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02/09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2. 9.
반응형

 

 

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2025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2월 9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2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5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6,1-2ㄱ.3-8)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 제 2독서
    (1코린 15,1-11)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5,4)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이사 6,1-2ㄱ.3-8
오늘 제1독서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나는 말하였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1코린 15,1-11
오늘 제2독서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루카 5,1-11
오늘 복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2월 9일
정성환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16:52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은 부르심과 파견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르심을 받은 이가 사명을 받아 파견되기까지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초월하는 거룩함 앞에 선 인간은 죄 많은 제 모습을 깨치기 마련입니다.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사야는 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직접 뵙고 그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더러움을 깨닫습니다. 

예언자의 소명에서 핵심 도구인 입이 더럽다는 것은 근본적인 장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타는 숯으로 정화된 다음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전에 먼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하고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노련한 어부 시몬은 밤샘 고기잡이에서 허탕을 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그물이 터져 나갈 정도로 잡은 물고기 앞에서, 아니 예수님의 신적 권위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죄인인 자기에게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10)라는 말씀으로 그를 정화하시어 새로운 임무로 부르시고, 시몬과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5,11) 예수님을 따릅니다.

교회를 박해하였기에 “칠삭둥이”(1코린 15,8)로 자처하는 바오로는 열두 사도와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은총으로 정화되어 “지금의 내가”(15,10)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도 부르심부터 파견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렇게 우리의 합당함이 아니라 부당함을 정화하여 응답을 준비시켜 주는 은총에 자신을 내맡깁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소 체험? 하느님 체험! 

얼마 전 성소 문제로 고민하는 한 수도자를 영적 동반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니 우리의 성소는 행복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냐고, 그러니 수도 생활에서 행복하지 않고 밖에서의 생활이 더 행복하면 그것이 우리 성소가 아니냐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이런 논리는 이분뿐 아니라 제가 관구장일 때부터 떠나려는 저의 형제들과 수도자들에게서 많이 접한 거였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논리는 수도 생활에서 행복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수도 생활 안에서 더 행복하라고 부르셨음을 망각하거나 부정하는 겁니다. 

사실 이런 수도자는 가난과 정결과 순종의 수도 생활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에 실패한 사람이고 여기서는 실패하고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입니다. 

수도원 안에는 사랑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하며 밖에서 사랑을 찾는 것이며 자기가 실패해놓고는 환경을 탓하는 것이며 자기 행복을 환경에서 찾는 것입니다. 

행복으로의 부르심은 보편 성소입니다. 하느님께선 누구나 행복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도 생활만 행복의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수도원에서 먼저 행복하고 가장 행복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행복을 증거 하도록 부르심 받고 파견되는 사람이 수도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파견할 사람을 찾으시고, 이사야는 자기가 파견되어 가겠다고 주님 앞에 나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그리고 복음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시는데 다른 사람 낚는 어부요 행복 어부로 부르십니다. 곧 행복을 주시는 주님께로 자기만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데려가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이요 ‘주님 체험’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한 토마처럼 하느님을 나의 주인님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현존(現存) 체험’과 하느님 ‘현전(現前) 체험’을 하고 그 하느님이 바로 나의 주인님이시라는 체험까지 해야 나는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고, 그분이 보내시는 대로 가는 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와 베드로가 공통으로 또 체험한 것이 바로 죄인 체험입니다.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고 하느님 앞에 내가 있다는 체험을 할 때 이때 인간이 체험하는 것이 죄인 체험과 한계 체험이며, 한없이 크신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은 자기 체험입니다. 

이렇게 무한하신 주님을 몰라뵈었다는 죄 체험이고, 이렇게 유한한 자기가 주님을 몰라뵈고 까불었다는 죄 체험이며,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겸손한 자기 체험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의 제일가는 어부였고 그래서 우쭐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왠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날 자기 장모를 고쳐준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배에 타 사람들을 가르친 다음 깊은 데로 가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그 

래서 ‘스승님’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전날 자기 장모를 고쳐준 체험이 있어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많이 잡히는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의 입에서는 이내 ‘주님’이라는 말이 나왔고 자기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스승이 아니라 주인이 된 이상, 제자 이상으로 주인님의 명을 따르는 종이 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베드로가 됩니다. 성소 체험은 하느님 체험이요 주님 체험임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진정한 변화

