순종의 길을 걷는다면, 그 치유가 과연 그들에게 영원한 축복이 될 수 있을까요? 몸의 눈은 떴을지 몰라도, 순종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심화] 깨진 그릇에는 은총이 머물지 않는다
성경과 역사 속에는 이런 안타까운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구약의 모세를 보십시오. 물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백성 앞에서 그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팡이로 바위를 쳤고 물이 솟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혈기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기적은 일어났지만 순종이 없었기에,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 아들을 바쳐라"고 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기적을 포기하고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그제야 하느님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며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결론] 기적보다 더 위대한 순종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대림 시기를 보내며 기적을 청합니다. 병이 낫기를, 자녀가 성공하기를,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은 귀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그 기적을 감당할 순종의 그릇을 준비했는가?"

오상의 성인 비오 신부님을 기억합시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성인이었지만, 교황청의 오해로 인해 2년 동안이나 대중 미사와 성무 집행을 금지당했습니다.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비오 신부님은 한마디 변명도 없이 수도원 독방에 갇혀 지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결정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고통입니다."

그의 거룩함은 오상이라는 기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억울함마저 받아들이는 순종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기적을 줄 수 있다고 믿느냐?" 

우리는 "예, 주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더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침묵하라 할 때 침묵하고, 멈추라 할 때 멈출 수 있느냐?"

믿음은 기적을 부르지만, 순종은 그 기적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꿉니다. 자아를 극복하는 순종 없는 기적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믿음의 완성은 순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예전에 어떤 선풍기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풍기라고 하면 반드시 날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선풍기에는 날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날개가 없어도 시원했고,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날개가 없어도 선풍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많이 파는 날개 없는 선풍기를 처음 만든 다이슨의 ‘에어 멀티플라이어’와의 만남에 대한 기억입니다. 2009년에 나온 이 제품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지금은 많은 회사에서 비슷한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회사에서 소리가 작고 요금이 덜 나오는 선풍기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풍기 날개를 없앤다고 생각할 수 없었고, 반면 다이슨은 ‘선풍기에 꼭 날개가 있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도 우리는 자기의 고정관념을 지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주님의 새로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고정관념으로 이웃을 판단하고 심지어 주님까지도 자기 틀 안에 가둬두려고 합니다. 
 
좀 더 넓은 사고를 해 보면 어떨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면서 사고를 멈추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구나.” 하면서 새로운 사고를 갖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주님의 활동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눈먼 사람 둘이 했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을 단순한 치유자가 아닌,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로 고백하는 말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멀쩡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지만, 정작 눈먼 이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소경의 모습은 자기의 고정관념으로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에서 즉시 고쳐 주지 않으시고 집 안까지 그들이 따라오게 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간절함과 끈기를 시험하시는 동시에, 군중의 호기심에서 벗어나 인격적인 만남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라고 묻지요. 치유는 마술적인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전적인 신뢰(인격적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라는 말씀으로 치유됩니다. 치유의 근원은 예수님의 능력이지만, 그 능력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그릇은 넓은 사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고를 멈추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사람만이 갖게 됩니다. 불신과 의심으로 닫힌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고정관념을 통해서는 주님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적인 사람들이 행하는 일을 지속해서 행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당신의 성공을 막지 못한다(브라이언 트레이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에게서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 안에서만 성립합니다. 은총은 믿음의 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우리 존재를 내어놓고 내어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치유는 육체의 눈을 열기 전에 믿음의 눈을 여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기보다 상황, 상처, 체념을 더 빨리 믿습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열리는 자에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우리의 삶도 밝아집니다. 

모든 치유와 변화는 믿음이라는 마음 작용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문이 되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자연스레 변화가 시작됩니다.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날 믿음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믿는다는 것이 기쁘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 대림시기는 은총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며 믿음이 열리는 뜨거운 성찰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통해 치유와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삶도 ‘믿느냐?’라는 초대 앞에 서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치유와 새로움이 열립니다. 

 

 

 

마태오복음 9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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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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