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세.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 부활의 신비를 거행하는 저희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13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1,19-26)
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 오늘 복음
(요한 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사도 11,19-26
오늘 제1독서
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요한 10,22-30
오늘 복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13일
김민호 베네딕토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02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바르나바 없이는 사도 바오로도 없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순교 뒤에도 계속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안티오키아까지 퍼져 나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가 주님께 돌아서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안티오키아 교회입니다. 말 그대로 위기가 곧 기회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굽은 자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분’이라 믿고 바라 왔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그러한 믿음과 희망의 사람 바르나바를 만납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로 ‘사울’이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지금의 튀르키예 남동쪽에 있는 타르수스로 가서, 회심한 뒤 고향에 내려와 있던 사울을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갑니다. 위대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크게 회심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누구도 사울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을 때, 바르나바는 사울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기도 하며 또 이방인 선교 길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 길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바오로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르나바 없이는 사도 바오로도 없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패배 의식과 절망이 낳은 말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는 모두 부활한 새 생명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믿고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모두 작은 사도들
오늘 사도행전은 박해 때문에 흩어진 신자들이 안티오키아까지 갔지만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라고 전합니다.
이것은 제가 중국 선교하러 가서 한족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 조선족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그것도 복음 선포이긴 하지요. 그러나 초대교회와 사도들이 유다인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다면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교가 되지 못하고 유다교 내지 유다교의 한 종파로 남았을 것이고 가톨릭교회도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가톨릭(Catholic)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보편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만인에 이르는’ ‘치우치지 않는, 편협하지 않은; [사람이] 도량이 넓은, 포용력이 있는’ 한마디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바로 그 내용이지요.
우리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보편된 교회를 믿으며”라고 고백하잖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 교회 역사를 생각해봅니다.
어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가 할례받은 유다인의 공격을 받고, 유다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 선포로만 움츠러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사도행전에서 일부 신자들은 유다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을 때 다른 일부 신자들이 그리스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 교회 역사는 지금처럼 가톨릭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오늘 사도행전에서 우리 교회가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유다교, 유다인에게서 떨어져나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름 없는 일부 신자들이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치 않았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바르나바 사도를 파견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바르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온 것과 같은 결정적인 사건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바르나바나 바오로 같은 대 사도도 있어야겠지만 이름 없는 신자들처럼 소 사도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한 것이고, 내가 받은 복음과 신앙을 나만 소유치 않고 이웃과 나누려는 선교사 의식을 가진다면 대 사도만 사도가 아니고 소 사도인 우리도 사도임을 강조하려는 거지요.
우리 모두 작은 사도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오늘 <복음>의 후반부(27-30절)는 이번 <주일복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부분(22-26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는 ‘봉헌축제’가 열린 시절이 추운 한겨울이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 유대인들의 마음이 얼어붙었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러한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라는 그들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위협적으로 “둘러싸고” 따지고 대드는 모습에서, 그들의 의혹이 얼마나 심각하고, 그들의 감정이 매우 도전적이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이분이 메시아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분명히” 말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이미” 말로서 밝히셨고, 또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로써 “분명히” 드러내 밝히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분명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착한 목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현실적, 정치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할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기보다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양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6)
그러니 참으로,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도 ‘자신이 원하는 메시아’, ‘자신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를 따르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그분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0,28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
오늘도 당신은 제 온 몸에
당신 손때를 묻히십니다.
제 손을 꽉 붙들고
놓치지 않으시려
손깍지를 꼭 끼십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허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제가 당신께
소중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진정, 저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목자형 인간관계 모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0장 22절에서 30절 말씀을 통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착한 목자께서는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앞장서’ 나아가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따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책임을 느끼실까요?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지만, 인간적인 애정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양 떼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매우 ‘쿨’한 분이십니다. 관계에 있어 질척이거나 끈적이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하시고, 앞장서 나아가실 뿐입니다. 따르든 따르지 않든 그것은 양들의 선택이며, 그에 대한 심판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양 떼를 이끌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양들은 흩어집니다. 목자가 자신을 보호하려고는 하지 않고 귀찮거나, 심지어 잡아먹으려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영화가 ‘케인에 대하여’입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한때 자유로운 여행가였던 에바가 아들 케빈을 낳으면서 겪게 되는 깊은 내적 갈등과 파국적인 결과를 그린 작품입니다. 에바에게 아들 케빈은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앗아간 존재, 축복이기보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처럼 여겨집니다.
그녀는 케빈이 태어나기 전, 열정적으로 세상을 누비던 자신의 모습이 담긴 지도를 방 한가득 붙여놓고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이러한 에바의 무의식적인 거부감은 케빈과의 관계에 처음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케빈은 어린 시절부터 유독 엄마인 에바에게만 적대적이고 까다로운 아이였습니다. 엄마의 품에 안기면 울음을 터뜨리고, 엄마의 말을 따르지 않으며 끊임없이 에바의 인내심을 시험합니다.