연중 5주일 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변화,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 공동체 혹은 가정의 변화, 타인들의 변화와 자기 자신의 변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는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변화’란 단지 자신의 악습이나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는 자기 교정이나 자기 개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질적인 변화, 곧 삶의 패러다임, 사고의 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 등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사람들이 회개하면 변화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변화의 힘은 회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만남에서 오며, 회개는 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 곧 은총과 사랑의 체험의 수락이 변화와 회개를 불러오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가 그러하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그러하고,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을 체험했음을 전해줍니다. 곧 하느님과의 만남 체험이 회개를 불러왔음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코린 15,9)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이처럼, 하느님 체험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곧 체험이 회개와 변화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니 회개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통해, 그 은총을 수락할 때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1코린 15,10)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앎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카 5,5)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하는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체험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앎을 버리는 바로 이 자리에서, 베드로는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죽음의 수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자신의 앎, 그것도 이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앎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많은 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단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자신의 앎을 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어떤 한 분 ‘선생님’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체험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진정한 변화’는 찾아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변화’는 자기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회개시키시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이 선물, 이 은총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하느님과 우리의 합작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무능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무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를 원한다면, 아니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그 말씀의 성취를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5,5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과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과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에 의해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이 십일조를 내라는 뜻이라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겸손함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권유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순종합니다. 그러자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상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게 행복하겠습니까, 사람을 낚는 존재가 행복하겠습니까? 행복은 자존감에 의해 결정됩니다. 종이배를 만드는 어린아이가 행복할까요, 우주 비행선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할까요, 인간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하다면 먹는 것만 찾는 짐승처럼 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짐승는 짐승은 낳고, 인간은 인간을 낳습니다. 개 팔자가 아무리 상팔자라지만, 강아지를 부러워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낳고 기를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더 높은 차원의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약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느끼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끝에 매번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하느님 자녀를 낳으라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하십니다.

‘옥씨 부인전’에서 노비 구덕이는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양반에게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주인들은 더 악랄한 존재들입니다. 구덕이가 그렇게 고난을 받는 이유는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탈출하여 한 주막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그 집에 옥태영이라는 외국에서 살다 온 양반이 묵게 됩니다. 그녀는 외국에서 살아서인지 양반임에도 구더기처럼 살라고 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덕이에게 동무처럼 잘해 줍니다. 구덕이는 그동안 양반에게 당해온 것에 비해 큰 사랑을 받으며 가당치 않은 꿈을 굽니다. 옥태영의 집에서 동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적 떼가 주막에 불을 질러 옥태영이 죽습니다. 죽으면서 옥태영은 구덕이에게 꼭 꿈을 이루라고 그녀의 목숨을 구합니다.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를 손녀딸로 착각합니다. 구덕이는 옥태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잠시 옥태영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산적들에게 벌을 받게 한 이후 다시 떠나려고 합니다.

이때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에게 옥태영으로 계속 살아줄 것을 권합니다. 구덕이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옥태영으로 삽니다. 그러면서 옥태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과 같은 억울한 처지에 있는 노비들을 변호하며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옥태영이 된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예수님은 구덕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인권을 신권으로 들어높여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필요할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면 전념하며 불쌍한 이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멕베스가 그러한 예입니다. 멕베스는 마녀들이 하는 예언을 믿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그래서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결국 자신이 미쳐버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왕의 권위를 합당하지 않았지만, 왕 자신이 우리에게 승계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처지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게 하셨음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이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면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내가 누구이고 그분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주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도 그분을 이기고 나에게 주신 것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축복을 멜키체덱 대사제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받았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악과를 반드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덕이가 자신이 구덕이였음을 잊으면 옥태영으로 살아도 소용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 성당에는 어린이 미사에도 또 청소년 미사에도 많은 아이가 나옵니다. 교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큰 희망이고 또 큰 기쁨이지만, 50대 중반을 넘어선 제가 아이들과 함께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세대 차이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 미사를 하고 나면 힘이 쫙 빠집니다. 함께하는 젊은 신부 한 명만 있어도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신부의 부족으로 인해 우리 본당에 보좌 신부가 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친한 선배와 이야기할 일이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었던 고민, 즉 본당에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 혼자 아이들을 담당하기에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우울한 마음으로 이야기했는데, 선배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힘내서 열심히 아이들에게 관심을 둘 수 있었습니다. 나니까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힘이 되는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힘이 빠지는 말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너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야.”라는 말을 해 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로 더 안 되는 길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십니다. 군중은 주님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그물만 씻고 있을 뿐입니다. 그물을 씻고 있다는 것은 어부 일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단한 일과를 마쳤는데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을 따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따릅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도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베드로는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적 권위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표현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인데, 하느님의 말씀에도 그렇게 집중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부르심에 커다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힘이 되는 이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희망의 말씀을 계속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세상의 일에만 집중하면서, 주님 곁을 떠나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의 이웃에게는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청렴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

- 랄프 왈드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우리를 받아주시는 깊은 마음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마음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깊은 데의 우리 마음속을 바꾸어 줍니다. 마음을 찢고 만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깊은 데서 태어나고 만들어지는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복음의 마음을 건네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시련의 풍랑 속에서도 사람 낚는 어부들은 마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매순간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물을 끌어올리는 기쁨과 행복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은총을 따르고 맞아들이는 어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르는 본마음의 주일 되십시오. 진실한 마음을 바치는 거기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데입니다.

 

 

 

 

 

 

반응형

댓글