반면, 아빠 프랭클린 앞에서는 비교적 순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여, 프랭클린은 에바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여기거나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에바는 아들 케빈이 아빠와 진정한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케빈은 부부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에바를 더욱 고립시킵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려 애쓰지만, 그 사랑은 일방적이고 뒤틀린 형태로 나타나며, 케빈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에바는 케빈의 행동 이면에 있는 악의를 감지하지만, 남편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합니다.
결국, 케빈은 십 대가 되어 학교에서 끔찍한 사건을 저지릅니다. 그는 활을 사용하여 다수의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아빠 프랭클린과 여동생마저 살해합니다. 이 사건으로 에바는 아들을 둔 ‘가해자의 엄마’로서 사회의 모든 비난과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양 떼를 이끌고 주인에게로 향하는 목자로서의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케빈의 엄마가 남편에게 아이를 잘 키워서 데려가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러한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앗아간 존재로 아들을 바라보았고, 아들과 아빠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시키지 못했으며, 그 결과는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파멸로 이어졌습니다. 에바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아들의 죄를 평생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전에 이러한 사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능한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일해서 아이를 키웠는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자 엄마를 미워하고 학교 가기도 거부합니다. 이때 아내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고 아빠와 함께 살게 된 아이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엄마는 이혼을 다시 생각합니다. 아이를 키워서 데려갈 대상이 없는 채로 아이를 키우면 아이를 잡아먹는 엄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양 떼를 이끌고 나아가는 참된 목자로서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관계에 휘둘리거나 집착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고 오히려 내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일 것입니다. 내가 먼저 아버지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나를 따르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도망 다닐 것입니다.
계속 정진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자녀들은 끝까지 쫓아올 것입니다. 물론 그다음은 하느님께로 내가 먼저 나아가며 쫓아오게 하면 영원히 자녀는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좋은 예가 ‘정은표 씨 가족’입니다. 정은표 씨 가족은 정말 교회의 가르침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아빠가 아이들 공부하지 말고 농장에 가자고 할 때 아이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반대합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빠가 가자면 가는 것이지, 이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엄마는 아이들에게도 사랑받습니다. 김하얀 씨는 이런 면에서 목자형 인간관계를 맺을 줄 아는 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두 친구가 교실에서 싸웠는데, 마침 지나가시던 담임선생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두 친구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아주 이상한 벌을 내렸습니다. 상대의 뺨을 서로 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때림의 강도가 약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호통을 치면서 그렇게 약하게 때리면 자신이 직접 세게 때린다고 하셨습니다. 그 뒤 강도가 세졌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세게 때리는 것입니다. 둘의 얼굴은 보기 싫을 정도로 벌겋게 부어올랐습니다.
방과 후, 이 둘은 또 싸웠습니다. 왜 먼저 세게 때렸냐는 이유였습니다. 이 둘은 “네가 먼저 더 세게 때렸잖아.”라면서 싸웠습니다.
아마 서로 상대에게 맞은 강도 그대로 때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맞은 사람은 더 세게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앙갚음을 위해 서로에게 때리는 강도를 높였던 것이지요. 실제로 자기 맞은 것에 40% 정도 세게 때린다고 합니다. 나만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기 머리를 휘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수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이익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과 행동이 과연 자기를 편하게 할까요? 그럴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 보복의 말과 행동이 상대를 통해 더 큰 보복으로 자기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빨리 이를 끊어 버리는 것이 더 큰 이득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이 필요하고, 평화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이기는 삶이 됩니다. 모든 폭력은 결국 지는 삶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말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이미 다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이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갈수록 커가는 예수님의 인기에 사람들은 더 몰려들 것이고, 이 모습이 당시 지배하던 로마를 자극해서 상황이 악화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신앙을 존중해주는 로마였는데, 신앙의 탄압까지 받게 되어 예전의 바빌로니아 유배 생활의 반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들의 속이 타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커다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제거할 마음을 품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없어야 자기들이 산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결국 주님의 양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평화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손해 본다는 생각보다는 자기 마음의 상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기 삶을 잘 사는 일이 곧 자기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다 (장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로 거듭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우리는 얻었습니다. 믿고 사랑하는 것은 일치된 생명의 하나된 모습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통해 우리는 생명과 존재에 대한 참모습을 깨닫습니다. 하나 되는 일치가 있어 사랑의 여정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의 일치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일치는 하느님의 가장 간절하신 참뜻입니다. 일치와 함께 걸어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 되는 일치는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길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실존적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난해도 하나 되는 일치는 끝까지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이것이 일치입니다.
일치의 힘으로 떨치고 일어나야 할 가장 아름다운 봉헌의 때 성모 성월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모두 일치의 하나된 이름입니다. 빼앗아 갈 수 없는 가장 좋은 일치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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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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